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함께한 그리스 고대 문명
햇살이 가득하고 산이 많은 지중해 국가, 그리스는 우리에게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친숙한 나라이다. 문화, 철학, 신화, 종교를 아우르는 그들의 삶의 방식의 진리는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는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현대에 사용하는 단어인 ‘심포지움(Symposium)’ 은 고대 그리스어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Drinking with others)”라는 뜻이었는데, 그들은 함께 모여 식사하며 와인을 마시고 토론하고 철학을 논했다고 한다. 그 중심에서 애주가로 유명했던 석학, 소크라테스. 그는 와인에 대해 이러한 말을 남겼다. "와인은 사람들의 영혼을 상쾌하게 적셔주며 마음의 근심을 잠재운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을 되살리고 죽어가는 생명의 불꽃에 기름이 된다" 와인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다. 그런데 이런 그도 와인을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수원(water source)의 맛을 정화하고 향상기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에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는 *와인과 물의 비율이 적혀있는데 그만큼 와인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와인 1인분에 물 20인분의 비율이 언급되어 있으나, 다른 문헌에서는 와인 1인분에 물 3~4인분 가까이 넣었다고 한다. 와인을 희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나무 진액, 향신료, 레몬, 심지어 바닷물까지 첨가했다고 한다.
현대의 그리스 와인
최근 그리스는 2015년 국가 재정 위기를 겪으며, 소득 경색으로 인해 내수 시장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내수 시장에 의존했던 그리스 와인 생산자들은 수출을 부수적인 활동으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최근 6년간 그리스 와인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 시장에도 2014년부터 정식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2014년 59,000 USD로 시작하여 2019년과 2020년에는 수출량이 231,000 USD로 4배 정도 성장했다. 아직 그리스 와인이 한국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가는 시기이지만, 그리스 와인의 좋은 품질 덕분에 그 미래가 아주 밝다.
아티카로 떠난 그리스 와인 팸투어(Familiarisation Tour)
2022년 11월 19일~24일, 유럽연합과 그리스 정부에서 한국의 와인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그리스 와인 팸투어(Familiarisation Tour)를 진행했다. 5박 6일 동안 아주 집중도 높게 그리스 아티카 (Attica) 지역의 와인을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스 신화의 성지, 아테네를 품은 아티카 PGI Attiki/ Attica
센트럴 그리스 지역에 위치한 아티카(Attica / Attiki)는 아틱 반도 (Attic Peninsula)라고도 불리는데 북서부 지역을 제외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와인 산지로 이동하며 창문 너머로 본 아티카의 지형은 평지부터 작은 언덕과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와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진 것이 충분해 보였다. 아티카의 일부 지역은 미네랄이 많아 곧 유네스코에 등재될 예정이라고도 한다.
아티카 지역은 전형적인 더운 지중해성 기후로 가장 클래식한 사바티아노를 재배하는 메소야 평원(Mesogaia/ Mesogeia plains)이 있는 PGI 아티키(Attiki), 에우보이아만(Gulf of Euboea) 남부와 가까워 바람이 많이 부는 PGI 마르코푸로(Marcopolou) 그리고 대륙성 영향을 받은 지중해성 기후의 PGI 슬로프 오브 끼떼로나스(Slope of Kiteronas)로 나뉜다. 세 지역 모두 사바티아노를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생산자마다 각기 다른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곳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경사진 언덕에서 포도를 재배하는데 평균 포도밭의 크기가 0.9 헥타르이고, 0.5 헥타르의 작은 포도밭도 아주 많다. 그만큼 다양한 지리 조건에서 포도가 수확되고, 이 때문에 수확은 5주에 걸쳐 매일매일 포도의 맛, pH, 산도를 확인한 후 진행된다. 0.5헥타르 같은 아주 작은 포도밭이 많아, 생산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포도밭별 수확시기를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작은 언덕이라 기계수확을 하기 어려운 지형이며, 부쉬바인/고블렛(Bush Vine/Goblet Training)이 80%를 차지하기 때문에, 대부분 손수확을 하여 포도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한다.
우리가 방문한 11월의 아티카는 영상 섭씨 15도에 뜨거운 햇살을 자랑하며 건조한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다. 이 지역은 성장 기간에도 더운 지중해성 기후에 강수량도 적어 질병의 가능성이 작아 유기농 포도 재배를 하기 아주 적합하고 건강한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
평균 수령 60년이 넘는 올드 바인
척박한 석회질의 토양과 건조한 기후로 인해 부쉬바인/고블렛의 뿌리는 필요한 물과 양분을 얻으려 하위 토양으로 10~12미터 정도까지 깊이 내려간다. 상위 토양은 대부분 석회암과 석회질 점토 토양이 주로 발견되는데, 하위 토양에는 편무암이 발견되기도 한다. 수확량은 헥타르당 28~35헥토리터로 제한하기 때문에 아주 농축되고 깊이 있는 복합미를 가진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현지인들과 관광객을 사로잡은 사바티아노 Savatiano
다채로운 양조 스타일과 다양한 떼루아가 그대로 전부 표현되어 마치 하얀색 도화지 같은 사바티아노. 대부분 단일 품종으로 생산되는데, 아티카 지역 포도 생산량의 압도적인 89%를 차지하고 있어 ‘왕(King)’으로 불린다. 전통적으로는 나무의 송진을 넣어 함께 알코올 발효해 만든 레치나(Retsina)를 많이 생산했지만, 낮은 품질 때문에 명성이 높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아티카 와인을 개척하고자 나선 생산자들은 1990년부터 지속적인 연구와 시도를 통해 와인의 품질을 개선하고 경쟁력 있는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와인을 오랫동안 접해본 일행은 “15년 전 마셔본 그리스 와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굉장한 발전을 이룬 것이 보인다”라고 전할 정도였다.
현재 아티카의 생산자들은 현대식 와인 양조와 기술을 접목해 각자의 스타일대로 사바티아노 포도의 잠재력을 마음껏 살려내고 있다. 배럴 숙성,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숙성, 앙금 숙성, 스킨 컨택 등을 통해 여러 가지 표현을 해내는데, 조금 늦게 수확해 멜론과 바나나 같은 열대과일의 향과 꿀 향이 넘치는 와인부터 조금 일찍 수확해 향긋한 허브향과 짭짤한 미네랄 향이 복합적으로 발현된 와인, 5년에서 10년 이상 숙성해 마치 장기 숙성한 헌터 밸리 세미용이나 리슬링 같은 페트롤, 견과류, 미네랄 향이 풍부한 와인까지 생산한다. 이 중, 2015년에 수확하고 병입한 와인을 2022년에 출시한 생산자가 있는데,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와인을 숙성했는데도 와인이 복합미가 발현되며 진화해 다시 한번 사바티아노의 숙성 잠재력을 입증하였다.
고대의 유산, PGI 레치나 오브 아티카(PGI Retsina of Attica)
팸투어 마지막 날인 23일, 마스터 오브 와인 콘스탄티노스 라자라키스(Konstantinos Lazarakis MW)의 PGI 레치나 와인 마스터 클래스가 그가 설립한 아테네 WSPC 와인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투어 내내 여러 스타일의 레치나 와인을 테이스팅해 보았기 때문에 그의 통찰이 더 궁금했는데, 레치나 와인의 역사부터 스타일, 양조 방식과 음식 페어링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고대에 오랜 항해 동안 와인이 상하거나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와인의 천연 보존제인 송진으로 항아리를 밀봉했는데, 이 와인을 레치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열등한 품질의 산화된 와인에 송진을 더해 만든 와인이기 때문에 저품질의 이미지를 벗어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치나의 전통을 이어가고픈 현대의 생산자들은 품질 개선에 굉장한 노력을 하여, PGI 레치나 오브 아티카(PGI Retsina of Attica)를 만들어 투박한 나무 향이 아닌 우아한 송진 향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는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아테네에 오는 관광객들은 꼭 한 번쯤 마셔보는 와인이 되었다.
우수한 레치나는 와인의 과일 풍미를 보완하거나 심지어 더 향상해주는 소나무, 세이지, 로즈메리, 매스틱 검(Mastic gum), 생강 등의 풍미가 조화롭게 결합하여, 와인의 향을 좀 더 산뜻하게 올려주고 복합성을 더해 주었다. 이날 우리는 10가지의 레치나를 테이스팅했는데, 생산자마다 정말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송진향이 지배적으로 나는 전통적인 스타일에 가까운 레치나, 레치나 향이 아주 우아하고 조화롭게 나는 스타일, 산뜻하게 솔향이 올라오는 스파클링 레치나, 자연 효모를 써 좀 더 펑키(Funky)한 스타일 그리고 마치 뱅 죤(Vin Jaune)이나 피노 셰리(Fino Sherry)처럼 산화된 스타일의 복합적인 스타일까지 아주 다양했다. 현재 와인법상 빈티지는 표기할 수 없지만, 숙성 잠재력이 있는 스타일들도 있다고 전했다.
레치나는 생산 방식이 아주 특이한데, 포도즙 발효 전 또는 도중에 알레포 소나무의 송진을 넣어 만든다. 규정상 송진의 양은 알콜 발효 중 전부 분해될 양인 100 리터당 1kg로 줄였는데, 요즘은 훨씬 더 적은 양의 신선한 상태의 송진을 넣어 포도의 풍미와 조화로운 향이 나도록 한다. 포도는 대부분 사바티아노를 사용하지만, 핑크색 껍질의 로디티스(Roditis)도 사용할 수 있다.
솔향이 나는 와인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음식과 페어링을 하며 즐기면 그 경험이 더 극대화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음식과 레치나의 마리아쥬
지중해 국가인 만큼 다양한 해산물이 많은 그리스. 콘스탄티노스 라자라키스MW는 그리스 음식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풍미를 이야기하며, 톡 쏘는 송진 향이 마치 팔렛 클렌저처럼 신선함을 선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식 샐러드, 올리브 오일과 레몬 또는 식초를 곁들인 소금에 절인 앤초비, 생선튀김, 잘 구운 빵에 바른 어란, 올리브 오일 레몬 소스를 곁들인 도미구이 등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전했다.
그리스인의 삶에 스며든 와인
그리스인들은 누군가가 와인을 마시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므로 그를 믿지 말라고 했고, 너무 많이 마시면 야만인(Bavarian)이라고 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 그들의 삶과 문화를 함께했던 포도주, 와인. 아테네 시내에서 항상 삼삼오오 둘러앉아 와인을 앞에 두고 천천히 대화하는 그들을 보며 여유를 배우고 문화를 배웠다. 그리스 3대 석학,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더 대왕까지 즐겨 마신 와인. 우리도 그리스 와인을 마시며 그들이 어떤 대화를 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글•사진 천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