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레드 와인 중 ‘우아함’을 키워드로 단 하나의 와인만 꼽으라면 세냐(Seña)가 가장 많이 거론되지 않을까? 보르도 블렌딩이지만 젊을 때에도 절대 근육질이나 다부진 골격을 내세우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차분하면서도 화사하고 또 기품 있는 와인. 여타 우수한 칠레 와인들 중에서도 “스타일적으로 우아함을 가장 잘 표현하는 와인은 세냐”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다. 지난 9월 5일 목요일, 새로운 빈티지인 세냐 2022가 글로벌 시장에 출시되었다. 이번 빈티지를 통해서는 어떤 종류의 우아함을 보여줄지 기대하며, 세냐 2022를 미리 만나본다.
칠레의 혼을 담은 보르도 블렌드 와인
익히 알려졌듯 세냐는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Viñedos Familia Chadwick)의 현 회장 에두아르도 채드윅(Eduardo Chadwick)과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유명 와인 생산자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가 함께 만든 와인이다. 첫 빈티지는 1995년, 그 시작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버트 몬다비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험하고자 칠레를 방문했고, 에두아르도 채드윅이 그의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세냐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칠레 와인의 역사를 이끈 전통 있는 가문의 젊은 후손과 이미 전설적이었던 나파 밸리의 거장은 여러 와인 산지를 둘러보는 동안 차 안에서 서로의 비전을 공유했다. 그리고 “칠레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와인, 보르도를 모델로 하면서도 칠레의 특성을 담은 와인”으로 뜻을 모으고, 칠레 최초의 국제 합작 프로젝트 와인을 만들기 위한 서명을 했다.
로버트 몬다비를 멘토로 삼아 에두아르도 채드윅은 칠레 와인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당시 칠레는 수 세기 동안 와인을 생산해왔으나 월드 클래스 와인은 없던 시절이었다. 최상급 포도밭 부지를 찾아 나선 두 사람은 마침내 아콩카과 밸리(Aconcagua Valley)의 한 구불구불한 산비탈에 멈춰섰다. 태평양에서 불과 40km 거리에 있어 시원한 기온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안데스산맥에서 뻗은 아콩카과 산의 눈 녹은 물을 관개 용수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파른 지형과 곳곳에 산재해 있는 바위 등 포도밭 조성을 위한 도전과제는 만만치 않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도가 부드럽게 익을 수 있는 완벽한 기후가 있는 그곳에서, 극도의 우아함을 갖춘 세계적 수준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몇 년에 걸친 기다림 끝에 1997년, 칠레 최초의 아이콘 와인이 1995 빈티지로 탄생했다. 보르도 블렌딩에 칠레를 대표하는 카르미네르 품종을 포함하여 ‘칠레의 혼을 담은 보르도 블렌딩 와인(Chilean Soul, Bordeaux Blending Wine)’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에두아르도 채드윅과 로버트 몬다비는 이 와인에 “칠레가 세계적 수준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Sign)”라는 의미를 담아, ‘Seña(신호)’라 이름 붙였다.
포도밭이 아니라 정원처럼
포도가 자라난 곳이 분명하게 표현된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세냐는 천연자원을 보존하면서 자연과 공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속가능성’이란 단어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포도밭을 계획하는 아주 첫 단계부터 지속 가능한 방식과 유기농업을 적용한 이유다. 첫 빈티지로부터 10년이 흐른 2005년,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바이오다이나믹 방식을 수용한 것. 그는 현대 바이오다이나믹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계적인 바이오다이나믹 컨설턴트 앨런 요크(Alan York)를 초대하여 품질과 개성을 갖춘 와인에 대한 연구를 이끌었다. 앨런은 당시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 포도밭에 있어 독보적인 리더였으며, 원예, 포도 재배, 식물 생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세냐만을 위한 앨런의 전체론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세냐의 포도밭은 단순한 친환경 포도밭을 넘어 생명과 에너지로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다. 오늘날 포도밭에 있는 각종 꽃과 식물, 방목된 양 떼가 그 결과라 할 수 있을 거다. 포도 재배뿐만 아니라 와인 양조에 있어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적용한 결과, 세냐는 비건 인증인 브이 라벨(V-Label)을 받았다. 자연의 주기와 우주의 리듬, 바이오다이나믹의 과학, 물리학, 신비함을 끝없이 탐구하며 만들어지는 세냐, 그 한 병 한 병에는 아콩카과 산비탈에 정원처럼 자리한 포도밭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세계 무대로의 도전
칠레 와인의 수준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세냐지만, 세계 무대는 녹록지 않았다. 칠레에서는 월드 클래스 와인이 나올 수 없다는 와인업계의 오래된 편견에 맞서기 위해, 세냐는 당당히 자신을 내던졌다.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이 2004년 기획한 베를린 테이스팅에서 보르도 1등급 그랑 크뤼 및 수퍼 투스칸 와인들과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 시험대에 오른 것. 세냐는 보르도 그랑 크뤼 1등급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샤토 마고를 3~4위에 둔 채로 2위에 올라 놀라움을 안겼다. 운이 아니라 실력임을 입증하기 위해, 세냐는 이후 10년간 전 세계 18개 도시에서 재연된 베를린 테이스팅 투어를 21차례나 이어갔다. 숙성 잠재력을 입증하는 것 또한 세냐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에두아르도는 2011년에 지니 조 리(Jeannie Cho Lee)MW와 함께 세냐 버티컬 테이스팅 투어를 아시아에서 진행했다. 첫 빈티지인 1995를 포함하여 엄선된 빈티지의 세냐 와인들이 전 세계 유명 와인들과 함께 블라인드 테이스팅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홍콩, 서울, 타이페이에서 세 차례 열린 이벤트에서, 세냐는 탑에 오르며 실패 없는 결과를 보였다. 이 버티컬 테이스팅은 2012년에도 런던, 취리히, 그리고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이어졌고 성공적인 결과를 보이며 칠레 와인 역사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10년간의 베를린 테이스팅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칠레 와인을 보는 시선은 많이 바뀌었다. 칠레에서도 프리미엄 와인이 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편견이 사라지자 세냐는 비로소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여러 평론 매체로부터 꾸준히 좋은 성적을 받아왔고, 특히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2015, 2018, 2021 빈티지로 세 차례나 100점을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설명을 대신하지 않을까.
뛰어난 농축미와 우아함을 지닌 빈티지, 세냐 2022
완성된 세냐 2022 빈티지를 맛본 세냐의 전 와인메이커이자 현 양조 컨설턴트인 프란시스코 베티그(Francisco Baettig)는 다음과 같은 테이스팅 노트를 공유했다. “자두, 블루베리, 라벤더와 같은 신선한 아로마가 느껴지며 달콤한 향신료, 삼나무, 흑연의 은은한 향이 펼쳐진다. 텐션과 풍부함 사이의 아름다운 밸런스를 보여주며, 여운으로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매혹적인 와인이다.” 테이스팅 노트만으로도 기대감이 차오르는 세냐 2022 빈티지의 포도 생장기로 가보자. 평년보다 강수량이 적었던 겨울의 영향으로 봄에 싹이 조금 일찍 돋은 후, 적정한 온도가 이어져 포도는 점진적으로 균일하게 익어 갔다. 가장 큰 도전 과제는 수분 부족이었다. 강수량이 아콩카과 밸리의 평년 강우량 대비 65% 감소한 75mm에 불과했던 것. 그럼에도 세냐의 포도나무들은 스스로 해법을 찾아낸 듯 보인다. 바이오다이나믹 방식으로 관리되었고 뿌리가 깊은 오래된 포도나무는 수분을 찾아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갔으며, 현명한 관개 전략이 더해져 생장기 동안 포도는 완만하게 익어갔다. 3월 중순 말벡으로 시작된 수확은 프티 베르도, 카베르네 소비뇽, 카르미네르로 이어졌다. 수확량은 예상보다 낮았고 비가 많이 오지 않은 영향으로 포도송이의 무게는 가벼운 편이었는데, 덕분에 세냐 2022는 뛰어난 농축미를 지니게 되었다. 카베르네 소비뇽 60%, 말벡 25%, 카르미네르 9%, 프티 베르도 6%가 블렌딩된 세냐 2022는 18개월간 프렌치 오크 배럴(85%)과 푸드르(15%)에서 숙성되었다. 그 결과, ‘강렬하고 깊은 색상, 신선한 붉은 과일의 풍부한 향, 잘 익은 타닌, 좋은 농도, 생동감 넘치는 산도를 지닌 와인’이 완성되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의 영향을 받은 온화한 기온이 주는 독특한 캐릭터가 세냐의 ‘조화롭고 우아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농축미와 우아함을 함께 지닌 세냐의 또 다른 역작이 탄생했다.
글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비녜도스 파밀리아 채드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