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와인의 미래를 보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러브블럭’을 보라!

Written by신 윤정

와이너리명과 레이블만으로 정감을 자아내는 와인을 만났다. 사랑이 듬뿍 묻어난 그 이름은 러브블럭(Loveblock). ‘감사의 마음’과 ‘행복’을 꽃말으로 하는 노란 민들레와 ‘후’ 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민들레 씨앗이 그려진 레이블에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러브블럭의 설립자들이 뉴질랜드 와인 산업에서 ‘혁신'이란 키워드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 중 하나라는 사실과 이 말랑한 감성 사이에 있는 대비는 사뭇 흥미롭다. 설립자 부부의 이름은 에리카(Erica) & 킴 크로포드(Kim Crawford). 와인 애호가들은 벌써 눈치챘으리라. 지금처럼 많은 뉴질랜드 와인 브랜드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부터 오랫동안 대표적인 말보로 소비뇽 블랑으로 수많은 사람이 잔을 기울였을 그 와인, 킴 크로포드(Kim Crawford)를 만든 부부라는 것을. 지난 3월 6일(목), 러브블럭 와이너리의 오너이자 포도 재배자 에리카 크로포드가 방한했다. 동일한 날 이른 오후에 뉴질랜드 대사관저 행사에서 한 번, 인터뷰를 위해 저녁에 또 한 번 만난 에리카 크로포드는 자신의 삶과 러브블럭 와이너리, 더 나아가 뉴질랜드 와인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고백했다.

러브블럭의 오너이자 포도 재배자 에리카 크로포드(Erica Crawford)

사랑의 노동이 모여, 러브블럭

부부가 처음 만난 곳은 뉴질랜드가 아니라 에리카의 고국인 남아공이었다. 뉴질랜드 출신의 젊은 와인메이커였던 킴 크로포드가 남아공에서 양조 경험을 쌓던 중 에리카와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함께 뉴질랜드로 건너와 정착한 지 몇 년이 흐른 후, 1996년 부부는 킴 크로포드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와인 생산에 대한 큰 열망과 비전은 있었지만, 포도밭과 양조 시설을 갖출 만큼의 자본은 없었던 이 젊은 부부는 당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을 도입했다. 계약 재배로 구매해 온 포도를 사용하여 임대한 양조 시설에서 와인을 만들었던 것. 직접 소유한 한 그루의 포도나무나 양조 장비도 없이 와인을 생산하는 것은 당시 뉴질랜드 와인 업계에선 혁신이었다. “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좋지 않게 보는 이웃들도 있었다”라고 에리카는 담담하게 회상했지만, 다행히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킴 크로포드는 빠르게 수익을 내며 성장했는데, 브랜드 구축과 수출 분야에 있어 에리카는 탁월한 감각을 발휘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뉴질랜드가 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로 알려지며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을 때가 기회였다. 우리로 따지자면 K-팝과 K-푸드의 관계성 같은 거라고 할까. 당시 판로를 잘 뚫은 덕분에 킴 크로포드는 일찍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통한 혁신과 사업 감각으로 킴 크로포드는 설립 7년 만에 뉴질랜드 내 수출 10위권에 드는 와이너리로 성장했다.

젊은 시절의 킴 & 에리카 크로포드 부부와 자녀들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방식으로 와이너리를 운영했지만 부부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혁신적이라 평가받던 그 첫 와이너리를 자금 삼아 포도밭과 시설을 갖춘 새로운 와이너리를 설립하기는 것. 꿈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설립 7년 뒤 킴 크로포드를 매각한 것이다. 이후 크로포드 부부는 비경쟁 조항에 따라 10년간 와인을 만들거나 판매할 순 없었지만 포도밭 조성을 위한 땅을 살 순 있었다. 이들이 사랑에 빠진 땅은 말보로의 세부 산지 아와테레 밸리(Awatere Valley). 이미 개발이 많이 진행된 말보로의 다른 지역보다 아와테레 밸리 내 로어 대쉬우드(Lower Dashwood) 지역의 잠재력을 높게 본 부부는 방목지를 포도밭으로 개간하기 시작했다. 아와테레 밸리는 말보로에서도 더 시원한 지역으로 분류되는데, 특히 해안에 가까이 자리한 이들의 포도밭은 시원한 바다와 바람의 영향으로 포도 재배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단점이라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지역이라 포도밭 조성과 관리에 있어 많은 일을 직접 해야만 했다는 거다. 그 힘든 작업을 에리카는 ‘사랑의 노동’으로 정의했다. 1996년 포도밭과 양조 장비 하나 없이 시작했던 와인 사업이 포도밭과 양조 시설을 갖춘 와이너리 설립으로 꿈을 이루게 되었으니, 아무리 힘들다 한들 사랑으로 돌보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으로 만든 포도밭 블록들이 모여 2013년 러브블럭 와이너리가 탄생했다.

말보로 아와테레 밸리에 조성된 러브블럭의 포도밭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에리카 & 킴 크로포드의 새로운 와이너리 러브블럭은 많은 면에서 전신인 킴 크로포드와 달랐다. 직접 소유한 포도밭에서 손수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바탕엔 유기농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깊은 신념이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에리카가 직접 이 부분을 설명했다. “러브블럭은 이전 스타일과는 확실히 다르다. 대량 생산보다는 모든 것을 직접 기르고 직접 만든다. 모든 것에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뉴질랜드는 익히 알려져 있듯 지속 가능성 분야에서 앞서가는 와인 생산국이다. 1995년 세계 와인업계 최초의 지속가능성 인증 프로그램인 ‘지속가능 와인재배 뉴질랜드(Sustainable Winegrowing New Zealand, 이하 SWNZ)’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 SWNZ 인증 포도밭이 전체의 98%이고, SWNZ 인증 시설에서 생산된 와인이 전체의 90% 이상으로,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지속가능성에 진심인 와인 생산국이 뉴질랜드라 할 수 있다. 혁신의 아이콘 러브블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기농을 향해 전진하는 중이다.

러브블럭의 오너 부부, 와인메이커 킴 크로포드(좌) & 포도 재배자 에리카 크로포드(우)

빠른 현금 회수가 되어야 하는 와인 사업에서 유기농 재배는 포도 생산량 측면에서 좋은 방식은 아닐 수도 있다. 포도밭에 화학 약품을 사용하면 포도 수확량을 늘리고 더 많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 그럼에도 크로포드 부부는 무려 8년에 걸쳐 언덕 위 방목장을 생물역학 원칙을 수용하는 포도밭으로 변화시켰다.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선 그만큼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에리카도 이 부분을 언급했다. “유기농 재배를 위해선 많은 제약이 필요하다. 같은 포도나무지만 매년 컨디션이 다르고 수령도 달라지기 때문에 더욱 집중해서 관리해야 한다.” 현재 유기농 인증을 받은 뉴질랜드 포도밭은 전체의 10%. 러브블럭의 포도밭들은 유기농 인증을 받았거나 전환 중에 있는데, 인증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유기농 원칙에 따라 관리된다고 한다.

야생화와 풀을 그대로 남겨둔 러브블럭의 포도밭

녹차잎에서 추출해 낸 혁신

에리카와의 만남에서 그녀가 설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인터뷰에 참석한 기자들이 가장 눈빛을 반짝이며 집중했던 부분은 러브블럭 티 소비뇽 블랑(Loveblock Tee Sauvignon Blanc)에 대한 내용이었다. 러브블럭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와인이기도 하고, 어디에도 없는 양조법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와인이기에. 이 양조 방식을 이해하려면 대부분의 와인에 보존제로 이산화황이 첨가된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러브블럭의 모든 와인 양조는 유기농 기준을 준수하는데 이 기준에 허용되는 이산화황의 양은 100ppm 미만이다. 기준치나 보통의 양조 관행보다 훨씬 적게 사용하긴 하지만, 좀 더 자연스러운 보존제를 탐구하던 크로포드 부부는 녹차잎에서 추출한 타닌 파우더에 집중했다. 본디 남아공의 촉망받는 의학자였던 만큼 화학에 익숙했던 에리카는 여러 천연 성분으로 가능성을 시험해 보았고, 보존제로 가장 적합한 성분을 녹차의 타닌으로 결론 내렸다. 그리하여 탄생한 와인이 러브블럭 티 소비뇽 블랑이다. 양조 과정에서 포도와 와인이 산소에 노출되는 모든 순간에 녹차잎에서 추출한 타닌 파우더를 넣어 산화를 방지하는 것이다. 물론 발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천연 이산화황이 미량 있긴 하지만, 그 외 인위적인 이산화황 첨가는 일절 없다.

러브블럭 티 소비뇽 블랑

녹차잎의 타닌은 와인의 산화를 방지하는 보존제 역할도 하지만, 크로포드 부부는 그 결과물인 와인에서 더 큰 장점을 발견했다. 에리카의 표현에 따르면 “와인의 산도도 부드러워지고 여러 가지 향이 잘 발현된다”라고. 이어서 그녀는 실제로 했던 흥미로운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동일한 포도로 이산화황을 넣지 않은 와인과 넣은 와인, 녹차 타닌을 넣은 와인을 비교해 본 적이 있다. 이산화황을 넣지 않은 와인과 녹차 타닌을 넣은 와인은 지역성이 잘 표현된 비슷한 맛을 냈지만, 이산화황을 넣은 와인은 산도가 튀기도 하고 나머지 두 와인에 비해 이산화황이 좋은 향미 성분을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보존제로 이산화황을 사용할 때는 잘 표현되지 않는 좋은 향과 맛이 녹차 타닌을 사용할 때는 잘 표현된다는 건데, 에리카에게 좀 더 구체적인 테이스팅 감각에 대한 설명을 청했다. “이산화황을 보존제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산도가 한 번에 확 치고 나오는 느낌이 있다. 반면 녹차 타닌을 보존제로 사용하면 산도가 좀 더 부드럽고 우아하게 표현된다. 또한 감귤이나 복숭아, 바질, 샤프론, 레몬, 라임 등의 아로마가 훨씬 복합적인 레이어로 다가온다.”

탭샵바에서 진행된 시음회에서 와인을 소개하는 에리카 크로포드

최근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한편으론 비슷비슷한 캐릭터로 와이너리마다의 개성은 부족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면에서 러브블럭 티 소비뇽 블랑은 보통의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 궤를 달리하는 개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세계 무대에서 소비뇽 블랑으로 하나의 벤치마크가 된 뉴질랜드 와인의 미래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 개성 있는 와인을 생산하는 러브블럭 같은 와이너리에 있는 게 아닐까?

테이스팅한 러브블럭 와인들

러브블럭 피노 그리(Loveblock Pinot Gris) 2021

말보로 아와테레 밸리의 유기농 인증을 받은 포도밭에서 생산된 드라이 피노 그리 와인. 포도밭에서 야생화와의 상호 작용으로 포도가 낮은 브릭스(Brix)에서도 생리학적 숙성에 의해 가지와 껍질에 타닌이 형성되게 하여 알코올이 과도하지 않게 조절했다. 인증받은 효모를 사용하여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대부분의 발효를 했고, 5%는 오래된 재사용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하여 3개월 후 탱크로 옮겨졌다. 메론과 배, 시트러스의 우아한 아로마, 카모마일과 흰 후추의 복합적인 향. 직선적인 산미와 질감이 입안에서 오래 지속된다.

러브블럭 소비뇽 블랑(Loveblock Sauvignon Blanc) 2023

이상적인 개화 조건이 제공된 2023 빈티지의 소비뇽 블랑이다. 따뜻하고 건조한 여름이 이어져 매우 좋은 포도를 말보로의 시원한 아침에 수확했다. 포도는 조금씩 나누어 일괄 양조했는데, 소량은 오래된 프렌치 오크통에서 발효했고 전체의 50%가량은 유산 발효까지 거쳤다. 최고의 배치(Batch)만 선택하여 블렌딩했다. 잘 익은 복숭아, 파파야, 파인애플, 구아바의 신선한 아로마가 돋보이는는 맑은 와인이다. 맛있는 산미와 질감이 층층이 느껴지며 긴 여운을 남긴다.

탭샵바 시음회에 나온 와인들

러브블럭 티 소비뇽 블랑(Loveblock TEE Sauvignon Blanc) 2021

유기농 인증을 받은 말보로 아와테레 밸리 포도밭의 작은 구획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포도밭 관리에 이산화황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포도밭의 재생 성장, 거름 및 뿔을 사용하여 균형 잡힌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고, 생물 다양성 및 건강한 포도 성장을 촉진하여 어떤 종류의 인위적인 화학 성분 없이 포도를 재배했다. 세계 최초로 이산화황 대신 녹차잎에서 추출한 타닌을 자연적인 보존제로 사용하여 만든 와인이다. 100%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했는데, 50%는 잔당이 10g/L에 달했을 때 발효를 멈추고 나머지는 완전히 발효한 후 젖산 발효까지 거쳤다. 만다린, 복숭아, 스위트 바질, 흰 후추의 향이 어우러져 과즙이 풍부하고 우아한 미감을 만들어낸다. 독특한 미네랄리티와 복합적인 레이어를 형성하는 풍미와 질감, 순한 타닌으로 깔끔하고 신선하게 마무리된다.

러브블럭 피노 누아(Loveblock Pinot Noir) 2020

러브블럭은 말보로 외에도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에도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이 피노 누아는 센트럴 오타고의 유기농으로 전환 중인 포도밭에서 생산되었다. 디종 클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피노 누아 클론을 사용하여 와인에 복합적인 이점을 부여했다. 포도는 줄기 제거 후 파쇄하지 않고 바로 탱크에 넣고 5일간 저온 침용 후 온도를 올려 자연 발효를 유도했다. 일부는 오크통에서 숙성했고 8개월 후 안정화를 거치고 병입했다. 잘 익은 블랙 체리와 자두, 버섯, 토스트, 베이킹스파이스가 겹겹이 어우러지며 제비꽃 향이 은은하게 춤추는 와인.

문의 콤마와인
▶홈페이지 Home | Comma Wine
▶인스타그램 @commawine

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콤마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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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5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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