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와 인류가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는 21세기, 많은 산업과 마찬가지로 와인업계도 푸른 별 지구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쏟는 중이다. 그 핵심 중의 핵심은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 줄이기에 있다. 놀랍게도 와인 산업에 있어 탄소 배출이 가장 큰 영역은 포도 재배도 와인 양조도 아닌 포장과 운송이다. 2020년 국제와인기구(OIV)의 연구에서도 와인 산업 전체 탄소 배출에서 포장과 운송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74%, 포도 재배와 양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3%에 불과했다. 와인 산업에서 포장과 운송이 탄소 발자국의 주범인 이유는 와인을 담는 유리병과 관련이 깊은데, 유리병은 고온에서 용해하여 만들어지므로 시작부터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데다가, 무겁기 때문에 와인을 운송할 때에도 탄소 배출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일찌감치 파악한 지구촌 곳곳의 와이너리들은 무거운 유리병을 대신할 대체제를 찾아 나섰다. 같은 용량의 와인을 좀 더 가볍게 담을 수 있고, 와인을 소비하는 우리의 마음도 좀 더 가벼울 수 있도록!

플랫 와인 보틀: 납작 복숭아도 아니고 납작한 와인병이라고?
2016년 설립된 영국의 포장재 업체 가르송 와인(Garçon Wines)은 세계 최초로 납작한 와인병을 개발했다. 이름하여 ‘에코-플랫 보틀(Eco-Flat Bottle)’. 영국 가정의 우편함에 쏙 들어가는 형태로 고안되어 와인 배달 시 분실을 막고자 했다. 우편함에 툭 떨어뜨려야 하므로 파손의 우려가 적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소재는 100% 재활용 페트, 와인을 다 마신 빈 병 역시 100% 재활용할 수 있다. 63g에 불과한 이 납작한 와인병은 유리로 만든 일반적인 와인병보다 무려 87%나 가볍다. 적재 시 공간이 많이 발생하는 원통형 와인병에 비해 동일한 공간에 더 많은 병을 수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점이다.
에너지, 재활용, 공간, 무게 측면에서의 친환경적인 장점이 알려지며 에코-플랫 보틀에 와인을 출시하는 와이너리도 하나둘 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글로벌 와인 그룹 아콜레이드 와인(Accolade Wines)이 있다. 지난 2020년 영국 시장에서 아콜레이드 와인의 친환경 와인 브랜드인 밴락 스테이션(Banrock Station)과 하디스(Hardys)의 일부 제품을 에코-플랫 보틀로 출시했던 것. 당시 아콜레이드 와인은 "동일한 750ml의 와인을 담으면서도 일반 유리병에 비해 40% 작은 공간을 차지한다. 한 팔레트에 2.3배 많은 와인이 들어가 포장 효율성에 기여하여 CO2 배출량을 더욱 줄인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외에도 모엣 헤네시(Moët Hennessy)의 샤토 갈루페(Chateau Galoupet), 미구엘 토레스 칠레(Miguel Torres Chile)의 일부 스웨덴 제품이 가르송 와인과의 협업으로 납작한 와인병에 와인을 출시했고, 최근에는 영국 슈퍼마켓 알디(Aldi)의 자체 브랜드 와인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아직 적용된 와인은 없지만 아콜레이드 와인 코리아에서는 "추후 채널과 협의가 된다면 환경 관련 캠페인에 사용하거나 PR 홍보용으로 소개하고 싶은 의향은 있다"라고 전해왔다.
알루미늄 캔 & 보틀: 음료수만 담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작년 9월 ‘데블스도어 재즈 페스타(Devil’s Door Jazz Festa) 2024’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의 달(California Wine Month)을 맞아 열린 시음회에는 보글 패밀리 빈야드(Bogle Family Vineyards)의 신제품 엘레멘탈(ElementAL)이 나왔다. 와인을 따르기 위해 병을 집어 든 참가자들은 순간 움찔하고 놀라곤 했는데, 무게가 와인을 다 비운 유리병보다도 가벼웠기 때문이다. 보글 패밀리의 야심작인 엘레멘탈 와인병의 소재는 알루미늄. 수입사 동원와인플러스에 의하면 “무게가 기존 와인병에 비해 80%나 가벼운 90g밖에 안 되는 와인병”이라 한다. 알루미늄은 100% 재활용이 가능한 데다 재활용 시 필요한 에너지가 유리병 대비 5% 미만이고, 무게도 훨씬 가벼워 운송 중 탄소 배출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알루미늄 용기에 와인을 최초로 담은 건 200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와이너리(Francis Ford Coppola Winery)였다. 설립자이자 유명 영화감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딸을 모델로 만든 와인을 알루미늄 캔에 담아 출시한 것이다. 당시엔 와인병 중심의 고정관념을 깬 트렌디한 패션 아이템에 가까웠지만, 2010년에 접어들며 캔와인은 지속가능성이란 키워드와 맞물려 점차 탄소 발자국을 줄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내에도 몇몇 캔와인이 수입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캘리포니아산 웨스트와일더(West+Wilder) 와인이 있다. 와인 수입사 보틀샤크에 따르면 “친환경과 휴대성, 프리미엄 품질까지 모두 잡은 제품이자, 캔 하나 판매 시 1센트가 기부되는 착한 와인”이라고.

Bag-in-Box: 벌크와인이라는 고정관념은 이제 그만
흔히 박스 와인이라 불리는 BiB(Bag-in-Box, 이하 BiB)는 1965년 호주의 와인 생산자 토마스 앙고브(Thomas Angove)가 특허를 낸 와인 용기다. 와인을 실제로 담는 플라스틱 필름과 와인이 나오는 꼭지, 이를 감싼 종이 박스로 구성된다. 생산 에너지는 낮고 현실적인 재활용 가능성은 높으며, 가벼울 뿐만 아니라 사각형이라 운송 시 공간 효율이 커서 탄소발자국을 훨씬 덜 남기는 이점이 있다. 와인을 따라내도 남은 와인이 산소에 거의 노출되지 않아 개봉 후 보존력도 좋은 편이다. 유리병에 비해 포장 비용이 절감되는 점도 매력적. 오랫동안 저렴한 벌크와인에 주로 사용되며 ‘박스 와인=싸구려 와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유리병 대비 탄소 배출량이 80% 적은 등 친환경적인 측면이 강조되며 최근 와인업계엔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BiB 와인 컴퍼니 ‘Really Good Boxed Wine’은 합리적인 가격의 프리미엄 나파 & 소노마 와인을 생산하며 고급 와인도 BiB로 가능하다는 인식을 전파하고 있다. 2018년 영국 런던에 설립된 ‘Bib Wine Company’도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소규모 와이너리와 협력하여,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소량 생산된 프리미엄 와인을 구독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다. ‘유리병에 담긴 와인만 고급 와인’이라는 고정관념은 곧 옛이야기가 될 듯하다.

종이 와인병: BiB의 새로운 해석
BiB가 주로 2리터 이상 대용량 사이즈로 만들어진다면 최근 일반적인 와인병과 동일한 750ml 사이즈의 종이 와인병(Paper Wine Bottle)도 개발됐다. 이 시장의 개척자이자 선점자는 영국의 종이병 스타트업인 프루갈팩(Fragalpac). 이들이 개발한 프루갈 보틀(Frugal Bottle)은 외피는 재생지, 내피는 식품 등급의 얇은 플라스틱 라이너로 구성된다. 100% 재활용이 가능한 프루갈 보틀은 유리병에 비해 무게는 1/5 수준이고 탄소 발자국은 84%까지 절감되는 효과가 있다. 이 획기적인 와인병이 최초로 상용화된 와인은 2020년 이탈리아 칸티나 고치아(Cantina Goccia)의 3Q(Three Quarters)였다. 이어서 아콜레이드 와인도 프루갈 보틀에 담은 밴락 스테이션 와인을 영국 슈퍼마켓에서 시범적으로 출시했었고, 좀 더 최근인 2023년에는 캘리포니아의 보니 둔 빈야드(Bonny Doon Vineyard)가 종이 와인병 제품을 출시하여 화제를 모았다. 아직은 한 업체가 선도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종이 와인병은 유리병 대체제로서 지속 가능한 와인 포장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테트라 팩: 두유를 담는 그 팩에도 와인이
안쪽 면이 은색인 종이 팩을 본 적이 있을 거다. 주로 두유나 주스를 담는 데 사용되는 테트라 팩(Tetra Pak)으로, 산소와 빛을 차단하는 알루미늄, 방수와 식품 보호 기능이 있는 폴리에틸렌이 종이와 합쳐진 다층 포장재다. 테트라 팩의 최대 장점은 초경량이라는 것. 운송 효율과 제조 에너지 측면에서 강력한 친환경 포장재여서 전체 탄소 배출이 유리병 대비 무려 90%나 적다. 전용 재활용 시설이 필요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재활용도 가능하다. 테트라 팩으로 출시되는 와인의 대표주자로는 부아쎄(Boisset) 와인 그룹이 프랑스 랑그독 지역에서 만드는 ‘프렌치 래빗(French Rabbit)’, 미국 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테트라 팩 와인인 반딧 와인(Bandit Wines)이 있다. 아직 조금 덜 보편적이긴 하지만 테트라 팩은 지속가능성을 앞세우는 와이너리들 사이에서 점점 더 주목받는 중이다.
경량 유리병: 같은 유리로 가볍게만 만들어도
여러 대체제가 소개되고 있긴 하지만 와인의 장기 숙성까지 고려한다면 유리병이 가장 믿음직스럽다는 것은 아직 어쩔 수 없다. 이에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 중 하나로 주목받는 것이 경량 유리병(Lightweight Glass Bottles)이다. 병 무게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생산 및 운송 과정의 탄소 배출을 크게 절감할 수 있기 때문. 표준 와인병의 무게는 500~600g, 프리미엄 와인병의 경우 900g에 달하는 데 비해 경량병은 400g 정도로, 많은 와이너리가 경량병을 도입하는 추세다. 몇 군데를 살펴보자면 우선 스페인의 파밀리아 토레스(Familia Torres, 이하 토레스)가 있다. 와인업계 지속가능성 분야의 글로벌 리더인 토레스는 2008년부터 와인병의 무게를 줄여, 현재 95% 이상의 와인이 420g 이하 경량병으로 출시된다. 미국의 잭슨 패밀리 와인(Jackson Family Wines)도 이러한 활동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와이너리다. 지난 2021년 향후 10년간의 기후 행동 계획인 ‘Rooted for Good’ 로드맵을 발표한 잭슨 패밀리 와인은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50% 감축을 목표로, 현재 전체 와인의 절반 이상을 경량 유리병으로 출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100% 재활용 가능한 포장재로의 전환을 추진하며 일부 와인에 420~460g의 경량병 사용을 채택한 호주의 펜폴즈(Penfolds), 재활용 유리의 비율이 평균 67%이고 무게를 16% 줄인 경량병을 사용하여 탄소 배출량을 39% 감소시킨 뉴질랜드의 빌라 마리아(Villa Maria) 등 많은 와이너리가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움직임에 함께하는 중이다.

매년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우리나라는 2009년부터 지구의 날이 있는 주간을 기후변화주간으로 지정하고 여러 활동을 전개해왔다. 아직 유리병에 담긴 와인이 절대 다수인 국내 시장이지만, 지구변화주간을 맞아 다양한 미래형 와인 포장재를 소개해 보았다. 여린 초록빛이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이 계절은 다음 세대에도 그다음 세대에도 계속되어야 하니까.
글 신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