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사의 쉬라즈 장인, 세인트 할렛

Written by강 은영

“세인트 할렛(St Hallett)은 다양한 쉬라즈와 바로사의 다양성에 대한 한 편의 위대한 쇼케이스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와인의 세세한 차이까지 알고 싶어 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열정적인 애호가들에게 세인트 할렛은 정말 흥미로운 와인일 거다.” 지난 5월 19일이었다. 세인트 할렛을 포함해 아콜레이드 그룹의 프리미엄 와인들을 맡고 있는 와인메이커 크레이그 스탠스버로우(Craig Stansborough)와의 인터뷰가 있었고, 이 와인 애호가의 가슴에 불 지피는 소리는 그날의 마지막 코멘트였다. 이 베테랑 와인메이커는 그랜트 버지(Grant Burge)라고 하는 또 다른 바로사 명가를 30년 이상 맡아 온 인물이기도 한데, 그의 관점에서 듣는 세인트 할렛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로웠다.

아콜레이드 와인 그룹의 프리미엄 와인메이커 크레이그 스탠스보로우(Craig Stansborough)

세인트 할렛의 쉬라즈를 위한 서사

“세인트 할렛은 호주 대표 명산지인 바로사와 대표 품종 쉬라즈로 오래 명성을 이어 온 생산자다. 바로사 최고 수준의 슈퍼 쉬라즈에서 접근성 좋은 이지 드링킹 쉬라즈까지 커버하면서 말이다.” 다시 크레이크 스탠스버로우의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세인트 할렛의 스토리는 ‘바로사 쉬라즈’를 향한 여정으로 풀이할 수 있다(물론 세인트 할렛이 쉬라즈 와인만 생산하는 건 아니다). 출발점은 린드너 패밀리(Lindner Family)가 바로사 밸리에 와이너리를 설립한 1944년. 이전까지 린드너 집안은 도축업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바로사 밸리의 땅을 사 포도나무를 심고, 돈이 모이면 포도밭을 더 매입하곤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와인업으로 뛰어들면서 초기는 당시 호주 와인산업의 흐름대로 포티파이드 와인을 생산한다. 점차 사업은 확장됐고, 70년대가 되면서는 와인메이킹에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크레이그의 말을 빌리면 “바로사의 드라이 레드 와인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점차 세인트 할렛만의 명성을 견고히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즈음 세인트 할렛에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한 명은 스튜어트 블랙웰(Stuart Blackwell). 1972년 합류하여 세인트 할렛의 와인메이킹 토대를 만들고 30여 년 이상 이끌어 온 와인메이커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케팅의 귀재 밥 매클레인(Bob Mclean)이 있었다.

세인트 할렛의 와인메이커였던 스튜어트 블랙웰(Stuart Blackwell)

“스튜어트는 정말 좋은 와인메이커였다(현재는 은퇴하고 간간히 세인트 할렛의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세인트 할렛이 성장하는 데 큰 버팀목이 됐다. 밥은 위대한 마케터였고. 두 사람의 협업, 1980년대 호주 와인에 대한 인식 변화, 특히 영국 시장을 중심으로 호주 와인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시대적인 요인 등이 만나 세인트 할렛은 급격히 성장했다. 내가 와인메이킹을 시작할 때가 90년대였는데, 그때 세인트 할렛은 이미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플래그쉽 와인 올드 블록은 엄청났다.” 참고로 세인트 할렛은 제임스 할리데이의 5 스타 와이너리에 누차 이름을 올려 온 와이너리이며, 와인메이커 스튜어트 블랙웰은 2003년 ‘올해의 바로사 와인메이커’로 선정된다. 크레이그에게 스튜어트는 멘토 같은 존재였다. 사담을 덧붙이면 오래전 스튜어트 블랙웰이 그에게 세인트 할렛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한다. 그는 그랜트 버지에 남는 쪽을 택했지만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 한 와이너리에서 30년 이상을 근속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아콜레이드 프리미엄 와인을 맡는 와인메이커로서 세인트 할렛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 새삼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세인트 할렛은 일부 소유한 포도밭이 있지만, 농가들로부터 포도를 매입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와인을 만든다. 밥과 스튜어트가 가장 애썼던 일 중 하나가 이 농가들에게서 좋은 포도를 공수하는 것이었고, ‘바로사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인트 할렛의 경우 바로사의 북부와 중부, 이든 밸리 쪽의 포도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단적으로 비교하면 그랜트 버지는 바로사의 남부의 포도를 많이 사용한다. 크레이그는 “세인트 할렛은 와인 레인지를 확장하면서 자신들의 헤리티지를 와인에 담곤 했다”고 부연했다. 그럼 세인트 할렛이 쌓아 온 쉬라즈 시리즈들을 한 번 들여다보자. 와인메이커의 가이드에 따라 기본급부터 프리미엄 라인으로 올라간다.

‘페이스’ 쉬라즈 VS ‘블랙 클레이’ 쉬라즈

먼저, 국내 출시 후 이마트 국민와인으로 불린 페이스(Faith)가 있다. 세인트 할렛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와인이기도 하다. 1842년 바로사는 종교 박해를 피해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건너 온 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 와인의 이름은 처음 바로사에 정착한 이들을 이끌었던 신념 혹은 믿음에서 영감을 얻었다. 크레이크는 이 와인을 한마디로 ‘바로사 포도의 쇼케이스’라고 정의하며 말을 이었다. “아로마틱하고 다채로운 향, 감미로운 과일 맛, 미디움 바디를 보여주는 와인이며, 세인트 할렛의 얼굴을 잘 보여주는 와인 중 하나다. 뉴 오크도 그렇게 많이 쓰진 않았다.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과일 향이 중심이 되는 와인이다.”

(왼쪽부터) 세인트 할렛 페이스 쉬라즈, 블랙 클레이 쉬라즈, 게임키퍼스 쉬라즈

페이스와 같은 가격대에 블랙 클레이(Black Clay)도 있다. 국내엔 최근 런칭한 와인이다. 같은 브랜드의 같은 가격대의 쉬라즈, 그럼 두 와인의 차이는 뭘까. 크레이그의 대답은 이렇다. “페이스랑 비슷한데 블랙 클레이는 좀 더 라이트함을 추구한 와인이다. 블랙 클레이는 북부 바로사의 포도와 중부 바로사의 포도를 사용했다. 바로사 지역 내에서도 북부의 포도가 와인에 좀 더 구조감이 주는 편이다. 그러니까 페이스가 좀 더 과일 중심적이라면, 블랙 클레이는 조금은 더 구조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이지 드링킹 스타일이다.” 예상했겠지만 블랙 클레이는 검은 진흙토에서 난 포도를 사용한 것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세인트 할렛에서는 수확이 끝난 후 한 번, 그로부터 6개월 뒤 와인이 안정기에 들 때 한 번 와인메이커들이 모여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다. 크게 바로사 북부, 남부, 이든 밸리 정도만 분류해서 정보를 주고 정확히 어떤 포도밭의 와인인지는 모르는 상태로 시음한 뒤 이후에 확인 작업을 하는데, 몇 해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거치는 동안 와인메이커들 사이에서 빈번히 진흙토 포도밭에서 난 와인들의 캐릭터에 대한 흥미로운 의견들이 나왔고 이를 토대로 블랙 클레이 쉬라즈가 만들어졌다. 이런 토양에서 난 포도는 와인에 좀 더 짙은 베리 맛을 부여하곤 한단다.

한편 바로사가 곧 위대한 쉬라즈의 동의어와 진배없음을 인지한 세인트 할렛은 바로사의 자연을 잘 지켜내는 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사냥터 지키미를 뜻하는 게임키퍼스(Gamekeeper's)가 그런 의지를 담은 와인이다. 게임키퍼스 쉬라즈는 바로사 여러 지역의 포도를 이용해 은은한 스파이시함과 생동감 있는 과일 향이 돋보인다.

세인트 할렛 부처스 카트

베이비 블랙웰 ‘부처스 카트’

다음은 부처스 카트(Butcher’s Cart). 앞서 얘기했듯 린드너 패밀리는 와인 산업에 뛰어들기 전 도축업을 했다. 당시 이들 가족은 고기를 실은 수레를 끌고 다니며 바로사 지역 주민들에게 고기를 썰어 팔곤 했다. 그 고기를 실은 수레를 추억하는 와인이 부처스 카트다. “좀 더 북부 바로사의 포도를 썼고 그래서 좀 더 리치하고 구조감도 있으며,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도 더 풍만하고 페이스나 블랙 클레이보다는 한 단계 위의 와인”이라고 크레이그는 설명했다. 부처스 카트는 ‘베이비 블랙웰(세인트 할렛의 시그니처 와인 중 하나)’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유에 대해선 와인메이커의 설명을 고스란히 옮긴다. “블랙웰 와인을 만들 때 최상의 포도만을 사용하고, 블렌딩을 하면서도 최종 와인의 밸런스를 위해 고심하여 선별하곤 한다. 그때 그 최상의 까다로운 기준에 아주 미미한 수준 차이로 누락된 와인들, 혹은 거의 같은 수준의 와인이지만 와인의 밸런스를 생각했을 때 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와인들이 블랙웰보다 한 단계 아래의 와인으로 만들어지는데, 그게 부처스 카트다. 충분한 구조감과 복합미를 보여주지만 블랙웰에는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의 와인. 숙성력도 좋지만 비교적 접근하기도 괜찮은 가격대의 와인이다.”

세인트 할렛의 쉬라즈 올드바인

와인메이커들의 흔한 최애

아직 국내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와인메이커들의 최애 쉬라즈 중 하나라고 크레이그가 귀띔한 와인이 있다. 가든 오브 이든(Garden of Eden)이라고, 이든 밸리의 쉬라즈다. 바로사 밸리보다 지대가 높은 이든 밸리의 와인이라 좀 더 서늘한 기후에서 자란 쉬라즈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사랑스러운 과일 향이 풍부하고 좋은 산도를 가진 미디움 바디의 와인으로 검붉은 과일과 페퍼, 여러 향신료 향, 겨울 숲 같은 이미지가 그려진다고. 또 호주 레스토랑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와인이라고 한다.

세인트 할렛 블랙웰 쉬라즈

와인메이커의 이름을 따 ‘블랙웰’

이제 앞서 짧게 언급한 블랙웰을 이야기할 차례다. 와인메이커 스튜어트 블랙웰의 이름을 딴 이 와인은 1994년 첫 출시됐고, 주로 북부 바로사 밸리의 적갈색 진흙토에서 자란 포도를 사용한다. 크레이그는 “바로사를 남부, 북부, 중부, 서부 그리고 이든 밸리로 나누는데, 북부 바로사 와인은 좀 더 남성적”이라고 설명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보통 북부로 갈수록 더 무덥다. 이든 밸리의 경우 고지대가 많아서 더 서늘하지만 이든 밸리 안에서도 남부 이든밸리가 더 서늘한 축이다. 즉 북부 바로사는 좀 더 따뜻하고 비도 적게 내리는 지역이라 포도알 사이즈도 더 작은 편이고, 와인은 더 짙다. 100%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블랙웰은 달콤하게 짙은 과일 향과 탄탄한 구조감을 가진 장기 숙성력도 좋은 와인이다.

세인트 할렛 올드 블록 쉬라즈

세인트 할렛의 명성을 견인한 ‘올드 블록’

그리고 대망의 올드 블록(Old Block). 1980년 처음 생산할 때부터 바로사의 희귀하고 아주 오래된 포도나무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춘 와인이다. 바로사 여러 지역의 포도농가에서 올드바인을 매입해서 만들며 보통 75년 이상의 올드바인들을 이용한다. 가령 2019 빈티지 올드 블록은 1870년에 식재된 포도밭의 포도를 이용했다. 그 해 사용한 가장 어린 포도밭은 1936년에 식재된 것이었다. 또한 올드 블록은 바로사 밸리와 이든 밸리의 포도를 블렌딩해서 만드는데, 매해 만들지는 않는다. 와인이 충분히 좋다고 판단되는 경우만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엔 2020년과 2023년 빈티지는 패스했다. 2023년의 경우 너무 추워서 이든 밸리의 포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단다. 참고로 세인트 할렛이 구한 최고의 이든 밸리 쉬라즈는 올드 블록에 쓰이고, 그 다음 수준의 이든 밸리 쉬라즈는 세인트 할렛의 또 다른 와인인 하이어 얼스 시라(Higher Earth Syrah: 서늘한 기후의 이든 밸리 와인이라 쉬라즈가 아닌 시라로 부른다)로 간다. 이렇듯 최상의 포도만 이용한 올드 블록은 복합적이고 농축미 있는 과일 향에 구조감과 숙성 잠재력이 좋은 와인으로, 바로사 쉬라즈의 마스터라는 세인트 할렛의 최정점을 보여준다.

강은영 사진 제공 아콜레이드 와인 코리아 촬영 현창익 포토그래퍼

  •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기사 공개일 : 2024년 06월 14일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