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 밸리의 가장 명망 있는 와인 생산자 중 하나로 꼽히는 스파츠우드(Spottswoode)를 로버트 파커는 나파의 샤또 마고라 부르곤 했다. 한 와인을 소개할 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스파츠우드의 CEO 베스 노박(Beth Weber Novak)의 이야기는 가족으로 출발해 땅으로 흘렀다. 유독 힘주어 말한 단어는 ‘시간’과 ‘장소’, 그러니까 와인을 만드는 모든 시간과 어느 특정 밭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전형적인 나파 스타일은 아니”라고 강조할 때나 나파 소비뇽 블랑이 저평가되어 있음을 안타까워할 때 조금 목소리가 높아졌을 뿐 그녀는 대체로 소탈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는데, 온건함 속에도 몰입하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스파츠우드 와인에 대한 인상도 이와 같다. 고요한 장악력이 느껴진다면 말이 될까. 보통 좋은 와인들은 모순된 수식어를 끌어당기곤 한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베스 노박을 만난 건 지난 11월 5일(화), 한남동 스미스앤웰렌스키에서였다. 스파츠우드의 40번째 빈티지 와인들도 함께 했다.
가족의 터전과 어머니와 딸
베스의 부모님은 1972년 나파 밸리에 포도밭을 매입했다. 세인트 헬레나 서쪽에 위치한 이 포도밭은 1882년에 식재한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이 딸린 곳이었다. 나파로 이주하기 전 베스의 아버지는 샌디에고에서 의사로 일했다. 이들 부부 사이엔 자녀가 다섯이나 되었으니, 부모님들이 한 번쯤 고민할 법한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좋이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고, 마침 나파 밸리가 눈에 든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파 밸리의 땅값이 그렇게 비싸진 않았다. 나파로 이주한 첫해 여름 노박 패밀리는 오래된 집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포도밭에 새로운 포도를 심었다. 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소비뇽 블랑이었다. 4~5년 밭을 가꾸는 데 힘을 쏟았더니 돈이 나가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는 다시 도시로 나가 의사 생활로 복귀하는데 몇 해 뒤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졸지에 어머니 메리 노박(Mary Novak)은 다섯 아이와 커다란 포도밭을 끌어안은 채 미망인이 되었다. 가드닝을 좋아하고 포도밭과 함께하는 삶을 사랑했던 그녀는 비록 남편은 떠났지만 나파에 남아 삶을 이어갔다. 인근 와인 생산자들에게 포도를 판매하면서. 몬다비(Mondavi), 쉐이퍼(Shafer), 덕혼(Dockhorn) 같은 나파의 명가들이 당시 그들의 거래처였다. 스파츠우드의 포도를 매입하는 와인 생산자들은 “이 좋은 포도로 왜 와인을 직접 만들지 않느냐”고 묻곤 했다. 거래처이자 이웃인 실력파 생산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노박 패밀리는 1982년 자신들의 와인을 만들기로 한다. 베스 노박이 와이너리에 합류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그녀의 나이 스물여섯일 때였고 지금 그녀는 어머니 메리 노박에 이어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와인 비즈니스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자주 보지만 어머니와 딸 조합은 흔치 않은데, 이 두 여성은 모두 나파 밸리를 주름잡는 인물이었다. 어머니 메리 노박이 끈기와 열정으로 맨땅에서 스파츠우드의 명성을 쌓아 올렸다면, 이 위대한 유산을 잘 이어가고 있는 베스 노박은 1998년 가장 어린 나이에 나파 밸리 빈트너스 대표를 맡은 최초의 여성이 되기도 했다.
일찍이 유기농법을
와이너리명 스파츠우드는 노박 패밀리가 매입했던 이 유서 깊은 포도밭의 이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에스메랄다(Esmeralda), 그 이후에는 린든허스트(Lyndenhurst)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밭은 1910년대부터는 스파츠우드라 불렸는데, 밭의 이름을 와이너리명으로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이들의 와인 생산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베스 노박은 스파츠우드와 함께 했던 첫 번째 와인메이커 토니 소터(Tony Soter)을 소개하며 오늘날 스파츠우드 와인의 무드와 톤을 완성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85년에는 자신이 포도밭 관리까지 책임지겠다며 모든 포도밭을 유기농으로 전환하고 싶다고 메리를 설득했다. 당시만 해도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이 관심을 보인 생산자는 드물었지만 메리는 토니의 제안에 기꺼이 찬성했다. 토니와 메리의 생각은 명확했다. 와인은 포도밭의 캐릭터가 고스란히 담겨야 한다는 것. 또 신선한 과일과 우아한 캐릭터를 강조했다. 스파츠우드의 와인을 맛 본 이들이라면 ‘우아함’보다 스파츠우드에 더 어울릴 수식어는 찾기 어렵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나파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아니다
베스 노박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전형적인 나파 스타일의 와인은 아니다. 70~80년대로 돌아가면 그때 나파는 좀 더 밸런스 있는 와인을 만들었다. 그 이후 좀 더 익은 포도로 만든 볼드한 스타일의 와인이 인기를 얻고 그런 와인들이 높은 평점을 받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스코어를 쫓아 와인을 만들었고 그런 와인들이 나파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굳어졌다.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토양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대로 와인에 담기길 원했을 뿐이다.” 실제로 스파츠우드는 과숙된 과일을 정말 싫어한다. 관련 일화가 하나 있다. 2020년은 캘리포니아의 대형 산불로 많은 포도밭들이 피해를 입은 해였는데 스파츠우드 와이너리는 문제없이 와인을 병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워낙 수확 시기를 일찍 잡는지라 산불이 발생했을 때는 이미 모든 포도밭이 수확을 끝낸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파츠우드의 땅에 대한 접근법
그럼 이들의 와인에 대해 좀 더 깊이 이야기해보자. 먼저 대표 와인 '스파츠우드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Spottswoode Estate Cabernet Sauvignon)'부터. 이 와인은 노박 패밀리가 소유하고 있는 나파 밸리 세인트 헬레나 AVA 지역의 포도밭 부지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포도를 이용해 만든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인에 카베르네 프랑과 프티 베르도가 소량 블렌딩된다. 스파츠우드 에스테이트의 포도밭 전체 면적은 약 43~44에이커에 달하는데, 총 27개의 세부 블록으로 면밀하게 구분 지어 있다(소비뇽 블랑 2블록, 카베르네 프랑 4블록, 프티 베르도 1블록을 제외하고 모두 카베르네 소비뇽 블록이다). 이런 포도밭 운영에 대해 스파츠우드에서는 “부르고뉴식 와인메이킹 방식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스파츠우드 40주년 빈티지인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2021년과 2016년 빈티지를 맛볼 수 있었는데, 숙성력 좋은 이 와인에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스파츠우드 고유의 우아함은 잘 전달됐다. 특히 놀라운 것은 타닌. 2021년 이 어린 와인의 경우 타닌이 아주 짱짱함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훑고 지나가 입안을 바싹 마르게 한다기보다는 ‘파워가 있는데 신선하다’ 정도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2016년쯤 가면 타닌은 그녀의 표현대로 ‘가루처럼 고운’, 혹은 ‘살살 녹는 듯’ 해진다. 또 하나 스파츠우드 와인의 특징 중 하나는 알코올이 14도를 넘지 않는다는 것. 앞서 말한 이른 수확의 결과이기도 하며 그에 파생하는 높은 산도나 스파츠우드 특유의 우아한 캐릭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럼 이 와인은 어느 정도 숙성하면 시음 적기에 이를까. 베스 노박는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12년에서 25년 정도라고 언급했다.
린든허스트는 세컨드 와인이 아니다
스파츠우드가 카베르네 소비뇽 메인으로 만드는 와인이 하나 더 있다. '린든허스트 카베르네 소비뇽(Lindenhurst Cabernet Sauvignon)'.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과 차이점이라면, 우선 린든허스트를 만드는 일부 포도는 다른 농가의 포도를 일부 매입해서 쓴다. 혹자들은 린든허스트를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의 세컨드 와인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이에 대해 베스 노박은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린든허스트 카베르네 소비뇽은 세컨드 와인이 아니다. ‘직접 재배한 포도를 이용하는 것보다 매입한 포도를 사용하게 되면 와인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도 종종 받곤 했다는데 그에 대해 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들 앞마당의 작은 포도밭을 넘어서서 훨씬 더 다양한 포도와 새로운 캐릭터를 얻기 위함”이라고, 린든허스트는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과 또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인이지만, 보르도 5개 품종을 모두 쓴다는 것도 차이점이며 좀 더 과실미에 집중하고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좀 더 영할 때 마시기도 좋다.
나파 슈퍼 소비뇽 블랑
와인라이터 카렌 맥닐(Karen MacNeil)은 2010년대 중반 나파 밸리 소비뇽 블랑 와인들의 급진적인 퀄리티 상승을 주목하며, 뛰어난 복합미를 자랑하는 탑 퀄리티의 소비뇽 블랑들을 ‘나파 슈퍼 소비뇽 블랑’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녀의 나파 슈퍼 소비뇽 블랑 리스트에는 스파츠우드의 소비뇽 블랑도 들어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위시한 나파의 레드 와인들은 진작부터 탄탄한 명성을 누리며 세계 최고의 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나파의 화이트 와인들은 그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더욱이 소비뇽 블랑은 이 정도 명성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나파의 소비뇽 블랑에 부는 새로운 트렌드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베스 노박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가족이 나파 밸리에 왔을 당시 이곳 생산자들은 보통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를 재배했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보르도 품종이고 샤르도네는 부르고뉴 품종인데 말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샤르도네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처음부터 소비뇽 블랑을 선택했다. 당시 인근에 살던 지인들이 소비뇽 블랑을 추천하기도 했다. 우리는 에스테이트 카베르네 소비뇽을 처음 출시하고 2년 뒤 소비뇽 블랑으로 와인을 만들었다. 나파에서 우리만큼 오래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비뇽 블랑을 만든 생산자도 드물 것이다. 최근 10여 년 간은 점점 더 많은 나파 밸리의 와인 생산자들이 이곳의 기후에 소비뇽 블랑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깨달은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건 나파의 톱 카베르네 소비뇽이 가뿐하게 100점이나 99점의 점수를 얻는 것에 비해 최고 수준의 나파 소비뇽 블랑이 받는 점수는 고작해야 94점 정도라는 것이다. 소비뇽 블랑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캐릭터를 가진 품종이고, 세심하게 접근하여 와인을 만든다면 정말 뛰어난 와인을 만들 수 있는데 말이다.”
실제 스파츠우드의 소비뇽 블랑 양조법은 흥미롭다. 와인을 양조할 때 거의 모든 용기를 사용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프렌치 오크 배럴, 콘크리트, 스테인리스 스틸, 세라믹, 암포라까지 다 사용하는데 다양한 용기를 이용해 와인이 미묘한 캐릭터와 복합미를 살리기 위함이다. 이날 40번째 빈티지인 2023년 소비뇽 블랑을 시음해 보았는데, 소비뇽 블랑 특유의 푸릇한 캐릭터가 강조되기보다는 신선한 캐릭터가 명징하면서도 좋은 밸런스를 보여주며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와인이었다. 건재한 산도와 레몬, 복숭아, 배 등의 과일 향들이 사이좋게 배어들어 있으면서 끝에서는 미네랄리티가 와인의 맛을 깔끔하게 잡아주었다.
스스로 이야기하는 와인
인터뷰에 이어 업계 대상의 세미나가 이어지는 동안, 와인을 수입하는 국내 수입사 담당자들도 시음회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들도 모두 이 와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이렇게 한 마음일 수 있는 건 와인이 주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스파츠우드 와인은 ‘스스로 이야기하는 와인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땅과 포도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담은 와인을 얻기 위해 인간의 개입은 최소화한다는 의미로 “와인이 스스로 자신을 말하도록 하고자 한다”는 건 와인 생산자들이 즐겨 쓰는 은유지만 이 말이 이처럼 그대로 와닿는 와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수입사 CSR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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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강은영 사진 제공 CS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