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렝저 라 그랑 아네 2015 빈티지의 화려한 데뷔탕트

Written by박 지현

‘화양연화(花樣年華)’

직역하면 ‘꽃 같던 시절’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의미한다. 2000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로 널리 알려졌고 음악과 영화 등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관용구. 요즘 말하는 ‘리즈 시절’과 비슷한 의미일까. 샴페인 하우스, 볼랭저(Bollinger)의 빈티지 샴페인, 라 그랑 아네(La Grande Année, 이하 ‘그랑 아네’)를 만날 때마다 ‘화양연화’란 단어가 떠오른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 해의 햇빛과 공기를 한 병에 고스란히 담아, 오랜 시간 뒤 우리를 찾아와 잠시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소환해 마주하게 해준다. 지난 4월 22일, 수입사 신동와인이 주최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새로운 그랑 아네 2015가 선보였다. 이 자리엔 가문을 대표해 방한한 6대손 시릴 들라뤼(Cyril Delarue, 아래 사진)가 참여해 이해를 도왔다.

볼렝저 가문의 6대손 시릴 들라뤼(Cyril Delarue)

팬데믹을 통과한 샴페인 시장

2019년에 2억 9,730만 병을 출하했던 샴페인 업계는 2020년에 '코로나19'라는 직격탄을 맞으며 가파른 매출 하락과 함께 생산량 감소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21년에는 예상치 못한 수요의 급상승으로 생산량이 무려 3억 2,000만 병, 2022년엔 더 늘어 3억 2,500만 병 이상을 기록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던 생산량이 2023년에 2억 9,900만 병으로 감소하면서 사실상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가격은 57억 유로(2021년)에서 60억 유로 이상(2023년)으로 늘어, 고급 샴페인을 원하는 소비층의 갈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외로 샴페인 판매의 붕괴가 심각하지 않았던 것은 “온라인 구매를 통해 와인 접근성이 좋아졌고, 레스토랑보다 저렴해 재구매율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볼렝저는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팬데믹 기간 중 빠른 출하나 가격 인상을 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고급 샴페인의 판매가 생산량 감소를 보완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품질에 올인하는 볼렝저의 전략은 매우 영리하고 유효했다. 사실, 시장은 오래전부터 고급 샴페인을 집요하게 요구해왔고, (촉이 남달랐던) 볼렝저는 오래전부터 그 요구에 응답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트렌드를 앞서 간 ‘볼렝저 방식’

1829년에 설립된 이후 오늘날까지, 볼렝저는 샴페인 하우스들 중 가족 소유로 경영되는 독립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또 다른 화두는 ‘지속 가능성’이다. 그동안 업계에 거세게 불어오던 친환경, 유기농 바람이 하필 샹파뉴만 비껴갔는지, 오랫동안 이 지역은 환경 문제에 관해 아웃사이더 입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현재 샹파뉴 포도밭의 41%가 지속 가능성 인증을 받았으며,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포도원의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일찌감치 포도원 환경에 많은 투자를 해온 볼렝저는 2012년 프랑스 농림부의 HEV(Haute Valeur Environnementale) 인증과 샹파뉴에서 지속 가능한 포도 재배(Viticulture Durable en Champagne)에 관한 인증을 차례로 획득했다. 2023년 9월엔 지난 2년 동안 공들였던,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하는 국제적인 B-Corp 인증을 받았다. 환경과 사회를 생각하며 역할을 다하는 기업으로 나아가는 볼렝저는 포도를 공급하는 오랜 파트너도 유기농 또는 VDC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협력하고 있다. 기후변화 때문에 양조 방식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높은 기온일 때 포도 숙성에 더 신경 써야 한다. 개화(開化)에서 결과(結果)까지의 생육 시기가 1980년대 100일인데 반해 지금은 80일이다. 일조량이 높은 남향 포도밭에서 매우 집중도 높은 포도를 생산하기 때문에 북향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와 블렌딩 하여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매년 극단적인 기후 변화를 경험하며 최상의 품질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

볼렝저의 자가 소유 포도밭은 180헥타르로, 포도밭 중 85%가 그랑 크뤼와 프르미에 크뤼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포도를 최소 60% 이상 사용한다. “유기농 포도 재배에 장기 투자를 하려면 직접 소유한 포도밭이어야 하며, 지속적인 품질 관리가 가능해진다”라며 하우스가 포도밭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와 중요성을 강조했다.

볼렝저 스타일과 정체성은 피노 누아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품종은 샴페인의 숙성 잠재력과 복합성에 기여하는데, 볼렝저가 추구하는 특징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어떤 품종보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볼렝저 포도원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블랑 드 누아의 인기를 볼 때, 볼렝저는 트렌드를 선도하는 감각을 타고난 게 아닐까 싶다.

생산자들은 시간의 힘을 잘 알고 믿는다. 장기 숙성이란 트렌드를 두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볼멘소리들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볼렝저는 장기 숙성의 선구자나 마찬가지로 원하는 품질을 얻기 위해 AOC 규정보다 두 세배 더 길게 숙성한다. 그랑 아네의 경우, (보통)최소 6년 숙성하는데 이번 2015 빈티지는 무려 7년 숙성 후에 출시했다.

샴페인의 또 다른 트렌드는 배럴 사용이다. 이미 내로라하는 샴페인 하우스들은 오크의 매력에 사로잡혀 배럴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볼렝저는 전통 방식을 따라 배럴을 사용했을 뿐인데 또 트렌드와 맞물렸다. “배럴 발효는 볼렝저의 시그니처며 핵심”으로 그랑 아네와 RD는 100% 배럴에서 발효한다. 다만 지나친 오크 풍미를 피하고자 부르고뉴에서 샤르도네를 양조했던 중고 배럴을 사용한다.

매그넘 리저브 와인(Magnums of Reserve Wines)은 “우리의 모든 노력은 이 리저브 와인을 만드는 것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볼렝저가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 중 하나. 향후 블렌딩을 위해 매년 생산하는 와인 중 일부를 보관하는데, 볼렝저는 그 일부를 매그넘 병에 보관한다. “리저브 와인 중 10%를 매그넘에서 숙성한다. 발효 후 6~8개월 동안 중고 배럴에서 숙성하는데 리(lees) 생성을 위해 리퀴르 드 티라주(Liqueur de Tirage)을 추가하여 매그넘으로 옮긴다. 5~20년의 리 컨택 과정을 거친 후 내추럴 코르크로 밀봉한다. 큰 사이즈 탱크에 비해 매그넘 사이즈는 미세 산소화(micro oxygenation)에 유리하다. 이때 내추럴 코르크는 미세 산소화 효과를 더해준다”라고 설명했다. 지하 셀러에는 거의 100만 개에 달한다. 스페셜 퀴베와 로제 샴페인을 블렌딩할 때, 리저브 와인의 블렌딩 비율은 거의 50%이며, 그중 5~10%는 매그넘 병에서 5~15년 숙성된 리저브 와인을 사용한다. 거의 미쳤다고 할 수도 있지만, 1890년 이후로 시작된 이 방식은 “보통 탱크에서 숙성되는 일반 샴페인과 다른 볼렝저의 개성과 변함없는 품질을 약속하는, 범접할 수 없는 볼렝저 스타일”을 만들었다.

드디어 그랑 아네 2015

2015 빈티지의 주제는 ‘그랜드 캐노피(The Grand Canopy)’. 하우스의 역사와 함께 한 가문 소유의 숲에서 받은 영감이 그랑 아네 2015를 탄생시킨 기반이 되었다. 울창하고 고요한 숲에 들어가면 약 200년 된 나무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2015년부터 이 나무들은 볼렝저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은 배럴로 재탄생하고 있다.

2015년 샹파뉴는 서늘했던 2014년과 달리 2003년 수준의 높은 기온과 풍부한 일조량을 기록했다. 온화하고 습한 겨울을 보낸 후 5월부터 매우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런 극한 날씨에 일부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물 부족 스트레스를 겪기 마련인데, 그랑 크뤼 포도밭으로 등급이 올라갈수록 물을 흡수하고 잘 간직하는 석회의 비율이 높아 물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바로 그랑 크뤼와 프리미에 크뤼 포도밭의 포도만을 사용하는 볼렝저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9월 4일부터 수확을 시작했고, 평균 잠재 알코올 도수는 10.5%로 측정되었다. 신선한 산도를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와 노하우가 더 요구되었고, 마침내 활기찬 산도를 가진 화려하고 과일향이 강한 와인이 탄생했다.

그랑 아네 2015는 베르제네(Verzenay), 아이(Aÿ) 그리고 마를레일-쉬르-아이(Mareuil-sur-Aÿ)에서 수확한 피노 누아 60%와 슈이(Chouilly)와 아비즈(Avize)의 샤르도네 40%로 구성된 23개의 크뤼를 블렌딩했다.

라 그랑 아네 2015(La Grand Année 2015)

  • 피노 누아 60%, 샤르도네 40%
  • 그랑 크뤼 79%, 프르미에 크뤼 21%
  • 100% 배럴 발효
  • 도사주 리터당 8g

진한 금색을 띠고 있으며, 보기에도 거품의 크기는 자잘하다. 향의 강도는 중상 정도로, 흰 꽃, 익은 사과, 식빵, 베이킹 스파이스, 바닐라, 나무, 꿀,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일의 향도 나타난다. 입 안에서 또 한 번 놀라게 하는데, 처음 혀에 닿는 느낌은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삼키면 중상의 산도가 목젖을 찌르고, 무게감도 느껴진다. 감귤과 열대 과일의 향도 나는 듯하다. 당도와 산도의 균형이 훌륭하고, 질감은 실크처럼 매끄럽다. 여운에선 아몬드 초콜릿의 풍미가 이어진다.

라 그랑 아네 로제 2015(La Grande Année Rosé 2015)

  • 피노 누아 63%, 샤르도네 38%
  • 그랑 크뤼 81%, 프르미에 크뤼 19%
  • 100% 배럴 발효
  • 도사주 리터당 7g

이 로제 샴페인이 특별한 이유는 아이에 위치한 그랑 크뤼 포도밭인 '라 꼬뜨 오 장팡(La Côte aux Enfants)'에서 생산되는 레드 와인을 5% 추가했기 때문이다. 이 레드 와인은 자매 회사인 부르고뉴의 '도멘 샹송(Domaine Chanson)'의 조언을 받아 전송이 발효법(Whole-Bunch Fermentation)을 적용하여 만들었다. 이 방법 덕분에 색깔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면에서도 깊이를 더해준다. 진한 연어알 색을 띠고 있으며, 딸기, 야생 베리, 모과, 오렌지, 빵, 아몬드, 나무의 향이 느껴진다. 첫 모금은 부드럽지만, 여운에선 강렬하고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삼킨 후에는 호두를 넣은 라즈베리 아이스크림의 맛이 떠오르며 탄닌의 존재감이 미묘하게 드러낸다. 끝까지 신선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샴페인.

창립 200년을 앞둔 볼렝저의 역사에서 “1884년 영국 왕실인증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은 후 지금까지 유지해왔고 1979년 영화, 007 시리즈 문레이커(Moonraker)에 볼렝저가 등장”하면서 샹파뉴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고 들라뤼는 밝혔다. 게다가 프레스티지 샴페인 RD(Recently Disgorged, 최근 데고르주망했다는 뜻)를 처음 만들었던 볼렝저의 레이디, 엘리자베스 볼렝저 또한 화려한 행보에서 빼놓을 수 없다. 볼렝저 샴페인을 마신다는 것은 볼렝저의 위대한 유산을 만나는 것이며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수입사 신동와인
▶홈페이지 shindongwine.com
▶인스타그램 @shindongwine

박지현 자료 제공 신동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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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4년 05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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