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와인, 토레스의 기후 대응 스토리

Written by박 지현

“더 이상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 비상사태를 논의해야 한다.”

스페인 카탈루냐의 거장, 파밀리아 토레스(Familia Torres, 이하 토레스)의 회장 미구엘 아구스틴 토레스 리에라(Miguel Agustín. Torres Riera, 이하 미구엘 A. 토레스)는 기후 위기를 꾸준히 강조해왔다. 기후 위기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한낮의 기온이 34 ℃ 를 가볍게 넘었다. 서울의 열대야가 118년 만에 최장 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보면, 우리는 이미 기후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21세기 와인 산업도 위기에 빠진 지 오래다. 과거 와인 생산자들의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해야 포도가 잘 익을까’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포도의 이른 숙성과 과숙을 걱정하며 대책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다.

토레스의 회장 미구엘 A. 토레스(Miguel A. Torres)

창사 3주년을 맞아 와인인(WINEIN.)은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지속가능성을 추구해 온 토레스의 이야기에서 기후 위기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과연 상자 속에 남은 건 디스토피아의 공포일까? 아니면 희망의 빛일까?

다섯 세대를 걸친 위대한 유산

토레스 가문이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한 건 16세기부터였으나, 1870년 하이메와 미구엘 토레스 벤드럴(Jaime and Miguel Torres Vendrell) 형제가 바르셀로나 근처에 와이너리를 설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8년 2세대 후안 토레스 카살스(Juan Torres Casals)가 경영을 맡아 토레스 브랜디 생산에 도전하며 증류주 전통을 확립했다. 1907년에 가문의 역사적인 브랜드 중 하나, '코로나스(Coronas)' 브랜드를 등록했다. 3세대 미구엘 토레스 카르보(Miguel Torres Carbó)는 토레스 역사상 가장 어려운 순간을 맞닥뜨렸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의 막바지에 와이너리가 파괴된 것.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신속하게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가문의 와인을 병입하고 수출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4세대 미구엘 A. 토레스는 프랑스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학을 공부한 후, 1962년에 가족 사업에 합류했다. 페네데스 지역에 프랑스 품종을 심는 등 거침없고 대담한 행보로 그는 토레스 가문에 '혁신'의 DNA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토레스를 상징하는 와인, 마스 라 플라나(Mas La Plana)도 이 시기에 심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첫 빈티지(1970)는 1979년 권위 있는 미식지 <고미요(Gault & Millau)>가 주최한 파리 와인 올림피아드에서 샤토 라투르 같은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수상해 정상급 와인의 자리에 올랐다. 2004년, 미구엘 A. 토레스는 ‘Decanter Man of the Year’로 선정되면서 스페인 와인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일조했다. 또한, 그는 일찍부터 기후 위기에 대응하여 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두 주자로 활약해왔다.

토레스를 이끄는 4세대, 미구엘 A. 토레스(우)와 미구엘과 미레이아 남매(좌)

미구엘 A. 토레스의 두 자녀, 미구엘 토레스 마자섹(Miguel Torres Maczassek)과 미레이아 토레스 마자섹(Mireia Torres Maczassek)은 현재 150년이 넘는 와이너리를 이끄는 5세대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가족 소유 와이너리로 성장한 토레스는 카탈루냐의 페네데스뿐만 아니라 프리오랏, 리오하, 리베라 델 두에로, 루에다, 리아스 바이사스 그리고 칠레와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유통 중인 토레스 와인은 마스 라 플라나, 셀레스테(Celeste), 퍼가토리(Purgatori), 살모스(Salmos), 그랑 코로나스(Gran Coronas) 등으로 수입사 신동와인이 30년 넘게 국내에 독접 수입하고 있다.

보다 확실한 행동 플랜 ‘토레스 & 지구(Torres & Earth)’

카탈루냐에 위치한 토레스의 자가 소유 포도밭은 이미 유기농 인증을 받았거나 인증 절차를 진행 중이다. 2007년 기후 변화의 명백한 증거를 확인한 미구엘 A. 토레스는 ‘토레스 & 지구’라는 포괄적인 (자체) 환경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이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토레스 & 지구' 플랜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가족 이사회와 재무 관리자들에게 수익이나 투자의 회수 여부를 따지지 말라고 했다. 지금, 15년이 지나고 2,100만 유로 이상을 투자한 후 돌아보니, 그때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2040년 넷제로(Net-Zero)를 향해

넷제로는 온실가스의 배출량과 흡수량을 같게 해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상태를 의미한다. 토레스의 목표는 2030년까지 병당 CO2 배출량을 60% 줄여 2040년까지 순배출량 0의 넷제로 와이너리가 되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23년까지 병당 CO2 배출량을 37%나 줄였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포도밭과 와이너리에서 토레스의 구체적인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재생에너지와 가벼운 병의 효과
페네데스 와이너리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의 39%를 태양광, 지열, 바이오매스를 이용한 재생에너지에서 얻고 있다. 하얀 모래로 지붕을 덮는 등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용하고 있다. 병이 무거울수록 운송할 때 탄소 배출량도 증가한다. 2008년부터 토레스는 공급업체와 협력하여 와인병의 무게를 줄여 현재 95% 이상의 병이 420g 이하로 가벼워졌다.

거대한 공기청정기, 나무와 숲
토레스는 와이너리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상쇄하기 위해 1,850헥타르의 산림을 관리하고 있다. 또한 칠레(파타고니아)에서 6,000헥타르에 이르는 토지에 자생 나무를 심고 있다. 탄소를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숲은 습지나 해양에 비해 비교적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흡수원인 동시에 생태계의 회복에 기여한다.

풍선처럼 빵빵한 CO2 포집 설비

탄소를 집어 삼키는 하마, 탄소 포집
2021년에 토레스는 와인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CO2를 포집하고 재사용하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포집된 CO2는 탱크 안의 와인을 산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사용된다. 2023년에 시스템을 확장했는데, 그 규모는 매년 약 30톤의 CO2를 포집하고 재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는 CCR 시스템을 '국제 기후 행동 와이너리(IWCA)' 내에서 공유하여, 전 세계 다른 와이너리도 이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머지않아 포집된 CO2를 활용한 유리병 생산을 계획 중이다.” 이렇게 토레스의 도전은 계속된다.

재생 농법으로 관리되는 마스 라 플라나 포도밭

패러다임의 전환, 재생 포도 재배(Regenerative Viticulture)
5세대가 이끌게 되면서 토레스는 유기농 포도밭을 재생 농법의 모델로 전환하는 데 힘쓰고 있다. “토양도 유한자원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재생 농업은 토양의 생명력 회복에 집중한다. 토양이 건강해지면 대기 중 CO2를 더 많이 땅속에 포집하여 침식에 강하고 저수성도 좋아져 지독한 가뭄에도 끄떡 없어진다. 또한, 모습을 감췄던 동식물들이 돌아오는 등 생물다양성을 복원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2021년부터 토레스는 마스 라 플라나 등 주요 포도밭(위 사진)에서 이 농법을 적용했고 다른 포도밭으로 넓히고 있다.

재생 포도 재배 연합에서 인증 받은 토레스 와인들

최근 토레스가 생산하는 ‘클로 안세스트랄 화이트(Clos Ancestral White) 2023’과 ‘포르카다(Forcada) 2023’ 그리고 ‘장 레옹 비냐 기기 샤르도네(Jean Leon Vinya Gigi Chardonnay) 2023’ 총 세 가지 와인이 재생 포도 재배 연합(Regenerative Viticulture Alliance, RVA)에서 인증을 받았다. 재생 포도 재배를 통해 지구 온난화 완화에 이바지한 와인 생산자의 노력을 인정한 것으로 토레스외 4개 와이너리가 포함되었다. 새로운 글로벌 인증인 RVA 인증의 표준은 유기농 및 지속 가능성을 평가하는 인증 분야의 세계적 리더, 에코서트(Ecocert)에서 인증했다.

토레스의 히든카드, 고대 품종의 복원

“40년 전 필록세라 이후 사라진 옛 포도 품종을 찾기 위해 시작한 이 작업은, 카탈루냐 포도 재배의 유산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였다.” 매력적이지만 불확실한 고대 포도 품종 복원 프로젝트는 5세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 품종들은 ‘홈그라운드’의 특정 테루아에 적응하며 진화했지만, 대중적인 품종의 인기에 밀려 잊혀 버렸다. 토레스는 이런 품종들이 긴 생육 주기와 고온 및 가뭄에 대한 저항력을 갖고 있어, 기후 위기에 덜 취약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놀랍게도 그때 외면당했던 단점이 지금에선 장점이 된 것.

토레스에서 고대 품종인 포르카다로 만든 와인

지금까지 50개 이상 품종을 재발견했고 그 중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포르카다(Forcada), 모네우(Moneu), 케롤(Querol), 가로(Garró), 곤파우스(Gonfaus), 피레네(Pirene) 6개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다. 특히 포르카다 100% 와인은 제임스 서클링, 디캔터 등의 호평을 받았다.

토레스는 새 품종들이 각종 테스트를 거쳐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10년 이상 걸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토레스가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오늘날 이 품종들이 와인의 다양성을 넓히고 전통 와인을 보완하는 독특한 와인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의 노력은 혁신,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헌신 그 자체다"라고. 가파른 폭염 발생의 속도를 생각한다면, 카탈루냐 전역에서 이 품종들을 재배하는 날도 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게다가 토레스는 고대 포도 품종의 재발굴 프로젝트를 리오하 등 타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토레스 가문이 지역의 잊힌 토착 품종을 찾기 위해 쏟아부은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의 말처럼 토레스의 용기와 의지는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협력’이란 가치 있는 선택

2019년, 토레스는 캘리포니아의 잭슨 패밀리 와인즈와 손잡고 '국제 기후 행동 와이너리(IWCA)'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전 세계 와인 산업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움직인다. 기후 위기에 맞서기 위해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일까? 아마도 공감과 협력일 것이다. 현재 전 세계 50여 개의 와이너리가 이 이니셔티브에 동참해, 2050년까지 넷제로를 이루기 위한 원칙에 합의했다. 토레스는 더 많은 생산자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길 바라며, 함께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지식을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레스 가문의 4세대와 5세대

이제 소비자가 화답할 때

기후 위기는 이미 현실이 되었고, 토레스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며, 와인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기후 비상사태는 우리가 알던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방식의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온도 변화에 민감한 비티스 비니페라처럼 우리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기후 위기 아래 (당연히) 와인의 품질 변화를 의심하는 소비자가 있다면, 어떤 변화에도 변함없이 뛰어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는 그의 말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를 잘 보여준다.

전통과 혁신의 균형을 잡아가는 토레스의 노력은 와인이 단순한 음료를 넘어,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이 함께한다면, 와인 한 병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또한 실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구를 더 사랑할수록 우리의 와인은 더 좋아질 겁니다.” - 파밀리아 토레스 웹에서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신동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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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4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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