리오하의 영광,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Written by: 신 윤정

매년 연말이면 TV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배우들처럼, 와인업계에도 각종 수상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지난 11월 발표된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의 ‘TOP 100 World Wines 2023’, 소위 말하는 ‘제임스 서클링 탑 100’도 그중 하나다. 입맛은 주관의 영역이나 올 한 해 동안 제임스 서클링이 리뷰한 39,000여 종의 와인 중 상위 100개를 선정한 만큼 품질은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올해는 특히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Marques de Murrieta) 와이너리에 더욱 시선이 몰린다. 이들의 아이콘 와인인 카스틸로 이가이 그란 레세르바(Castillo Ygay Gran Reserva Especial) 2012가 무려 100점을 받으며 탑 100에 이름을 올림과 동시에, 쟁쟁한 경쟁작들을 뒤로 하고 ‘올해의 스페인 와인(Spanish Wine of the Year)’이라는 왕좌에 앉았기 때문. 리오하의 귀족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이 아이콘 와인은 몇 해 전 2010 빈티지로 ‘2020 와인 스펙테이터 탑 100 1위’에도 등극한 바 있다. 지난 11월 방한한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아시아 수출 매니저, 알베르토 페르난데즈(Alberto Fernandez)와의 디너에서 카스틸로 이가이 그란 레세르바를 포함한 대표 와인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소문은 무성하나 생산량이 적어 아무나 접할 수 없다는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와인들 말이다.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아시아 수출 매니저 알베르토 페르난데즈(Alberto Fernandez)

귀족의 조건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는 1852년 루치아노 무리에타(Luciano de Murrieta)가 스페인 리오하 지역에 설립했다. 군인이었던 그는 19세기 스페인 내전 기간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했는데, 이때 우수한 품질의 보르도 와인들을 접하며 와인의 꿈을 키웠다. 그가 훗날 ‘스페인 근대 와인 생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배경에는 이때 보르도 와인에서 받은 영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대에 복귀하는 대신 리오하행을 택한 루치아노 무리에타는 이후 리오하 최초로 프렌치 오크통에 와인을 숙성시켰고, 디스테밍(Desteming)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 또 보르도의 샤토 시스템을 모델로,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터에 카스틸로 이가이(Castillo Ygay : 이가이 성)를 세우고 싱글 빈야드 와인을 만들었다. 진정한 귀족이란 가진 것을 유지하려는 자가 아니라 새로움을 받아들여 반향을 일으키고 흐름을 이끌어 가는 능력을 갖춘 자가 아닐까. 루치아노 무리에타처럼. 리오하 와인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고품질 와인은 오늘날 리오하 와인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는다.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와이너리

한 세기를 지나 이가이 성의 열쇠는 다른 가문에 넘어가게 된다. 1983년 크레엑셀(Creixell) 백작 가문이 와이너리를 매입한 것이다. 그간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와인이 스페인과 리오하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이미 자리를 잡았지만, 뿌리부터 귀족인 이 가문은 대대적인 투자로 한 번 더 혁신을 꾀한다. 지난 2021년에는 이가이 성 옆에 6년에 걸쳐 완성한 최신식 대규모 양조장을 공개했다. 현 오너는 20대 중반이었던 1996년부터 와이너리를 이끌고 있는 비센테 달마우(Vicente Dalmau).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인이자 슈퍼 리오하라 불리는 와인 달마우(Dalmau)를 만든 장본인이다.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와인은 한 세기가 지나고 소유자가 바뀌었는데도 늘 리오하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팀 앳킨(Tim Atkin)의 리오하 스페셜 리포트 2022의 First Grower 항목에서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이름이 탑을 장식한 것만 보더라도 확실히. 그럼 다시, “건강과 재산, 사랑을 위하여!(Salud! Dinero! Amor!)”를 외치며 시작된 알베르토 페르난데즈와의 디너로 돌아가보자.

디너에 나온 와인들

알바리뇨도 품격 있게

크레엑셀 가문이 본격적으로 와인 비즈니스에 뛰어든 곳이 리오하라면, 이 가문의 뿌리가 뻗어 있는 곳은 갈리시아(Galicia) 지방이다. 1511년부터 이 지역 영토와 파소 바란테스(Pazo Barrantes)라는 대저택을 소유하며 알바리뇨 품종으로 자가소비용 와인을 만들어 왔던 크레엑셀 가문. 1983년 리오하의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를 매입한 현 오너의 아버지 비센테 세브리안 사가리가(Vicente Cebrian Sagarriga)는 생각했다. 선조들이 남긴 유산인 갈리시아 지역 고유의 알바리뇨 와인을 더 널리 알릴 때가 되었다고. 그렇다고 상업화를 위해 생산량을 대폭 늘리진 않았다.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와 동일한 철학으로, 파소 바란테스 대저택에 붙어 있는 가문 소유의 포도밭에서만 소량의 화이트 와인을 출시하기 시작했고,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파소 바란테스 알바리뇨(Marques de Murrieta Pazo Barrantes Albarino)’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파소 바란테스의 알바리뇨 포도밭

이후 쭉 좋은 평가를 받아온 와인이지만, 2019 빈티지를 기점으로 큰 변화가 생겼다. 목표는 좀 더 천천히 진화하여 장기 숙성이 가능한 알바리뇨 와인을 만드는 것. 10년간의 연구 끝에 포도 생산량을 반 이상 줄이고 와인의 일부는 아카시아 배럴에서도 숙성하는 등 양조 방식에 변화를 줬다. 2019 빈티지부터 병 모양도 엔틱한 부르고뉴 와인병으로 바뀌며 완전히 새로운 와인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양조는 리오하와 마찬가지로 와인메이커 마리아 바르가스(María Vargas)가 담당한다. “리오하에서 갈리시아는 차로 6~7시간 정도 걸리지만, 리오하의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와 같은 철학, 기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동일한 와인메이커가 직접 관리한다.” 알베르토가 부연했다. 이날 디너의 첫 와인으로 서브된 파소 바란테스 알바리뇨 2020 빈티지는 달콤한 핵과류와 시트러스, 아카시아꽃의 아로마와 신선하고 섬세한 풍미가 우아한 산미와 매끄러운 질감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품질을 보였다.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에서 작정하고 만든 품격 있는 알바리뇨라고 할까. 장기 숙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니 훗날이 더욱 기대된다.

2019 빈티지부터 리뉴얼된 파소 바란테스

레드 와인의 영혼을 가진 화이트 와인

디너의 두 번째 와인도 화이트 와인이었다. 스페인 최고의 화이트 와인이라 불리는 카페야니아 레세르바(Caoellania Reserva) 2018 빈티지. 리오하의 이가이 에스테이트에서도 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6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자란 비우라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포도나무의 수령은 약 70년. 콘크리트조에서 발효하고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22개월의 숙성을 거쳤다. 알베르토는 “20년, 40년도 숙성 가능한 와인“이라며 “2년 전에 1996년산 카페야니아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한창 젊은 와인이었다”라고 숙성 잠재력에 대해 강조했다.

이날 디너에서는 훈연한 돼지 방어 요리와 카페야니아 2018이 함께 준비되었다. 와인은 복숭아, 레몬 커스터드, 버터, 견과류가 잘 어우러진 고소한 향에 이어 쌉사름한 풍미와 우아하고 풍만한 미감으로 풀바디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레드 와인의 구조감을 가진 화이트 와인이라. 특히 기름진 돼지 방어와의 만남에서도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포인트를 주는 양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레드 와인이 메인인 리오하에서 이 화이트 와인은 역설적으로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와이너리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오하 지역에서 주로 가볍고 신선한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비우라 품종을 이토록 우아하고 기품 있게 만들 수 있다니. 물론 오크 배럴 숙성 등을 통해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과물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건 포도가 자라난 근본부터 다르단 얘기다. 알바리뇨에 이어 비우라도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를 만나 잠재력을 완전히 펼쳐냈다.

돼지 방어 요리에 페어링된 카페야니아 2018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앰배서더

2종의 뛰어난 화이트 와인에 이어 드디어 레드 와인의 차례. 토마트 베이스의 돌문어 라구 파스타에 맞춰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레세르바(Marques de Murrieta) 2018 빈티지가 서브되었다. 알베르토는 “무리에타 와인은 전반적으로 생산량이 적다. 수출 매니저로서 항상 파트너사들에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나마 레세르바가 생산량이 많은 편”이라며 소개했다. 이 와인이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앰배서더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듯도 한데, 그렇다고 공장식 와이너리의 생산량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국내 수입사인 에노테카코리아의 관계자는 이 대목에서 “앞서 만나본 화이트 와인들이 연간 100병 정도 수입된다면 이 레세르바 와인은 200-300병 정도 수입된다”라고 설명했다. 스페인 내에서도 고급 와인샵과 온-트레이드 위주로 납품된다고. 스페인 와인 생산 법규상 레세르바는 3년의 숙성을 거친 후 출시되어야 하지만 이 와인은 4년의 숙성을 거친다. 사실상 그란 레세르바와 숙성 기간이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셈. 자두, 블루베리의 아로마에 이어 오크, 페퍼, 허브 등 과실미와 스파이시 노트가 입 안에서 적절히 조화된 모습을 보이며, 부드럽고 촘촘한 탄닌, 폭신한 질감으로 맛깔 난 리오하 레드 와인의 매력을 마음껏 뽐낸 와인. 2018 빈티지는 팀 앳킨 97점, 제임스 서클링과 로버트 파커 94점을 받았다.

슈퍼 리오하

다음으로 현 오너의 이름을 건 와인, 달마우 레세르바(Dalmau Reserva)가 나왔다. 앞서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 와이너리와 보르도 와인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19세기 필록세라가 프랑스 포도밭을 덮쳤을 때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묘목을 가지고 내려온 사람들이 리오하에 정착하여 포도를 재배했는데, 현재 유일하게 그 카베르네 포도를 재배하는 곳이 바로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다.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 보르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슈퍼 투스칸’이라고 하지만 오리지널 보르도 포도나무는 아니다. 달마우야 말로 진정한 ‘슈퍼 리오하’라 할 수 있다”라며 강조했다. 와인의 첫 빈티지는 1994년. 비센테 달마우가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와이너리를 도맡게 된 직전이었다. 그는 템프라니요에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의 상징적인 이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를 10% 블렌딩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출시했다. 여기서 카베르네 소비뇽 10%는 ‘리오하’ 이름을 달고 와인을 출시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디너에서 맛본 달마우 와인에선 20대 중반 젊은 오너의 패기가 느껴졌다. 2019 빈티지로 아직 많이 단단한 모습이었지만, 검붉은 베리류 과일과 허브, 스파이스, 오크의 강렬한 향과 직관적으로 풀바디함이 느껴지는 복합적인 팔렛. 달마우 2019 빈티지는 와이너리로부터 이제 갓 출시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에노테카코리아를 통해 단 160병이 소개될 예정이다.

현 오너 비센테 달마우와 달마우 레세르바

리오하 엘레강스의 절정

디너의 피날레는 카스틸로 이가이 2011 빈티지가 장식했다. 1877년 처음 생산된 이래 단 53개 빈티지만 생산된 이 와인에 대해 알베르토는 “지난 10년간 4~5번만 생산되었다. 그랑 크뤼 와인만 보더라도 매년 와인을 만들 수밖에 없는데, 뛰어난 해에만 만드는 정말 특별한 와인이다”라며 강조했다. 게다가 와이너리 셀러에서 10년가량 숙성 후 출시하기 때문에 좋은 컨디션으로 시음 적기의 와인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와인의 큰 강점. 알베르토가 부연했다. “이가이는 10년이 되기 전에 출시한 적이 없다. 이가이는 오직 이가이로 존재한다. 세컨 와인을 만들지 않으며, 상업적인 면을 아예 배제한 와인이다.” 양갈비 스테이크에 곁들여 맛본 이가이 2011 빈티지는 리오하 와인의 우아함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알베르토 역시 “생각에 젖게 되고 무드에 빠져드는 와인”이라고. 체리와 블루베리, 지중해 허브, 드라이 플라워, 바닐라 향이 섬세하게 펼쳐지고 순수하고 우아한 풍미, 벨벳과 같은 질감으로 목을 넘어간 후엔 영원을 빌게 되는 피니쉬. 와인메이커 마리아 바르가스는 “잊을 수 없는 2010 빈티지에 이어, 카스틸로 이가이는 다시 한번 라 플라나(La Plana) 싱글 빈야드의 엄청난 잠재력을 증명했다”라고 2011 빈티지를 평했다. 와인 스펙테이터 탑100 1위에 오른 2010 빈티지나 제임스 서클링 ‘올해의 스페인 와인’으로 선정된 2012 빈티지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빛을 본 모든 이가이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수입사 에노테카코리아
▶홈페이지 enoteca.co.kr
▶인스타그램 enoteca_kr

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에노테카코리아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기사 공개일 : 2023년 12월 19일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