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이 찾던 와인, 잉크 컬렉션 by 그랜트 버지

Written by강 은영

호주 바로사의 명문 와인 생산자 그랜트 버지는 2016년 잉크 컬렉션이라는 새로운 미션에 착수했다. 색은 잉크처럼 짙고 벨벳 같은 질감의 풀바디 레드 와인을 겨냥한, 그랜트 버지의 그간 스타일과는 좀 다른 접근이었다. 그랜트 버지의 수석 와인메이커 크레이그 스탠스보로우(Craig Stansborough)는 잉크 컬렉션을 두고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성공을 거둘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사 토박이에 그랜트 버지 근속 32년 차, 바로사 구석구석을 세세히 알며 올드바인에 대해 아낌없이 얘기해주곤 하는 와인메이커다. 이날은 잉크 컬렉션에 대해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5월 19일 일요일 오후의 인터뷰였다.

그랜트 버지의 수석 와인메이커 크레이그 스탠스보로우(Craig Stansborough)

그랜트 버지는 어떻게 잉크 컬렉션을 만들었나

잉크 컬렉션의 첫 빈티지는 2016년이지만, 그랜트 버지는 2015년부터 새로운 와인 스타일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그랜트 버지의 새로운 시도였던 만큼 ‘그 배경에는 어떤 논의가 있었을까?’ 궁금했다. “글로벌 시장의 와인 스타일을 지켜봤을 때, 특히 당시 미국에서는 벨벳 같은 레드 와인 스타일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이 엿보였다. 이런 경향을 보면서 생각했다.” 크레이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깊고 진한 컬러, 약간의 감미가 있는 구조감 좋은 풀바디 레드 와인을 좋아하나 너무 공격적이거나(aggressive) 너무 진지해지는 와인은 그다지 원치 않는, 숙성의 기다림 없이 바로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와인들에 대해 말이다.” 와인메이커로서의 고민도 따랐다. 그동안 그랜트 버지가 추구하며 해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며 “여전히 바로사 쉬라즈는 바로사 쉬라즈답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새로운 스타일과 그랜트 버지의 정체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밸런스를 지키는 건 이 베테랑 와인메이커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잉크 컬렉션이라는 이름 아래 바로사 쉬라즈와 바로사 카베르네 소비뇽이 먼저 세상에 나왔다.

국내 판매 중인 잉크 시리즈 와인들(바로사 잉크 쉬라즈, 바로사 잉크 카베르네 소비뇽, 쿠나와라 잉크 카베르네 소비뇽, 맥라렌 베일 잉크 쉬라즈, 마가렛 리버 잉크 카베르네 소비뇽/좌측부터 순서대로) 

대성공과 확장

결과는 “super success!”, 엄청난 성공이었다. 탱크 하나 분량으로 시범적으로 와인을 만들 때만 해도 이 시리즈가 이토록 성공할지는 몰랐단다. 초기 6만 병에 불과했던 생산량은 이제 240만 병으로 늘었고, 런칭 후 한두 해는 호주 자국 내에서만 유통됐던 것이 영국을 필두로 아시아 시장으로도 점차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맥라렌 베일 쉬라즈, 쿠나와라 카베르네 소비뇽, 마가렛 리버 카베르네 소비뇽 등으로 레인지도 확장됐다. 최근에는 호주를 넘어 캘리포니아 파소 로블스까지 손을 뻗쳤다. 파소 로블스에서는 10여 곳 이상의 로컬 생산자들과 협업해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한다. 왜 파소 로블스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곳이 여러 옵션을 만족하는 지역이었다고 했다. 무덥고 건조한 파소 로블스는 힘 있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산지 중 하나다. 잉크 컬렉션이 추구하는 스타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호주 여느 지역의 카베르네 소비뇽과는 또 다른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단 얘기.

더 깊이, 미드나잇 잉크 시리즈

이들은 그룹 세션을 통해 또 한 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 결과 바로사 밸리 쉬라즈와 카베르네 소비뇽에 포티파이드 와인을 첨가한 미드나잇 잉크 시리즈가 탄생한다. 1865년 바로사 밸리에 뿌리를 내리고 5대째 와인 생산을 이어오고 있는 그랜트 버지는 포티파이드 와인 생산에도 꽤 역사가 깊다(초기 호주 와인 산업은 포티파이드 와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이들의 셀러에는 오래된 포티파이드 와인들이 비축되어 있었던 것. 미드나잇 시리즈에는 그랜트 버지 10년산 올드 토니(Grant Burge 10 Year Old Tawny)가 들어간다. 비율은 12% 정도. 이 올드 토니는 와인에 감미와 바디, 구조감과 복합미를 한층 더했다. 와인에 약간의 포티파이드 와인을 첨가하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어왔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20여 년 전 누군가 이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던 것 같다”고 크레이그는 이야기했다. 미드나잇 잉크 시리즈는 첫 빈티지인 2021년이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고, 2022년 빈티지는 병 숙성 중인 그야말로 신상 아이템인데, 출시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한다.

알코올 절반의 미드 스트렝스 잉크

새로운 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잉크 컬렉션 시리즈의 통상 알코올 볼륨(보통 14.5% 정도)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저도주 와인도 출시했다. 바로사 잉크 미드 스트랭스(Mid strength)로, 알코올이 약 6.5%다. 멤브레인(membrane) 기술을 이용해 젠틀하게 알코올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언제나 와인의 정체성과 밸런스를 강조하는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고. 특히 레드 와인은 타닌도 있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보다 알코올 제거 방식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는 “제로 알코올이나 저도주 와인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진화한다”며 알코올을 낮추되 와인의 고유 캐릭터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한편 잉크 컬렉션은 현재 레드 와인만 생산되지만, 이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화이트 와인으로 확장할 계획도 있다. 컬렉션의 정체성을 살린 볼드한 화이트 와인을 목표로 호주 라임스톤 지역의 샤르도네로 작업 중이라고 한다.

글로벌 신규 론칭한 잉크 시리즈(파소 로블스 잉크 카베르네 소비뇽, 미드나잇 잉크, 미드 스트렝스 잉크/좌측부터 순서대로) 

소비자들이 찾는 와인과 와인메이커의 소명

잉크 컬렉션은 그랜트 버지의 기존 스타일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근래 오랫동안 글로벌 와인 트렌드가 ‘더 가벼운 와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궁금증이 남았다. 트렌드와는 다른 행보에 대한 와인메이커의 생각은 어떠한지. 이 솔직 털털한 와인메이커는 답변은 의미심장했다. “다양한 스타일에 대한 트렌드는 좋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소비자들이 마시는 와인은 아닐 수도 있다.” 특유의 소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는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오직 브랜드의 성공에 의해 나아갈 수 있고, 그랜트 버지는 내가 오래 몸담아 온 성공적인 와인 브랜드다. 세상에는 다양한 와인 스타일에 대한 니즈가 있지만 다시 ‘빅&볼드 스타일’로 돌아가는 트렌드도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면 우리는 만든다. 잉크 컬렉션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데에는 이런 와인 스타일에 대한 니즈가 컸기 때문 아닐까. 실은 많은 소비자들이 부드러운 풀바디 와인을 정말 좋아한다. 꼭 모든 와인이 엄청난 타닌감에 마시려면 20년을 기다려야 하는 와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다.”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와인

그는 잉크 컬렉션을 “특정 포도밭이나 지역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어떤 스타일에 대해 접근하는,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와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 와인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잉크 컬렉션이라는 브랜드와 레이블, 와인 스타일이 모두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사실 모든 와인이 이처럼 명확하게 캐릭터를 이야기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잉크 컬렉션은 이미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속이 투영되지 않는 깊고 짙은 컬러의 ‘잉키(inky)’한 와인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또 잉크의 두터운 질감이 묻어나는 강렬한 레이블은 와인의 묵직한 바디감을 암시하면서도, 어렵지 않는 와인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역시 뼛속 깊이 와인메이커’란 생각에 몰래 웃음 지었던, 그의 마지막 코멘트다. “잉크 컬렉션은 감미가 있고 볼드한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와인은 여전히 그 지역의 캐릭터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바로사와 맥라렌 베일에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쉬라즈를, 마가렛 리버와 쿠나와라, 그리고 파소 로블스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선보이는 것도 그렇다. 여전히 지역성과 품종의 캐릭터를 잘 간직하되 약간은 다른 버전의 와인, 그것이 잉크 컬렉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강은영 사진 아콜레이드 와인 코리아·포토그래퍼 현창익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기사 공개일 : 2024년 05월 27일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