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그림엽서같이 초록초록한 포도밭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다. 과연 그럴까? 와인의 자연친화적 이미지 덕분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지구온난화에 기여해왔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오늘날 수많은 와인 생산지에서 파괴적인 산불은 흔해졌고 초봄의 서리와 폭풍도 포도밭의 재앙이 되고 있는 지 오래다. 이례적인 홍수 때문에 포도밭이 잠기고 흙이 쓸려 내려가며, 40도 이상 치솟는 무더위와 직사광선에 포도알과 포도잎까지 타들어 간다. 더 이상 와인 생산지는 평화롭지 않다. 세계기상기구(WMO)가 발표한 '2023 세계기후현황(State of the Global Climate 2023)'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지구 평균 지표면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45°C(오차범위 ±0.12°C) 높았다. 마지막 출구인 기온상승 억제 목표치 '1.5℃를 넘는 것은 시간문제다.
위기에 빠진 와인 산업을 위한 특공대
청정 자연 속에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독특한 마오리 문화 그리고 바다를 향해 펼쳐진 포도밭 등 ‘뉴질랜드’란 나라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상쾌하고 현대적인 소비뇽 블랑과 딱 들어맞으며 급부상했고 명실상부한 대표 품종의 자리를 꿰차는 데 한몫을 했다. 이렇게 뉴질랜드의 와인 산업이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운데, 턱 밑까지 차오른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일찍부터 감지했다. 1995년 뉴질랜드는 세계 와인업계 최초로 지속가능성 프로그램인 ‘지속가능 와인재배 뉴질랜드(Sustainable Winegrowing New Zealand, 이하 SWNZ)’ 인증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SWNZ는 포도원, 와이너리, 생산 시설 및 브랜드를 포함한 와인 생산의 모든 부분을 세분화하여 인증한다.
SWNZ에 의하면 지속가능성은 “환경과 생태계를 보전하고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의 연속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산업과 지역사회까지 확대한 개념. 이에 뉴질랜드 와인업계는 SWNZ 인증 프로그램을 두 손 들어 환영하며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현재 뉴질랜드 포도밭의 96% 정도가 SWNZ 인증을 받았으며, 뉴질랜드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90% 이상이 SWNZ 인증 시설에서 마지막 공정을 마친 후 출시되고 있다. 이 정도라면 알려진 뉴질랜드의 모든 와이너리가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포도 재배지부터 와인 제조 시설까지, 100% SWNZ 인증을 받은 와인만이 병에 SWNZ 로고를 표시하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 이 마크만 확인하면 (환경에)덜 미안해하며 구매해도 된다는 뜻. SWNZ는 지속가능성을 위해 기후변화, 물, 폐기물, 토양, 작물 보호, 사람을 6대 집중 분야로 지정하고 개선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기후변화 : “2050년까지 탄소 중립”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는 탄소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포도밭에서 사용되는 화학비료와 포도밭 및 양조장에서의 기계작업(기계수확, 온도조절 발효조 등)을 비롯하여 출퇴근을 위한 차량 이동 등 전 과정에서 탄소가 배출된다. 특히 무겁고 단단한 유리병은 탄소집약적으로 만들어지며, 유통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탄소를 배출한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와인 산업의 탄소 배출량 중 60%가 이 유리병에 의해 발생한다고 밝혀졌다.
뉴질랜드는 전체 전력량의 80% 이상을 수력, 지열, 풍력 등 재생에너지에서 얻고 있으며, 와이너리들도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 SWNZ 와이너리와 포도밭은 전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의 양을 투명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측정해서 보고한다. 매년 이 보고서를 모든 회원들이 공유함으로써 타 지역을 벤치마킹하거나 개선 전략을 논의할 수 있다. 뉴질랜드의 와이너리 58%, 포도원 41%가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시행 중이다. 2021년 기준으로 와이너리 55%가 보다 가벼운 유리병을 사용하며 이외에도 직원 교육, 교통 연료 절감, 장비 업그레이드 등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데 노력한다.
SWNZ와 뉴질랜드 유리 패키징 포럼(New Zealand Glass Packaging Forum)의 창립 멤버인 빌라 마리아(Villa Maria)는 와인병의 무게를 16% 가볍게 줄이고 평균 67%의 재활용 유리를 사용하여 에너지와 탄소 배출량이 적다.
물 : “미래세대의 것이기에”
뉴질랜드는 천연 담수 공급원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건조해지는 지역이 늘어나고 토양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물 사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또한 물길을 깨끗하게 유지하여 수자원 보호에도 힘쓰고 있다. 와이너리의 92%가 물을 절약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한다. 물 누출을 감지하거나 실시간 물 사용량의 모니터링 같은 절수 기술, 세척한 물 회수 및 재활용, 폐수 습지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뉴질랜드 최대 유기농 와이너리 중 하나인 배비치(Babich)는 모범적인 예를 보여준다. 지하 관개, 물을 관리하는 스마트 기술, 포도원 전역의 저수지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로 강에서 끌어오는 물을 70%까지 줄이며 국제 올림픽 규격 수영장 200개를 채울 수 있는 5억 리터의 물을 절약했다. 푸나무(Pounamu)는 원하는 위치에 필요한 양의 물만 사용하는, 정교한 관개 시스템을 통해 물 사용의 효율성을 높였다. 간접적이지만 이 시스템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폐기물 : “2050년까지 제로 매립 폐기물”
쓰레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뉴질랜드는 폐기물 처리에 있어 "줄이기, 재사용, 재활용"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SWNZ는 재활용 및 퇴비화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매립 폐기물을 조사하고, 폐기물의 용도 변경과 재활용을 유도하고 있다. 와이너리의 98%가 폐기물 감소 및 회수, 재활용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와이너리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는, 포도를 압착한 후 남은 찌꺼기(껍질과 줄기)를 퇴비로 만드는 등 여러 개선책을 통해 자원 순환과 토양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SWNZ, 유기농, 바이오다이나믹 인증을 받은 펠톤 로드(Felton Road)에선 포도 찌꺼기를 모아 분리해 고형물은 퇴비로 활용하고 액체만 모아 증류해서 알코올 40% 이상 브랜디, 파인(Fine)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보통 1,000리터의 찌꺼기에서 약 100리터의 브랜디를 만든다고 하니, 정말 버릴 것이 없다.
토양 : “지구를 살리는 흙”
와인 산업의 기반이 되는 토양을 보호하고 개선하는 것은 와인의 품질과 특성에 직접 연결될 뿐만 아니라 모두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토양의 건강과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 토양의 생물학적 구조와 영양 상태, pH 수준을 모니터링하고 필요할 땐 적절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뉴질랜드 포도밭의 81%에서 토양 보호를 위해 피복작물을 심는 동시에 제초제 사용을 줄이고, 부족한 영양분 보충 등의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꽃을 포함한 포도밭 주변과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심는 피복작물은 자연적으로 토양침식을 방지하고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한다.
SWNZ의 멤버인 머드 하우스(Mud House)는 피복작물로 메밀을 심고 포도밭에 양들을 방목한다. 뉴질랜드 포도밭에서 양들이 본분을 다해 풀을 뜯고 있는 건 흔하디흔한 모습. 바이오그로 유기농 인증을 보유한 코노(Kono)는 포도원 전반에 토종 식물을 심고 관리하는데, 이 식물들은 포도원에 탄소 흡수력을 제공하고 토양 건강성을 개선해준다.
2022년 바이오그로에서 유기농 인증을 획득한 펄리셔(Palliser)는 펄리셔 베이(Palliser Bay)의 해초를 천연 유기농 비료로 사용한다. 지력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생태계 파괴까지 유발할 수 있는 합성 화학비료 대신 미네랄과 영양분이 풍부한 비료를 사용함으로써 토양의 비옥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작물보호 : “해충과 질병의 해방구”
수천 년 동안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독특한 자연 환경을 가지며, 여러 고유종의 식물, 동물, 곤충들이 서식하는 곳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질병이나 해충은 생태계를 교란하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SWNZ가 집요할 정도로 관리하는 부분이다.
SWNZ에 속한 와이너리들은 화학물질의 남용을 막기 위해 사용한 모든 농약을 일일이 보고해 데이터의 투명성을 유지한다. SWNZ는 각 생산자별 맞춤형 보고서를 보내 개선 방안을 고심하도록 유도한다. 포도원의 99%에서 해충과 질병을 막기 위해 비화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며, 그 중 91%는 겨울에 꼼꼼한 가지치기를 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한다. 앞서 언급한 피복작물 재배는 특정 영역 내 단일작물, 즉 포도나무 재배가 유발하는 특정 곤충(보통 해충)의 개체수 증가라는 문제를 해결하여 살충제 사용을 줄이고, 자연이 가진 내재적 견제와 균형 체계를 복원한다.
실레니(Sileni), 끌로 앙리(Clos Henri) 같은 많은 와이너리는 지역의 자생 나무를 심거나 습지와 자생림 보호 등 주변 지역의 생태계 회복과 유지에 전념하고 있다. 센트럴 오타고의 페레그린(Peregrine)은 뉴질랜드 매, 티케(Tieke) 등 뉴질랜드의 희귀한 토종 새를 보호함으로써 생태계 회복에 노력하고 있다.
사람 : “노동자도 행복한 산업”
포도 재배와 와인을 만드는 일 모두 결국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뉴질랜드 와인 산업의 성공은 노동자들의 헌신과 열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와인산업 종사자들의 지속 가능한 근무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가 따랐다. 오래 일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실제로 뉴질랜드 와인산업 종사자 중 79%가 계속 일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났다. 지속 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직원 교육을 실시하고, 팀워크를 장려하며, 공동 회의를 개최하는 등 긍정적인 기업 문화를 조성할 것을 권장한다.
자연을 협력자로~ 유기농법
오늘날 뉴질랜드 와이너리 중 10%가 유기농 인증를 받은 상태로 끌로 앙리, 펠톤 로드, 아타 랑기(Ata Rangi), 배비치, 펄리셔 등 세계적인 톱 클래스 와이너리들이 포함되어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바이오그로(BioGro)와 어슈어퀄리티(AsureQuality)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유기농 인증기관으로 독립성을 인정받고 있다. 뉴질랜드의 바이오다이나믹 생산자는 데메터 뉴질랜드(Demeter New Zealand)에서 인증을 받는다.
뉴질랜드 말보로(Marlborough)에 위치한 티라키 와인(Tiraki Wines)은 뉴질랜드 와인 브랜드 최초로 비콥(B Corp) 인증을 받았다. 환경, 지배구조, 기업구성원, 지역사회, 고객 5개 영역을 평가하는 비 임팩트 평가(B Impact Assessment)에서 총점 250점 중 80점 이상을 충족한 기업에게만 비콥 인증을 부여한다. 평가 기관인 비랩(B Lap)에 따르면 티라키 와인은 무려 102.5점을 획득했는데, 글로벌 평균 점수, 55점을 훨씬 웃도는 점수였다.
스크류캡의 선두두자
뉴질랜드 와인의 95%가 재활용 가능한 알루미늄 스크류캡을 사용하고 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등에서 수입해야 하는 코르크에 비해 스크류캡은 제조와 운송할 때, 탄소 배출이 월등히 적다. 또한 코르크는 3~10%나 되는 코르크 오염(cork taint)의 가능성 때문에 와인이 상할 위험도 존재한다. 반면에 스크류캡의 안쪽은 식품 등급의 비활성 폴리머 성분으로 코팅되어 있어 와인 맛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뉴질랜드 와인 산업이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스크류캡은 환경 보호와 자원 효율성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포도밭에 떨어진 기후 위기를 앞에 두고 시작된 본 프로그램을 통해 뉴질랜드 와인산업은, 주한 뉴질랜드 대사, 던 베넷(Dawn Bennet)이 와인인(WINEIN.)과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지속 가능성이 우리만의 트렌드가 아니라 와인 생산의 미래를 형성하는 핵심 가치라는 것을 보여”준 모범적인 예가 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요즘 소비자들은 와인 하나를 구매하더라도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꼼꼼하게 찾아본다. 나의 소비 활동에서 내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제 환경보호, 공정무역, 지속 가능성과 같은 이슈들은 새로운 소비의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뉴질랜드 와인이 주목받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와인생산방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의 환경을 다룬 고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앞으로 뉴질랜드 와인을 선택할 때 레이블에서 SWNZ 로고를 확인할 것을 권해본다.
글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뉴질랜드 무역산업진흥청, New Zealand Winegro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