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이 반짝이는 로제 샴페인엔 어떤 소원이라도 이뤄질 것 같은 로맨틱함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어쩐 일인지 이 핑크빛 버블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화이트 샴페인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입맛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이는 ‘샴페인’이라 하면 기대할 만한 미묘하고 고급스러운 풍미를 잘 표현한 로제 샴페인이 흔치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샴페인의 세계에서 그 어느 샴페인에도 밀리지 않을 굉장한 로제 샴페인이 등장했다. 로제 와인 최초로 와인 스펙테이터 100대 와인에 등재된 프로방스 로제 와인 ‘미라발(Miraval)’의 샴페인 버전이랄까. 앞서 얘기한 로제 샴페인의 모든 단점을 부정하며 ‘로제 샴페인의 새로운 장’으로 우리를 초대한 이 샴페인의 이름은 ‘플뢰르 드 미라발(Fleur de Miraval)’. 지난 5월 2일(수) 와인메이커 알렉시 블론델(Alexis Blondel)의 방한을 기념하여 열린 디너에서 플뢰르 드 미라발의 짧고도 강렬한 여정을 따라가 봤다.
피트, 페랑, 페테르 - 3p의 주인공들
샴페인 플뢰르 드 미라발은 2015년 비밀리에 시작된 프로젝트다. 목표는 오직 세계 최고의 로제 샴페인을 만드는 것. 이미 프로방스에서 프리미엄 로제 와인인 미라발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Brad Pitt)와 페랑(Perrin) 가문의 두 번째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샴페인 병에는 세 개의 ‘P’로 이루어진 일명 ‘3P’ 로고가 있는데, 플뢰르 드 미라발을 만든 3개의 축인 브래드 피트, 페랑 가문, 와인메이커 로돌프 페테르(Rodolphe Peters)의 공통 이니셜인 'P’를 모은 것이다. 로제 샴페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은 브래드 피트. 이후 페랑 가문의 5대손 마크 페랑(Marc Perrin)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오랜 친구인 샴페인 생산자 로돌프 페테르와 손을 잡았다. 샴페인 하우스 피에르 페테르(Pierre Peters)의 수장 로돌프 페테르는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의 최고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로제 샴페인을 만드는 데 블랑 드 블랑 샴페인 전문가와 협업하다니, 다소 의아한데 와인메이커 알렉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UFO처럼 확인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프랑스 남부의 와인 명가 페랑 가문과 블랑 드 블랑으로 정평 난 로돌프 페테르가 만나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으로 로제 샴페인을 만들고자 했다.” 뻔한 것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3P 로고에서 반짝인다.
피노 누아의 젊음과 샤르도네의 연륜이 만나
뼈대 있는 남부 론 와인 가문과 헐리웃 스타,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의 권위자가 “세계 최고의 로제 샴페인”을 목표로 만든 샴페인인 만큼 양조법도 범상치 않다. 품종은 코트 드 블랑(Cote de Blanc)에서 자란 샤르도네 75%와 피노 누아 25%. 플뢰르 드 미라발은 독특한 방식으로 두 품종의 각기 다른 특성을 끌어내는데, 우선 매해 수확한 피노 누아 포도로는 세니에 방식의 로제 와인을 만든다. 로제 샴페인을 만드는 보통의 방식처럼 화이트 와인에 레드 와인을 블렌딩하지 않고, 포도를 침용하여 컬러를 뽑아내는 세니에 방식은 조금 더 신선하고 날 것 그대로의 피노 누아 풍미를 살리기 위함이다.
반면 샤르도네는 플뢰르 드 미라발의 숙성미를 강조한다. 이는 잘 익은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을 좋아하는 로돌프 페테르와 마크 페랑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블렌딩 되는 75%의 샤르도네 중 50%가 2007년부터 로돌프 페테르의 셀러에서 솔레라 방식으로 숙성되어 온 퍼페추얼 리저브다. 나머지 25%는 흐미정 세끌(Remise en Cercle)이라는 독특한 양조법을 취하는데, 병입 숙성된 올드 빈티지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을 탱크에 부어 기포를 모두 날려낸 후 베이스 와인에 다시 추가하는 방식이다. 2000, 2002, 2004, 2006, 2008과 같은 최고의 올드 빈티지 샴페인을 사용하며, 기술적으로 한 번의 발효와 숙성을 더 거침으로써 풍부함과 복합미, 고급스러운 질감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25%의 신선한 피노 누아 로제 와인과 50%의 퍼페추얼 리저브 샤르도네 와인, 25%의 흐미정 세끌 블랑 드 블랑이 블렌딩 된 플뢰르 드 미라발은 이후 3년의 병입 숙성을 거친다. 첫 번째 에디션 피노 누아의 수확 연도인 2016년을 기준으로 매년 출시된 플뢰르 드 미라발은 ER(Exclusivement Rose)1, ER2, ER3로 구분된다. 알렉시는 각 빈티지의 캐릭터 차이에 대해 “피노 누아의 베이스를 어떤 것을 썼는지, 그리고 흐미정 세끌에 사용된 올드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의 빈티지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에디션에 따른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최고의 로제 샴페인을 만든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알렉시 블론델과 함께 시음한 와인들
뮤즈 드 미라발 Muse de Miraval
샴페인 플뢰르 드 미라발의 뿌리가 닿아 있는 프로방스의 로제 와인 브랜드, 미라발의 최상위 와인이다. 알렉시는 “눈을 감고 시음해 보면 로제인지 화이트인지 오묘한 느낌을 받을 거다. 10년 정도 숙성하면 견고한 화이트 와인의 캐릭터가 보다 선명해질 것으로 전망한다”라고 뮤즈 드 미라발을 소개했다. 경작이 좋은 해에만 매그넘 사이즈로 2,000~3,000병 한정 생산된다 한다. 국내 미수입 와인이지만 이번 디너를 위해 특별히 공수되었는데, 알렉시는 “우리는 행사의 시작을 뮤즈 드 미라발로 하는 것을 즐긴다. 페랑이 로제를 워낙 잘 만들기도 하고, 프로방스의 미라발 프로젝트가 샴페인 플뢰르 드 미라발로 이어진 것이므로 첫 잔으로 제격이라 생각한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가벼운 오크 숙성이 가미된 와인으로, 체리, 복숭아, 멜론, 수박의 아로마와 프로방스 허브, 은은한 스파이스가 더해진 우아한 풍미가 펼쳐진다. 풍만하면서도 산뜻한 미감, 긴 여운이 남는 산미에서 남프랑스의 따사로운 햇살이 입안에 내려앉는 듯하다.
플뢰르 드 미라발 ER3 Fleur de Miraval ER3
ER3는 가장 최근에 나온 플뢰르 드 미라발이다. 베이스 피노 누아는 2018, 흐미정 세끌에 사용된 블랑 드 블랑 샴페인은 2000, 2009 빈티지이다. 알렉시가 작년 샴페인 하우스에 합류한 후 처음 출시된 에디션으로 그에게는 ‘자식 같은 와인’일 텐데, “크리미한 부드러움이 아주 잘 표현된 로제 샴페인이다. 올드 빈티지 샤르도네의 고소함을 느껴보길 바란다”라며 테이스팅을 이끌었다.
알렉시의 설명처럼 아몬드와 호두 껍질의 쌉사름한 고소함이 옅게 깔리며, 석류, 작은 레드 베리류의 아로마와 허브, 효모의 잔향이 입안에 남는다. 산뜻하면서도 풍부하고, 부드러운 버블감의 로제 샴페인이다. 눈을 감고 마시면 로제 샴페인인 것을 잊을 만큼 섬세하다는 면에서 앞서 시음한 뮤즈 드 미라발과 결을 같이한다.
플뢰르 드 미라발 ER2 Fleur de Miraval ER2
2017 빈티지의 피노 누아와 2004, 2006 빈티지의 블랑 드 블랑을 흐미정 세끌에 사용했다. 디너 코스의 두 번째 애피타이저에 나온 ER2를 두고 알렉시는 “조금 더 볼륨감 있는 버전의 플뢰르 드 미라발이다. 고기와도 잘 어울리므로, 잠시 뒤 메인으로 나올 안심 스테이크에도 반드시 페어링해 보길 바란다”라고 소개했다.
그의 추천대로 ER2는 안심 스테이크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는데, 피노 누아 캐릭터가 좀 더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강렬한 레드 베리와 체리, 블러드 오렌지의 풍미에 견과류 캐릭터가 균형을 잡아 주었다. 버블까지 힘이 넘치는 풀바디 로제 샴페인이다.
샤또 드 보카스텔 오마주 아 자크 페랑 2009 Chateau de Beaucastel Hommage a Jacques Perrin 2009
두말 필요 없는 남부 론의 상징 ‘샤또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의 최상급 와인이다. 페랑 가문이 소유한 샤또 드 보카스텔에서 가장 좋은 빈티지에 가장 좋은 포도밭에서만 생산한다. 이번 디너를 위해 알렉시가 직접 가져온 보틀로, 그는 “샤또네프 뒤 파프에 보통 메인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무르베드르를 메인으로 사용한, 굉장히 희소한 와인이다. 작년에 수확을 마치고 와이너리에서 1973 빈티지의 오마주 아 자크 페랑을 마셨다. 49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충분했다”라며 와인의 숙성력을 강조했다.
디너에 나온 와인 역시 2009 빈티지이지만 강렬한 집중력과 힘을 보여줬다. 야생 동물, 가죽, 초콜릿, 후추, 모렐 버섯 등의 부케에 블랙베리, 블랙 체리의 꽉 찬 과실미가 다층적으로 이어지며, 촘촘한 벨벳 탄닌과 긴 여운이 남는 풀바디 와인이다.
수입사 신동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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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자료·사진 제공 신동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