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중시하는 샴페인 세계에 모던함을 내세운 브랜드가 등장했다. 샴페인 EPC(Champagne EPC), 간결한 이름부터 모던함 그 자체다. ‘미식가’ 혹은 ‘쾌락주의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에피퀴리앙(Épicurien)에서 세 알파벳을 따온 EPC는 2019년 첫 빈티지를 출시한 후로 빠르게 시장을 확장해 가는 중이다. 전례 없는 생산 방식과 기억하기 쉬운 이름, 감각적이고 심플한 레이블 등 기존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함으로 EPC는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샴페인 브랜드로 떠 올랐다. 지난봄, 샴페인 EPC의 공동 대표인 제롬 퀘지(Jérôme Queige)가 방한했다. 샴페인계의 ‘뉴진스’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혁신적이고 새로운 샴페인의 탄생을 알리기 위하여!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어떻게 샴페인으로 재해석되었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에피쿠로스(Epicurus)는 대표적인 쾌락주의자다. 하지만 그의 ‘쾌락’을 방탕자의 환락이나 순간적인 쾌락으로 연결 지어선 곤란하다.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 에피쿠로스와 그 학파가 설파한 쾌락주의란 정적이고 정신적인 쾌락, 쉽게 얘기하자면 ‘삶의 단순한 즐거움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중용, 절제, 미덕, 공동체 의식을 강조했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현대에 와선 미니멀리즘(Minimalism), 겸손, 절약, 우정,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중시하는 에피큐리언 라이프스타일(Epicurean Lifestyle)로 진화했다. 쉽게 과잉으로 흐르고 점점 복잡해지는 삶을 사는 현대인이 주목해야 할 개념 중 하나일 테다. 오늘의 주인공, 샴페인 EPC는 이 에피큐리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세 명의 공동 대표에 의해 만들어졌다. ‘에피큐리언’의 프랑스 단어인 ‘에피퀴리앙’의 이름으로, 불과 6년 전인 2018년도에.
샴페인 EPC의 공동 대표인 제롬 퀘지와 에두아르 루아(Édouard Roy), 카미유 질라르디(Camille Gilardi)는 샴페인 하우스를 열며 ‘뭔가 새로운 것(Something New)’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오랜 전통의 샴페인 브랜드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그들은 포도 구매와 양조, 브랜딩, 유통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했다. 모토는 '현대적이고 쉽게 마시기 좋은, 뛰어난 샴페인을 만들자'. 한눈에 각인되는 브랜드명과 레이블, 이해하기 쉬운 직관적인 맛은 복잡하고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심플’이라는 해방구를 마련해주었다. ‘삶의 단순한 즐거움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세 명의 공동 대표는 각자의 특기를 살려 샴페인 하우스를 운영한다. CEO인 에두아르 루아는 커뮤니케이션 총괄을, P&G 유럽시장 브랜드 마케터 출신의 카미유 질라르디는 샴페인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신선한 시선으로 마케팅 디렉터를 담당한다. 그리고 니콜라 푸이야트(Nicolas Feuillatte) 등 주요 샴페인 하우스에서 27년간 디렉팅을 했던 제롬 퀘지는 총괄 디렉터로서 전반적인 관리를 맡고 있다. 그럼 이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구현해 낸 샴페인 EPC의 ‘뭔가 새로운 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홉 개의 협동조합과 아홉 개의 파트너쉽
EPC의 샴페인 하우스에는 양조 시설이 따로 없다. 포도 구매와 양조가 특별한 프로세스로 진행되기 때문인데, 그 중심에는 협동조합과의 파트너쉽이 있다. 이 색다른 접근법의 첫 단계는 각 퀴베를 만들 지역을 정하는 것이다. 이후 그 지역 최고의 협동조합에서 포도를 구매하고, 테루아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협동조합의 셀러에서 바로 양조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EPC 셀러 마스터의 관리 하에 있다. 원칙은 ‘하나의 퀴베, 하나의 테루아’. 가령 샤르도네가 잘 자라는 코트 데 블랑(Côte des Blancs)이나 코트 드 세잔(Côte de Sézanne)의 협동조합에서는 블랑 드 블랑을 만들고, 피노 누아가 잘 자라는 코트 데 바(Côte des Bar)의 협동조합에서는 블랑 드 누아를 만드는 식이다. 총 아홉 개의 퀴베를 생산하니 전체 샴페인 생산지를 아울러 아홉 개의 협동조합과 아홉 개의 파트너쉽이 있는 셈이다. “각 퀴베를 맛보며 샹파뉴 지역을 여행하는 컨셉”이라고 EPC를 소개한 제롬의 말은 레이블을 통해서도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우아하게 굴곡진 레이블의 형태가 다름아닌 샹파뉴 지역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이 여행 컨셉은 각 퀴베의 직관적인 향과 맛으로 설득력을 갖는다. 예를 들어 ‘EPC 블랑 드 블랑 브뤼(EPC Blanc de Blancs Brut)’는 한입에 샤르도네 산지에서 만든 블랑 드 블랑임을 알 수 있고, ‘EPC 블랑 드 누아 브뤼(EPC Blanc de Noirs Brut)’는 한입에 피노 누아 산지에서 만든 블랑 드 누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긴 숙성 기간과 낮은 도사주와 같은 최신 트렌드를 한두 방울 떨어뜨려 EPC의 샴페인은 화룡정점을 찍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모던함이었을거야
첫 빈티지를 출시한 후 5년 차, 젊은 샴페인 하우스인 점을 감안할 때 EPC의 판매량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제롬에 의하면 작년에만 40만 병을 판매했고 올해는 50~60만 병 판매를 목표로 한다고. 짧은 기간이지만 EPC는 오랜 역사를 지닌 샴페인 하우스들도 해내지 못했던 여러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결과물을 보려면 우선 파리를 관통하는 강, 센느로 시선을 모아야 한다. 센느 강의 대표 크루즈, 바토 무슈(Bateaux Mouches)의 공식 샴페인으로 EPC가 선정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100년 이상 파트너쉽을 유지해 온 LVMH를 대신하여! 품질은 미쉐린 레스토랑들이 보장한다. 파리의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인 ‘니콜라 플라멜(Nicolas Flamel)’과 리옹의 미쉐린 2스타 ‘폴 보퀴즈(Paul Bocuse)’,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미쉐린 3스타 ‘라사르테(Lasarte)’를 비롯하여 여러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샴페인 EPC를 리스팅했다. 국내에서도 희소식이 전해졌는데, 미쉐린 2스타인 정식당에서 'EPC 밀레짐 2009(EPC Millésime 2009)를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EPC는 에티하드 항공(Etihad Airways)의 비즈니스 클래스 샴페인으로도 선정되었고, 파리 샤를드골 국제공항 면세점에도 리스팅되었다. 한편 모나코와 이비자, 말라가의 비치 클럽 등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고. 불과 5년 사이에 이 정도 성과라니, 아무래도 현대인에게 필요했던 건 클래식한 브랜드명이나 레이블, 해석이 필요한 맛 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모던함이 아니었을까.
테이스팅한 EPC 샴페인들
샴페인 EPC 블랑 드 블랑 브뤼 나뛰르 Champagne EPC Blanc de Blancs Brut Nature
코트 드 세잔 지역에서 샤르도네 100%로 만든 샴페인. 제로 도사주로 최소 30개월의 숙성을 거쳤다. 사과와 배, 시트러스의 신선한 아로마에 레몬 커스터드, 브리오슈, 효모, 버터의 크리미함이 더해졌다. 입안에는 약간의 쌉싸름함이 남고, 섬세하면서 가볍게 느껴지는 깨끗한 인상의 블랑 드 블랑.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Concours Mondial de Bruxelles)에서 실버 메달을 받았다.
샴페인 EPC 블랑 드 누아 브뤼 Champagne EPC Blanc de Noirs Brut
코트 데 바 지역의 피노 누아 100%로 만들어졌다. 리저브 원액과 함께 블렌딩하여 최소 40개월을 숙성, 도사주는 4g/L다. 새콤한 자두와 체리, 사과의 아로마가 신선하고 둥글둥글하게 느껴지며, 약간의 타닌감이 질감을 형성하고 부드러운 버블로 우아하게 마무리된다. 르 기드 아셰트(Le Guide Hachette)에서 2스타를 받았고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에서 골드 메달을 받았다.
샴페인 EPC 블랑 드 블랑 그랑 크뤼 Champagne EPC Blanc de Blancs Grand Cru
코트 데 블랑의 아비즈 그랑 크뤼 마을에서 최상급 샤르도네 포도로 만들어졌다. 3g/L의 도사주를 한 엑스트라 브뤼라 할 수 있고, 52개월의 숙성을 거쳤다. 상큼한 자몽과 베르가못, 고소한 프랄린, 브리오슈, 헤이즐넛의 향이 풍성하게 느껴지고 촘촘한 버블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산미와 농축미, 바디감이 좋은 파워풀한 스타일의 블랑 드 블랑.
샴페인 EPC 프리미에 크뤼 브뤼 Champagne EPC Premier Cru Brut
코트 데 블랑과 몽타뉴 드 랭스, 발레 드 라 마른 지역의 샤르도네 66%와 피노 누아 34%가 블렌딩된 프리미에 크뤼 샴페인. 2015 빈티지를 베이스로 하며 리저브 원액이 60% 들어갔다. 도사주는 6g/L. 일부 오크 숙성을 포함하여 최소 75개월의 숙성 기간을 거쳤다. 살구와 자두 등 핵과류의 과일 아로마에 레몬 커스터드, 버터 쿠키, 브리오슈, 이스트의 향이 풍성하게 더해지며, 약간의 쌉싸름함과 타닌감이 있는 파워풀한 샴페인이다.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에서 실버 메달을 받았다.
샴페인 EPC 밀레짐 2009 Champagne EPC Millésime 2009
가장 파워풀한 EPC의 최상급 샴페인. 코트 데 블랑의 프리미에 크뤼 마을인 테르 드 베르튀(Terre de Vertus)의 샤르도네 포도 100%로 양조했다. 도사주는 5g/L, 총 12년의 숙성 후 출시되었다. 시트러스와 청사과, 허니서클의 생동감 있는 아로마에 빵 굽는 향과 크림, 버터, 아몬드의 향, 그리고 약간의 산화성 향도 더해진다. 풍성하고 복합적인 향미와 긴 피니쉬, 완벽한 밸런스를 보여준다. 고급 미쉐린 레스토랑들로부터 사랑받으며, EPC의 노하우가 가장 잘 들어가 있는 샴페인이라 할 수 있다.
수입사 제이와인
▶인스타그램 @jwine_company
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제이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