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멜초에서 DM/01로, 새로운 계보의 시작

Written by박 지현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눈에는 오히려 모든 것이 또렷했다. 안데스산맥의 그림자가 드리운 푸엔테 알토(Puente Alto)의 척박한 땅에서 그는 아무도 보지 못한 잠재력을 읽어냈다. “여기다.” 그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최고의 포도나무여만 해. 보르도로 가야 한다.”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머릿속에는 이 황량한 땅에 포도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그려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풍경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바로 멜초 데 콘차 이 토로의 뜨거운 꿈이 뿌리내린 순간이었다.

지난 9월 1일, 칠레 프리미엄 와인의 상징 돈 멜초(Don Melchor)의 35번째 빈티지와 함께 신규 프로젝트 와인인 DM/01 2022가 화려하게 선보였다. 이 특별한 자리에는 돈 멜초의 CEO이자 와인메이커, 엔리케 티라도(Enrique Tirado, 아래 사진)가 참석하여 행사의 무게를 더했다.

안데스에서 피어난 그랑 크뤼의 꿈

1883년, 멜초 데 콘차 이 토로(Melchor de Concha y Toro)는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묘목을 들여와 푸엔테 알토의 거친 땅에 심었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필록세라의 그림자를 피해 어렵게 손에 넣은 최상급 묘목이었다. 고급 와인의 인식이 희미했던 칠레 와인업계에서 이는 시대를 앞선 도전이자 실험이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1987년 첫 빈티지로 태어난 돈 멜초(Don Melchor)는 칠레 와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으로 세계 수준의 와인이 칠레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후 알마비바(Almaviva), 세냐(Seña) 등 칠레의 아이콘 와인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오랫동안 돈 멜초는 콘차 이 토로의 대표 와인이었으나, 2019년 독립 브랜드 ‘비냐 돈 멜초(Viña Don Melchor)'로 새 출발했다. 1997년부터 돈 멜초의 수석 와인메이커로 활약해 온 엔리케 티라도가 현재 비냐 돈 멜초를 이끌고 있다. 첫 빈티지 이후 돈 멜초의 행보는 눈부셨다. 특히 2018 빈티지는 제임스 서클링 100점을 받았고 2021 빈티지의 경우, 와인 스펙테이터의 ‘올해의 100대 와인(2024년)’에서 1위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칠레 카베르네 소비뇽의 요람, 푸엔테 알토

푸엔테 알토는 칠레 마이포 밸리에서도 안데스산맥 기슭, 해발 650m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이곳은 극심한 일교차 덕분에 포도가 천천히 익고, 그 과정에서 풍미가 한층 농축된다. 카베르네 소비뇽 특유의 강렬한 색과 풍미, 신선한 산미가 그대로 살아난다.

안데스에서 흘러내린 빙하와 강물이 만든 자갈 토양은 점토와 섞여 독특한 구조를 이룬다. 자갈은 배수를 원활하게 해주고, 점토는 건조한 여름에도 수분을 저장, 포도나무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한다. 여기에 산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포도밭의 온도를 낮추어, 와인에 우아함과 균형을 더한다.

“돈 멜초의 포도밭은 총 127헥타르로, 7개 구획(parcel)으로 나뉘고 다시 151개의 마이크로 플롯(micro-plots)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같은 포도밭이라도 토양, 경사도, 일조량, 포도나무 수령이 미묘하게 달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엔리케 티라도가 설명했다. 이어 “돈 멜초는 칠레 카베르네 소비뇽을 대표하는 와인으로, 7개 구획에서 나온 와인을 블렌딩한다. 빈티지에 따라 프티 베르도,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을 블렌딩해서 완성도를 높인다”고 덧붙였다. 그 결과 돈 멜초는 매년 최상의 품질을 이어가며, 세계적인 명품 와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현재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38년, 가장 오래된 나무는 45년에 이른다.

본격적인 돈 멜초 2022 테이스팅에 앞서, 7개 구획에서 생산된 와인들을 하나씩 시음하며 각 테루아의 특징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돈 멜초 팀은 매년 7개 구획의 151개 마이크로 플롯에서 나온 샘플을 시음한 뒤, 어떤 구획을 중심으로 할지, 비율은 또 얼마나, 어떤 순서로 블렌딩할지를 결정한다(샴페인의 블렌딩 방식과 유사하다). 참석자들은 엔리케 티라도의 안내에 따라 돈 멜초 2022가 완성되는 여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며, 각 테루아가 어떻게 최종 와인에 녹아드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우아한 귀부인의 미소처럼 돈 멜초 2022

카베르네 소비뇽 95%, 프티 베르도 3%, 메를로 1%, 카베르네 프랑 1%

2021년에 이어 2022년 역시 서늘하고 건조한 해였다. 포도가 천천히 익으며 산도가 잘 유지된 덕에, 돈 멜초 2022는 단단한 타닌과 뛰어난 산도가 균형을 이루는 장기숙성형 와인으로 완성되었다.

첫 향은 놀라울 만큼 신선하다.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일과 블랙베리와 블랙 커런트의 향이 층층이 쌓여있다. 바닐라와 삼나무가 어우러진다. 입안에서는 벨벳 같은 질감이 펼쳐지고, 타닌은 단정하다 싶을 정도로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다. 구조감은 견고하고 마지막 한 모금까지 우아함이 이어진다. 제임스 서클링 99점, 와인 스펙테이터 95점, 와인 애드버킷 95+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는 평가다. 숙성 잠재력을 35~40년으로 예상되는데, OMG!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35년의 기다림 끝에 탄생한 DM/01

이날 행사에선 비냐 돈 멜초의 첫 번째 신규 프로젝트, ‘더 파셀스(The Parcels) 시리즈’가 처음 공개되었다. 칠레 외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선보인 곳은 한국이며, 이후 중국과 두바이, 내년에는 영국과 미국 출시가 예정되어 있다. 한국이 돈 멜초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장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더 파셀스(The Parcels) 시리즈는 매년 돈 멜초 빈야드 7개 구획 중 단 한 곳을 골라, 그 테루아의 개성을 극대화한 와인이다. 싱글 빈야드 와인과 닮았지만, 더 작고 세밀한 구획을 기준으로 삼아 ‘돈 멜초가 가진 순수한 테루아’를 보여주려는 시도다. 그 첫 결과물이자 오늘의 주인공이 바로 DM/01 2022. 돈 멜초가 35년 만에 꺼내든 새로운 패가 어떤 것인지, 애호가라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돈 멜초 빈야드의 가장 유서 깊은 구획, 파셀 #1(Parcel #1)

더 파셀스 시리즈의 첫 와인, DM/01 2022는 이름 그대로 ‘Parcel #1’에서 탄생했다. 1979년에 식재된, 빈야드에서 가장 오래된 구획이자, 필록세라 이전 포도나무가 살아 있는 곳. 비냐 돈 멜초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이어주는 상징이다.

1구획 와인은 붉은 과일의 아로마가 강렬하고 꽃 향기가 더해져 생동감이 넘친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타닌과 긴 여운이 특징이며, 돈 멜초의 최종 블렌딩에서도 과일 풍미와 섬세함을 채우는 역할을 해왔다. DM/01은 역사성과 함께 우아함과 강렬함 모두 합격점을 받으며 역사적인 시리즈의 첫 번째 와인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 DM/01 2022

카베르네 소비뇽 88%와 카베르네 프랑 12%

프랑스 오크 배럴에서 15개월간 숙성했다. 엔리케 티라도의 표현처럼, 와인은 “붉은 과일의 강렬한 아로마와 꽃 향, 신선하고 활기찬 개성”을 지녔다. 실제로 라즈베리, 붉은 체리, 블랙베리 향이 풍부하고 탄탄한 구조감 속에서도 부드러운 질감과 매끄러운 목넘김을 보여준다. 서늘했던 빈티지의 영향으로 과일의 신선함이 살아있어 레드 와인임에도 마실수록 부담스럽지 않다. 얼마나 공들였는지 단번에 전해진다. 공식 출시 전부터 제임스 서클링 98점, 비노우스(Vionous) 95점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이번 DM/01 2022의 생산량은 단 6천 병. 그중 6백 병만이 한국에 들어왔다. 더 파셀 시리즈는 빈티지마다 선택되는 구획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년 같은 구획의 와인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1번 구획의 와인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생산량도 제한적이라 전 세계에 균등하게 공급하기 어렵다. 영국과 미국에는 출시되더라도, 한국 시장에는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DM/01은 희소성과 프리미엄의 공식을 충족하며 확실한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최고’를 지향했던 설립자 돈 멜초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 정신은 DM/01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프리미엄 와인 시장에서 DM/01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주목할 만하다.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비냐 콘차이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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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5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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