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에 깨끗했던 와인을 다시 3월에 테이스팅하니 매캐한 연기 향이 나는 겁니다. 그 순간 직감했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요.”
지난 3월 말에 방한한 라 크레마(La Crema)의 수석 와인메이커 크레이그 맥엘리스터(Craig McAllister, 아래 사진)는 2020 빈티지를 가장 어려웠던 해로 꼽으며 혹독했던 의사 결정의 과정을 떠올렸다. 2020년 캘리포니아를 집어삼킨 사상 최악의 산불은 생산자들에게 잔혹한 질문을 던졌다. “연기에 그을린 포도를 기술로 회생시켜 병에 담을 것인가, 아니면 한 해 농사를 통째로 포기할 것인가?” 라 크레마의 선택은 후자였다.
평소 피노 누아 생산량의 75%를 폐기했다. 윌라멧 밸리와 싱글 빈야드 와인은 아예 만들지 않았다. 샤르도네의 경우, 과즙을 바로 분리하기 때문에 피노 누아처럼 연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렇게 빈티지의 축복은커녕 너무 열악해 만족할 만한 품질을 낼 수 없다면, 아예 생산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비판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브랜드 이미지를 지키려는 계산된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연기 오염(Smoke Taint)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병입 직후엔 깨끗해 보이다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 누군가의 와인 셀러에서 5년의 기다림 끝에 열었을 때 연기 냄새가 난다면? 그때 생산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생산자는 어떤 상황에도 고객의 신뢰를 위한 선택을 피할 순 없다.
카베르네에 열광할 때, 이들은 달랐다
라 크레마의 여정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캘리포니아 와인업계 전체가 카베르네 소비뇽에 열을 올리던 시절, 이들은 러시안 리버 밸리(Russian River Valley)의 안개 자욱한 서늘한 땅에 주목했다. 당시엔 누가봐도 이상한 결정이었다. 피노 누아? 서늘한 기후? 부르고뉴 방식의 섬세한 양조? 캘리포니아에서? 하지만 그 고집스러운 선택이 결국 라 크레마를 쿨 클라이밋 와인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1993년 잭슨 패밀리 와인즈(Jackson Family Wines)에 인수되면서 라 크레마는 날개를 달았다. 자본의 안정은 품질에 대한 결벽을 가속화했고, 몬테레이(Monterey)와 오리건 월라맷 밸리(Willamette Valley)까지 포도밭을 넓혀갔다. 오늘날 라 크레마는 서늘한 기후 테루아를 가장 순수하게 담아내는 와이너리 중 하나로 꼽힌다. 1979년의 선택은 옳았던 것이다.
오크통 하나에도 철학이
품질에 대한 집요함은 포도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크레이그와 팀은 수확 시즌 내내 매일 포도밭을 직접 찾는다. 당도 수치(Brix)가 아니라 직접 포도를 입에 넣어보는 것으로 수확 시기를 결정한다. 씨앗이 초록색에서 갈색으로 변하고, 비스킷 같은 풍미가 느껴지는 순간을 기다린다. 숫자보다 감각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 철학은 오크통에서도 이어진다. 라 크레마의 피노 누아는 100% 프랑스산 오크에서 숙성된다. 샤르도네의 경우 아메리칸 오크를 일부 혼합 사용하여 각 지역의 개성을 살린다.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 잭슨 패밀리 와인즈는 한 발 더 나가, 프랑스 보주(Vosges)에 제재소를 직접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직접 나무를 구매해 자르고 쪼갠 뒤 2~3년간 건조합니다. 그 후 미주리의 쿠퍼리지로 보내 라 크레마만을 위한 토스팅 레벨로 배럴을 제작해요. 프랑스 숲에서 와이너리까지 모든 과정을 추적할 수 있죠." 이 과정을 설명하는 그의 눈이 빛났다. 그에게 오크통은 와인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질감과 입체감을 불어넣는 정교한 조미료다. 포도밭부터 오크통까지 직접 관리하니 합리적인 가격에 고품질 와인이 가능하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라 크레마는 수치 너머의 감각을 믿는다.
위도가 거짓말을 한다
라 크레마는 가장 북쪽 오리건 윌라멧 밸리(Willamette Valley), 앤더슨 밸리(Anderson Valley), 소노마 코스트(Sonoma Coast), 러시안 리버 밸리, 로스 카르네로스(Los Carneros), 그리고 가장 남쪽, 몬테레이에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서늘한 지역은 몬테레이.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몬테레이는 소노마보다 훨씬 남쪽인데, 왜 더 서늘하다는 걸까? 답은 바다에 있다. 몬테레이 만에서 밀려오는 차가운 태평양 바람과 안개가 낮 기온을 떨어뜨리고, 덕분에 포도는 느긋하게 천천히 익는다. 길어진 행 타임(hang time)은 복잡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크레이그는 몬테레이 샤르도네를 두고 "아주 현대적인 스타일"이라 했다. 구운 파인애플 같은 열대 과일의 풍성함이 특징이다. 피노 누아는 좀 더 세이버리(savory)한 방향으로, 흙 내음과 구운 채소, 비트, 루바브 같은 뉘앙스에 잘 익은 자두 향이 더해진다. 입안에선 블랙 티와 담배 잎 같은 노트도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소노마 코스트는 어떤가. 안개가 걷히면 드러나는 화창한 햇빛과 초원, 그리고 클래식한 와인이 나온다. 샤르도네는 사과와 시트러스가 중심을 잡고, 피노 누아는 신선한 베리와 스파이스, 소노마 특유의 허브 향이 살아있다. 군더더기가 없다.

오리건 윌라멧 밸리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몬테레이의 세이버리함과 소노마의 과일 활기를 모두 품은 느낌이랄까. 흙 내음과 버섯 노트가 더 진하게 깔리고, 샤르도네는 짜릿한 산도와 넘치는 과즙으로 캘리포니아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러시안 리버 밸리. 라 크레마의 출발점이자 여전히 가장 강렬한 곳이다. 네 지역 중 가장 따뜻하지만 여전히 서늘한 기후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함께 테이스팅한 2022 러시안 리버 밸리 피노 누아는 라즈베리, 자두, 체리, 흙의 풍미가 촘촘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산도는 밝고 신선했으며, 질감은 놀랍도록 부드럽고 우아했다.
기후변화, 이미 포도밭에
2020년 산불은 극단적인 사례였지만, 기후변화는 이미 매년 포도밭을 바꾸고 있다. 크레이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2010년 이전엔 포도가 잘 익도록 잎을 모두 따서 햇빛에 노출하는 게 관행이었어요. 이젠 폭염에 포도가 타버리는 일이 생기면서 잎을 우산처럼 남겨두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포도밭 일은 더 고도화되고 더 민첩해졌다.
양조 스타일도 조용히 변하고 있다. 25년 전 캘리포니아 샤르도네는 묵직하고 오크 향이 짙었다. 지금은 더 일찍 수확하고, 새 오크통 비율을 낮추고, 유산 발효(MLF)의 영향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기후가 와인을 바꾸고, 와인메이커는 그 변화에 응답한다. 미래의 경고가 아닌 지금 당장 재무제표를 뒤흔들고 있으니.
땅을 빌려 쓰는 사람들의 책임
와이너리에서 물을 쓸 일이 많을까 싶지만, 라 크레마엔 약 7만 개의 오크통이 있다. 그 통들을 씻는 데 들어가는 물의 양을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라 크레마는 헹군 물을 재활용하고, 빗물을 모아 냉각 시스템과 농업용수로 재사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그 결과 2008년 이후 물 사용량을 12% 줄였다. 태양광 발전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이너리 지붕의 태양광 패널 3,000개는 연간 전력의 약 70%를 자체 충당한다.
잭슨 패밀리 와인즈가 이 모든 것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손자, 증손자 세대까지 이어질 와이너리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이 땅을 처음 받았을 때보다 더 건강하게 돌려주는 것,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유산이다. 지속가능성이 마케팅 언어가 된 시대에, 이 정도면 진심아닌가.

테이블 위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와인
"우리 와인이 레스토랑에서 인기 높은 이유는 순수함, 우아함, 그리고 질감 때문입니다." 크레이그의 말은 직접 테이스팅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서늘한 기후가 만들어낸 생동감 넘치는 산도와 입안을 매끄럽게 감싸는 질감은 음식 앞에서 더 빛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훈제 오리 가슴살과 러시안 리버 밸리 피노 누아예요. 오리의 기름진 맛과 피노의 산도, 거기에 미세한 스모키함까지, 이게 최고죠." 듣는 순간 군침이 돌았다. 소노마 코스트 샤르도네는 생선회나 스시와 잘 어울린다. 간혹 라 크레마가 너무 부드럽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 부드러운 질감이야말로 테이블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와인 앤 스피릿(Wine & Spirits)>이 수시로 'Most Popular Restaurant Wines'로 꼽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21 소노마 코스트 피노 누아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Best Buy 1위'에 오르고, 2024년 <와인 엔수지애스트(Wine Enthusiast)>가 올해의 미국 와이너리로 선정한 이야기를 할 때, 크레이그는 "멋진 보상"이라며 웃었다.
"베스트 빈티지라… 고르기 어렵네요. 2016, 2021년 그리고 지금 테이스팅 중인 2025년 와인은 정말 뛰어날 것 같아요." 2016 빈티지는 생육과 수확 모두 완벽했다. 집중도와 균형감을 갖추면서 각 지역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2021 빈티지야말로 크레이그의 뇌리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았는데, "2020년 전쟁같은 산불의 보상인가 싶을 정도로 2021년은 모든 게 완벽했다"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와인이라 했다. 2025 빈티지는 아직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구매 리스트에 2025 라 크레마를 올려놓으면 끝이다. 한 해의 수확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든 와인이니까.
테이스팅한 와인

라 크레마 러시안 리버 밸리 피노 누아 2022(La Crema Russian River Valley Pinot Noir 2022)
11개월 동안 100%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새 오크 비율 30%)
레드 체리, 라즈베리, 장미 꽃잎의 향이 느껴진다. 입안에선 베리류와 자두의 느낌이 아주 미세하게 흙 내음과 어우러진다. 매끄러운 타닌과 신선한 산도가 조화를 이루며 세련된 인상을 준다. 여운에서 은은하게 오크향이 이어진다. 와인을 마실 수록 1979년 라 크레마의 첫 번째 선택이 납득되었다.
*현재 소노마 코스트, 러시안 리버 밸리, 몬테레이에서 생산되는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 와인들은 제이와인 컴퍼니에서 수입 중이다.
문의 제이와인 컴퍼니
▶인스타그램 @jwine_company
글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제이와인 컴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