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란 무엇일까? 직업인으로서는 모름지기 한 분야에서 성공 반열에 올라 존경받는 인물일 테다. 불굴의 의지로 와이너리를 일궈낸 크룹 브라더스(Krupp Brothers)의 설립자 잔 크룹(Jan Krupp)처럼. 최근 이 거장은 리더로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와인을 출시했다. 이름하여 ‘더 체어맨(The Chairman)’. 크룹 브라더스를 대표하는 전문가 시리즈(Expert Series)의 최상위 와인이다. ‘나파 밸리의 마지막 개척자’라 불리는 잔 크룹은 더 체어맨 와인 속에 자신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지난 1월 진행된 국내 최초의 와인 다큐 <‘신의 술방울’ x ‘더 체어맨’> 간담회에서 그 자화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직접 크룹 브라더스 와이너리를 다녀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이욱정 PD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맛본 더 체어맨 와인에서는 존경받는 리더의 품격과 나파 밸리를 아우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전해졌다.

크룹 브라더스의 ‘신의 술방울’
와인 다큐 ‘신의 술방울’은 ‘누들로드’, ‘요리인류’, ‘푸드 클로니클’ 등을 통해 전세계 음식 문화를 탐구해 온 이욱정 PD의 새로운 다큐멘터리다. 유럽과 신대륙의 열 군데가 넘는 와이너리를 직접 방문하여 완성한 이 시리즈는 지난 1월 초부터 <웨이브>에서 순차적으로 공개되는 중이다. 크룹 브라더스도 앞으로 공개될 와이너리 중 하나. 전 세계 수많은 와이너리 중 이욱정 PD가 크룹 브라더스를 선택한 배경에는 ‘사람’이 있다. 기획 단계부터 ‘와인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 그는 간담회에서 “와인은 거의 유일하게 과실을 기른 농부가 와인을 만들고 해외로 판매까지 한다. 그래서 와인메이커들이 굉장히 흥미로운 인간이라 생각했다. 농부면서 화학자, 생물학자, 엔지니어, 마케터인 거다”라고 설명했다. 너무 기업화된 대형 와이너리를 지양한 이유도 직접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만드는 인물을 다루고 싶었기 때문. 크룹 브라더스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백발 노장이 된 현재에도 A to Z로 와인 생산에 관여하는 잔 크룹과의 만남은 ‘와인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최적의 소재였으리라. 그와 3일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이욱정 PD는 이번 다큐를 위해 만난 와인 생산자 중 크룹 브라더스를 "가장 기억에 남는 생산자 중 하나"로 꼽았다. 한국 정서에 맞게 표현하자면, ‘나파 밸리의 정주영’ 같았다는 크룹 브라더스의 설립자 잔 크룹은 어떤 인물일까?

나파 밸리의 마지막 개척자
1991년, 내과 의사였던 잔 크룹은 잡지에서 한 나파 밸리 부동산 광고를 발견했다. 크룹 브라더스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스테이지코치 빈야드(Stagecoach Vineyard)가 될 부지였다. 미국 금주령 이후 거의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던 이 땅을 처음 방문한 잔 크룹은 한눈에 제2의 인생을 펼쳐갈 베이스캠프임을 직감했다. 약 100년 된 오래된 포도나무들이 확신을 더해줬을 것. 전공의 시절 와인을 취미로 만들던 담당 교수에게서 양조를 배운 잔 크룹은 의사로 일하며 취미 삼아 15년간 차고에서 와인을 만들어 왔다. 의사는 본캐, 와인메이커는 부캐랄까. 그러나 스테이지코치 땅을 밟은 그는 자신만의 포도밭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와인업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주 오래전 독일 정착민들이 포도나무를 심은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땅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포도밭을 만들기엔 너무 많았던 바위들이었다. 양조를 가르쳤던 교수마저도 만류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잔 크룹은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동지는 인내심과 끈기. 7년에 걸쳐 약 45만 톤 이상의 화산암을 제거한 끝에 그는 마침내 포도밭을 개간하는 데 성공했다. 훗날 그를 ‘나파 밸리의 마지막 개척자’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비포장도로를 엄청 올라가야 스테이지코치 빈야드가 나왔다. 포도밭 개간 시 부순 암석들이 곳곳에 쌓여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라는 이욱정 PD의 코멘트에서도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의 수많은 와이너리 중에는 의외로 소유주가 와인 생산에 세세하게 관여하는 케이스가 드물다. 잔 크룹이 특별한 리더인 또 하나의 이유인데 이욱정 PD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와인메이커가 있지만 잔 크룹은 그냥 소유주가 아니라 양조 과정 전반에 직접 관여하고 케어한다. 의사 출신답게 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돌보듯 포도 재배와 양조를 과학적으로 관리한다.” 실제로 이욱정 PD가 와이너리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잔 크룹은 파이프와 같은 장비까지 일일이 챙기며 와인 생산의 모든 것을 다 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다.

넓은 땅에서 소량 생산되는 컬트 와인
스테이지코치 빈야드가 완성된 이후인 1999년, 잔 크룹은 투자와 자금 운영을 맡을 동생 바트 크룹(Bart Krupp)과 함께 크룹 브라더스를 설립하고 첫 빈티지 와인을 생산했다. 와이너리의 중심지는 당연히 스테이지코치 빈야드. 세인트 헬레나(St. Helena)부터 아틀라스 피크(Atlas Peak)까지 오늘날 나파 밸리에서 연결된 포도밭으론 가장 면적이 넓은 스테이지코치 빈야드에서는 그만큼 많은 양의 포도가 생산된다. 하지만 크룹 브라더스로 출시되는 와인은 소량인데, 대표 와인 중 하나인 더 닥터(The Doctor) 2022 빈티지만 봐도 단 557케이스만 출시되었다. 73만 평의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포도 중 매년 94~95%는 다른 와이너리에 공급하기 때문이다. 오린 스위프트(Orin Swift), 덕혼(Durkhon), 케이머스(Caymus) 등 파트너 와이너리의 목록이 아주 화려하다.

해발 335~533미터의 가파른 언덕과 산 정상 지형이라는 테루아만큼이나 스테이지코치 빈야드에서는 극적이고 강렬한 풍미를 지닌 포도가 생산된다. 재배되는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그르나슈, 가르시아노 등 총 16가지. 잔 크룹은 다양한 토양과 미세 기후를 바탕으로 포도밭을 204개의 개별 구획으로 나누고, 이를 활용하여 독창적인 블렌딩을 통해 최고급 컬트 와인을 만들어냈다. 특히 '전문가 시리즈'에서는 독특한 블렌딩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보르도 품종에 템프라니요 혹은 시라를 더한 와인들이 있다. 크룹 브라더스만의 짜릿한 블렌드 와인이랄까. ‘신의 술방울’ 간담회를 진행한 CSR와인의 김설아 브랜드 매니저는 “메인 품종이 많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매 빈티지마다 블렌딩 비율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해 수확하는 포도 품종 중 최상의 블렌딩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체어맨'에 담긴 잔 크룹의 자화상은
2000년대 들어 크룹 브라더스의 와인이 사람들에게 빠르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와인의 품질만큼이나 레이블의 영향이 컸다. 와인의 네이밍과 레이블 디자인을 포함한 브랜딩 영역에서도 잔 크룹은 큰 역할을 했는데, 각 와인에 특별한 스토리와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그만의 스토리텔링은 ‘전문가 시리즈’ 와인들로 꽃을 피웠다. 예를 들어 '워터 윗치(Water Witch)' 와인을 살펴보자. 스테이지코치 빈야드를 개간할 당시, 관개를 위한 물이 필요했지만 지질학자를 불러도 찾을 수 없었던 지하수를 수맥 전문가인 워터 윗치(Water Witch)의 도움으로 찾아낸 이야기가 이 와인의 배경이 되었다. 그를 기념하여 잔 크룹은 최적의 수맥이 흐르는 스테이지코치 아홉 개 블록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고, 레이블에는 물을 찾는 수맥 전문가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나머지 전문가 시리즈 와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신감 넘치는 금융 전문가를 그려 넣은 '더 뱅커(The Banker)', 삶의 지표가 되어준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담은 '더 프로페서(The Professor)', 조카에게 영감을 받아 진정한 커리어 우먼을 표현한 '디 애드버킷(The Advocate)', 매일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을 둘러보는 일상을 기념하는 '더 휠 맨(The Wheelman)', 의사였던 본인의 자화상을 담은 '더 닥터' 등. 짐작하듯 대부분 잔 크룹이 직접 경험하거나 누군가에게서 받은 영감이 소재가 되었다.

<‘신의 술방울’ x ‘더 체어맨’> 간담회에서는 '더 체어맨 2022'에 더해 '더 닥터 2022', '더 뱅커 2022' 등 전문가 시리즈 와인과 '블랙 바트 나파 시라 스테이지코치(Black Bart Napa Syrah Stagecoach) 2018'을 만나볼 수 있었다. 주인공인 '더 체어맨 2022'는 작년 12월 출시된 전문가 시리즈의 최상위 퀴베다. 잔 크룹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그려낸 와인으로, 존경받는 리더를 강렬하면서도 깊이 있는 풍미로 표현했다.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98%와 프티 베르도 1.3%, 말벡 0.7%. ‘성공한 사람들의 와인’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실제로 맛본 잔 크룹의 자화상은 단순히 성공한 사람이라는 권위보다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연상되는 와인이었다. 젊은 시절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스테이지코치 빈야드를 개간하고 크룹 브라더스를 정상급 와이너리로 만들어 온 잔 크룹이 마침내 여유를 갖고 미소 짓는 와인이랄까.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거장의 연륜과 품격이 더 체어맨 와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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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윤정 사진 제공 CSR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