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루쪼 와인이 줄 수 있는 모든 감동, 마라미에로

Written by신 윤정

아브루쪼(Abruzzo)는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을 논할 때 먼저 거론되는 지역은 아니다. 피에몬테와 토스카나라는 양대 산맥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베네토와 캄파니아에서도 아마로네나 타우라지를 앞세워 프리미엄 와인 산지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질서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와인 생산자가 있으니, 바로 아브루쪼의 마라미에로(Marramiero) 와이너리다. ‘천국과 같은 지옥의 레드 와인’으로 불리는 인페리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 리제르바(Inferi Montepulciano d’Abruzzo Riserva)가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Concours Mondial de Bruxelles)에서 왕중왕으로 전 세계 최고의 레드 와인 자리에 오르며 존재감을 알린 한편, 최상급 와인인 단테 마라미에로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Dante Marramiero Montepulciano d’Abruzzo)는 휘몰아치듯 강렬한 풍미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숙성력으로 와인 애호가들을 유혹해 왔다. 지난 6월 24일(월), 와인의 생명력만큼이나 오래, 근 40년을 마라미에로에 몸담아 온 와이너리의 총괄 이사 안토니오 끼아바롤리(Antonio Chiavaroli)가 방한하여 버티컬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마라미에로 와이너리의 총괄 이사 안토니오 끼아바롤리(Antonio Chiavaroli)

마라미에로에 바친 인생

마라미에로 가문과 처음 연을 맺었을 때 안토니오의 나이는 21세였다. 테이스팅에 앞서 “인생을 마라미에로에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내년 9월이면 꼬박 40년을 근속한 셈이 된다. 한 와이너리에서 오래 몸담을 수 있었던 비결을 “인내심과 와인에 대한 사랑”으로 꼽긴 했지만, 와이너리의 설립자인 단테 마라미에로(Dante Marramiero)와의 인연도 못지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갓 성인이 된 21세 청년에게 마라미에로 가문의 주축이었던 단테 마라미에로는 리더이자 멘토, 그리고 두 번째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만큼 와이너리 운영에 대한 철학적인 부분이나 삶을 대하는 자세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 지금도 아침마다 단테 마라미에로를 생각하며 하늘에 감사 인사를 올린다는 안토니오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마라미에로 와이너리의 설립자 단테 마라미에로(Dante Marramiero)

20세기 초부터 포도를 재배해 온 농가에서 태어난 단테 마라미에로는 어느 날 가족의 포도밭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다 멋진 와이너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당시 가문의 포도밭에 있던 포도나무를 엄선하여 새로운 땅에 심는 방식으로 포도밭을 확장해 나갔고, 안토니오와 같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과 함께 와이너리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시간이 흘러 와이너리가 설립된 것은 1993년, 수술차 파리로 갔던 단테 마라미에로가 다시 아브루쪼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은지 1년 뒤였다. 이후 ‘인페리’가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에서 Best of Best에 오르며 마라미에로 와이너리는 프리미엄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의 일인자로 떠올랐고, 와이너리 설립이라는 꿈을 코앞에 두고 눈 감은 설립자를 기리는 와인 ‘단테 마라미에로’로 그랑 크뤼에 버급가는 몬테풀치아노를 생산해 냈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현재는 단테의 아들인 엔리코 마라미에로(Enrico Marramiero)와 총괄 이사 안토니오 끼아바롤리가 협력하여 와이너리를 운영한다. 이들이 만든 와인은 굉장히 집중도가 높고 에너지가 넘치는데, 어디엔가 단테 마라미에로가 남긴 이 말이 새겨져 있는 듯하다. “당신의 일을 배신하지 말고 진심을 다해 원하고 사랑하라. 당신은 그 안에서 항상 신뢰와 마음의 평화, 행복을 찾을 것이므로.”

아드리아해의 바람을 맞고

마라미에로 와이너리가 있는 곳은 아브루쪼의 소지역인 로시아노(Rosciano)다. 아드리아해(Adriatic Sea)와 아페닌산맥(Apennine Mountains) 사이의 언덕진 지역으로, 바다와 산을 품고 있어 미세기후의 좋은 영향을 받는 곳이다. 마라미에로가 소유한 포도원은 총 네 개. 먼저 20세기 초부터 가문이 소유해 왔고 해발 고도 300m에 자리한 산트안드레아 에스테이트(Sant’Andrea Estate)가 있다. 몬테풀치아노가 잘 자라는 점토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어 약 30헥타르의 포도밭 중 24헥타르가 몬테풀치아노다. 마라미에로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의 포도나무들은 새로운 포도밭을 확장할 때 모체가 되었다. 다음으로 밀라노 에스테이트(Milano Estate)가 있다. 산트안드레아 에스테이트에서 불과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포도원으로, 기본적으로 점토 토양이지만 화이트 품종에도 유리한 미세기후가 있어 몬테풀치아노 15헥타르와 페코리노 6헥타르를 재배한다. 트라투로 에스테이트(Tratturo Estate)는 산트안드레아와 같이 마라미에로의 역사를 반영하는 곳이다. 해발고도 200미터의 평지에 있어 일조량이 풍부한 이곳에서는 3헥타르 규모의 트레비아노 포도나무가 자란다. 마지막은 아마렐로 에스테이트(Amarello Estate). 앞서 설명한 세 포도원이 있는 로시아노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오페나(Opena)에 있다. ‘아브루쪼의 오븐(Forno d’Abruzzo)’으로 불릴 만큼 높은 여름철 온도가 특징. 피노 누아에 적합한 석회질로 이루어진 토양이라 아브루쪼의 전통 품종인 몬테풀치아노와 트레비아노 외에 피노 누아도 재배된다. 마라미에로의 모든 포도밭에는 중부 이탈리아답게 뜨거운 태양이 내려앉지만 안토니오는 “아드리아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포도밭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덕분에 여름철 높은 기온을 식혀준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브루쪼의 프리미엄 화이트 와인이란

몬테풀치아노 와인으로 대표되는 아브루쪼 지역에서 화이트 와인은 주연이 아니다. 물론 트레비아노 품종이 널리 재배되긴 하지만 주로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스타일의 와인이라 ‘프리미엄’과는 더욱이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이번 테이스팅에서 만나본 마라미에로의 두 화이트 와인에는 ‘프리미엄 화이트 와인’의 뱃지를 거침없이 달아주고 싶다. 첫 번째로 테이스팅한 와인은 마라미에로 페코리노 아브루쪼(Marramiero Pecorino Abruzzo) 2021. 페코리노 포도를 송이째 냉침용 후 부드럽게 압착하여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했고, 이후 4개월의 숙성을 거쳐 병입했다. 페코리노 품종의 순수한 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오크 숙성은 하지 않았다. 열대 과일과 복숭아, 망고, 멜론 등의 풍부한 과일 아로마에 독특한 스파이시 노트가 더해지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유질감과 레모니한 산미가 돋보인 와인. 안토니오는 “코에서 바로 느껴지는 미네랄리티”를 이 와인의 특징으로 꼽았다. 두 번째 와인은 알타레 트레비아노 다브루쪼(Altare Trebbiano d’Abruzzo) 2021였다. 송이째로 긴 침용 후 압착하여 프렌치 바리크에서 발효했고, 다섯 가지 오크통에서 숙성하여 구조감과 복합미를 더했다. 숙성 기간은 총 18개월. 고소한 깨 볶는 향이 먼저 마중 나오고 노란 사과, 감귤, 복숭아 등의 과일 아로마와 요거트, 바닐라, 견과류 등이 크리미하게 펼쳐지는 화려하고 우아한 와인. 안토니오는 알타레 트레비아노 다브루쪼를 고급 부르고뉴 블랑에 비유하여 “20년 이상도 숙성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왼쪽부터) 마라미에로 페코리노 아브루쪼, 알타레 트레비아노 다브루쪼, 단테 마라미에로, 단테 마라미에로 아쿠아비떼

명상을 위한 와인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설립자를 오마주한 와인 단테 마라미에로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의 버티컬 테이스팅이었다. 설립자를 기리는 마음을 담은 만큼 마라미에로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 중 최상급이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완성된다. 소요되는 시간은 10년. 몬테풀치아노 포도를 엄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여정은 프렌치 바리크와 가니메데 탱크(Ganimede Tanks)에서 긴 침용과 함께하는 발효 과정, 그리고 다섯 종류의 오크통에서 이루어지는 오랜 숙성으로 이어진다. 병입 후 또다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 10년이라는 시간을 채우고야 비로소 출시되는 것. 안토니오는 “굉장히 좋은 해에만 생산되는 와인”인 점을 강조하며, “10년이 될 때까지 숙성하며 컨디션을 계속 체크하는데, 기준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는다면 출시를 아예 하지 않는다”라고 부연했다. 설립자 단테 마라미에로의 명성에 어울릴 만한 와인만 단테 마라미에로로 출시한다는 안토니오의 의지와 자부심이 엿보이는 대목. 그만큼 특별함이 가득한 단테 마라미에로는 이번 행사에서 총 네 개 빈티지로 만나볼 수 있었다.

단테 마라미에로의 이니셜 'D'와 'M'으로 구성된 각인

안토니오와 함께 테이스팅한 단테 마라미에로는 1998부터 5년 간격으로 2003, 2008, 2013 등 총 네 개 빈티지였다. 1998은 첫 빈티지이며 2013은 최신 빈티지다. 1998 빈티지의 경우 말린 자두와 체리, 데이츠, 초콜릿, 캬라멜의 달콤한 향에 버섯과 나무, 향신료의 향이 더해져 파워풀하게 퍼져 오르며, 촘촘한 타닌과 중간 이상을 감도는 산미가 올빈의 매력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테이스팅한 와인은 2003 빈티지. 블랙베리와 초콜릿, 버섯, 숲, 허브의 향이 조금은 정제된 듯 차분하게 전해졌는데, 이 차분함이 오히려 긴 숙성력을 예견하는 듯했다. 이어서 테이스팅한 단테 마라미에로 2008은 신선한 블랙베리와 검은 자두, 허브, 민트, 초콜릿의 향에 빳빳한 타닌과 중간 정도의 산미, 도톰한 질감이 안정적으로 어우러져 졌다. 마지막은 가장 최근에 출시된 (그럼에도 영빈은 아닌) 2013 빈티지의 단테 마라미에로. 졸인 과일과 꽃, 향신료, 블랙 올리브의 풍부한 향에 탄탄한 타닌과 산미가 조화를 이루었다. 안토니오는 특히 단테 마라미에로 1998과 2003 빈티지에 대해 “음식을 위한 와인이 아닌 명상을 위한 와인”으로 표현했다. 입안에서 와인의 잔향이 10분 이상 이어지므로 와인만 즐겨도 충분하다고. 와인을 마시다 보면 음식에 곁들이는 게 아쉬운 와인이 가끔 있는데 단테 마라미에로가 그런 와인이 아닐까? 와인 그 자체로도 사색에 잠기게 하는 와인, 많은 영감을 주는 그런 와인 말이다. 여기엔 물론 안토니오가 언급한 1998 & 2003 빈티지 외에도,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명상을 위한 와인으로 발전해 갈 2008 & 2013 빈티지도 틀림없이 포함될 것이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순수함

앞서 설명했듯 단테 마라미에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 품질의 몬테풀치아노 포도가 엄선된다. 긴 침용과 발효 후 단테 마라미에로를 위한 와인을 압착하고 나면 포도 찌꺼기에도 와인의 캐릭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는데, 이것을 증류하여 만든 그라빠가 단테 마라미에로 아쿠아비테(Dante Marramiero Acquavite)다. 최고 품질의 와인을 만든 부산물로 또다른 최고 품질의 그라빠를 생산하는 것. 마라미에로 와이너리는 이 공정을 가장 잘 다룰 적임자로 증류주의 거장 카를로 고베띠(Carlo Gobetti)로 낙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많은 아티장 증류소가 그러하듯 불연속적 중탕 방식(Bain-Marie Method)으로 증류하여 55~65%의 알코올 도수에도 풍성한 아로마를 추출해 낸다. 아로마틱 에센스나 증류수의 첨가 없는 순수한 증류 원액임에도 아로마틱한 캐릭터를 곱게 뽑아내는 것이다. 실제로 만나본 아쿠아비테는 알코올 도수 63.8%의 강렬함이 한 차례 미각을 강타하고는 이내 은은한 과일과 꽃, 허브의 아로마가 우아하게 이어졌다. 단테 마라미에로 와인이 그러하듯, 입안에 한 방울 올리면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잔향이 길게 남는 그라빠. 여기에도 설립자 단테 마라미에로를 기리는 마음이 담겨 있으리라.

버티컬 테이스팅에서 시음한 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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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주)와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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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4년 0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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