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황금빛 버블이 가득한 샴페인을 투명한 유리잔에 가득 담아 향기를 맏고 있노라면 마치 햇살 좋은 아침, 파리의 거리에서 나를 설레게 해주던 크루아상의 향이 떠오른다. 샴페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했을 그 황홀감. 그 경험을 더 깊게 탐구해 보고 싶다면, 꼭 마셔봐야 할 와인이 있다. 샴페인의 정수라고 불리는 생산자들이 몰려있는 몽타뉴 드 랭스의 ‘마이(Mailly)’라는 70헥타르의 작은 지역에서 다양한 떼루아를 활용하여 그들만의 색깔이 담긴 뀌베를 만들어 내는 '마이 그랑 크뤼(Mailly Grand Cru) 샴페인이 그 주인공이다. 마이 그랑 크뤼 샴페인의 해외 수출 매니저이자 와인에 인생을 바쳐온 발레리 아그론(Valérie Aigron)이 서울 잠실에 위치한 국순당 본사에 방문하여, 마이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기를 기회로, “마이 그랑 크뤼 Mailly Grand Cru”
600년 동안 프랑스의 왕 27명의 왕위 계승식을 해온 역사가 살아있는 랭스 성당(Reims Cathedral)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피노 누아의 천국’이라는 ‘마이’가 있다. 발레리는 마이가 그랑 크뤼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마이 그랑 크뤼' 샴페인 하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00년대 초반, 마이 샴페인의 탄생은 1900년대 초반의 암울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포도 재배자들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 샹파뉴의 포도 재배자들은 경제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큰 샴페인 하우스에 포도를 팔아야 했지만, 포도 가격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아예 구매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1929년, 25개의 포도 재배자 패밀리가 힘을 합쳐 위기에 맞서기로 한다. 마이 샴페인 생산자 협회를 설립하고, 당시 그랑 크뤼로 분류되어 이미 뛰어나다고 여겨진 테루아를 자기 마을의 포도만으로 샴페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CM(Coopérative de Manipulation:협동조합에서 생산하는 샴페인*) 샴페인 생산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이 샴페인은 품질과 개성을 인정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오늘날 마이는 샹파뉴의 대표적인 샴페인 생산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다들 포도 농사를 하던 농부들이었기에, 포도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양조 기술은커녕 양조할 공간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던 터. 1차 발효 후 2차 발효를 병에서 해야 하는데, 그조차 할 건물이 없었다. 위기는 항상 기회를 만들어 내는 법.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농부들은 트렌치를 파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기술을 바탕으로 35년 동안 손으로 직접 땅을 파 까브를 만들기 시작했다. 석회질 토양이라 손으로도 긁히는 정도의 부드러운 땅이었지만,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지하 20미터 깊이에 1킬로미터나 되는 셀러를 만들어냈다. 까브를 만드는 동안, 양조와 숙성 등에 다양한 노하우를 아주 천천히, 단단히 익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좋은 샴페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현재도 같은 25개 패밀리가 한 커뮤니티를 이루어 연간 5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귀하다는 돔 페리뇽이 7백만 병을 생산하니, 그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양이다.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 지역은 9개 마을, 발레 드 라 마른 지역은 2개 마을, 꼬뜨 데 블랑 지역은 6개 마을이 그랑 크뤼로 선정되어 있다.
*그랑 크뤼: 100%를 받은 17개 마을, 프리미에 크뤼: 90 - 99% 받은 44개 마을, 샹파뉴 쌍 크뤼(Champagne Sans Cru): 80 - 89%를 받을 수 있는 나머지 마을들
우리는 샴페인 그랑 크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에 그랑 크뤼(Grand Cru)라고 적혀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손이 가다가도 가격을 보고 흠칫! 하고 내려놓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셔봐야지! 하는 내 와인의 리스트에 넣어둔다. 그런데 샴페인에서 아직 그랑 크뤼를 보고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한국에선 막상 그랑 크뤼라고 해서 마냥 비싸지도 않고,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나볼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샴페인 그랑 크뤼는 뭘까? 발레리는 간단하게, “보르도, 부르고뉴의 그랑 크뤼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돼요”라고 답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샴페인의 그랑 크뤼 등급은 샴페인 총생산량의 8.5%로(34,600헥타르 중 3,000헥타르), 굉장한 희소성이 있는 와인이다. 그만큼 최고의 품질을 가진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데, 샹파뉴 와인 공동위원회(CIVC)가 191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에쉘르 데 크뤼(Échelle des Crus)라는 등급 제도에 따라 결정된다. 에쉘르 데 크뤼는 포도밭의 위치, 토양, 기후, 수확량, 포도 품질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등급을 매기는데, 그랑 크뤼 등급은 백분율로 100%를 획득한 훌륭한 포도밭에만 주어진다. 2023년 현재, 샴페인 그랑 크뤼는 총 319개의 마을 중 17개 마을에 있으며, 몽타뉴 드 랭스(Montagne de Reims) 지역에서 9개 마을, 발레 드 라 마른(Vallée de la Marne) 지역에서 2개 마을, 꼬뜨 데 블랑(Côte des Blancs) 지역에서 6개 마을이 그랑 크뤼로 선정되어 있다. 그랑 크뤼 마을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샴페인은 라벨에 'Grand Cru'라는 문구를 영광스러운 샴페인의 순간을 담아 표기한다.
1+1=3
마이 그랑 크뤼에서 ‘리우디* 블렌딩’은 와인 제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와인을 블렌딩하여 평범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블렌딩을 통해 엄청난 시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북쪽을 향하고 있는 마이 그랑 크뤼는 75헥타르의 포도밭을 보유하며, 이 중 75%는 피노 누아, 25%는 샤르도네이다. 이 포도밭은 35개의 리우디로 나누어 관리된다. 각 리우디는 세밀하게 관리되어 고품질 샴페인 생산을 위한 완벽한 베이스 와인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수확한 포도는 따로 재배하고 양조한 후, 블렌딩한다.
“우리가 리우디 (Lieux-diet) 블렌딩을 하는 이유는 “1+1 = 3”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예요”
이렇게 정교한 블렌딩 과정의 중심에는 2013년부터 셰프 드 카브(Chefs de Cave)로 함께해 온 세바스티앙 몽퀴(Sebatian Moncuit)가 있다. 그의 철저한 성격은 와인을 구매하기 전부터 와인 레이블에서 볼 수 있다. 블렌딩 비율을 소수점까지 정확하게 표기하고, 와인에 따라 리우디(Lieux-Diet)를 명확하게 표기를 한 것인데, 이는 소비자에게 친절한 와인을 제공하고자 함과 동시에, 제조 과정에 대한 엄격한 철학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리우디(Lieux-diet)’는 프랑스어로 ‘구획’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플롯 (Plot)’이라고도 한다.
*마이 그랑 크뤼 밭의 리우디는 어떤 곳일까? 좀 더 살펴보자면, 가장 시원한 지역인 레스 바라퀸느가 있다. 좋은 구조감과 스파이시한 캐릭터의 피노 누아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언덕엔 석회질 토양과 시원한 바람으로 인해 샤르도네를 재배하기에도 적합하다. 경사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레스 고다츠(Les Godats)와 레스 쿠튀르(Les Coutures)가 있는데, 이 곳은 좀 더 평평하고 따뜻한 기후로 인해 2~3일 더 일찍 익는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 마지막으로 레스 코트(Les Côtes)는 석회질 산등성이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더 많은 햇빛을 받기 때문에 몽퀴는 이 포도밭에서 생산한 와인을 블랑 드 누아, 레스 에샹송과 같은 강렬한 뀌베에 사용한다. 척박하고 표토가 거의 없어 뿌리가 직접 석회암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와인에 충분한 텐션을 제공한다. * [피터 림/ 샴페인 책 인용]
이러한 떼루아의 고유한 특징은 와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지역의 북쪽 입지는 다른 북부 그랑 크뤼 마을의 와인과 비교했을 때, 더 신선한 피노 누아를 재배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와인은 풍부한 붉은 과실향보다는 섬세한 시트러스와 청사과 계열의 아로마와 함께 강건한 구조를 유지하며 활기찬 에너지를 내뿜는다.
금방 소비될 와인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쉬운 과정일 수 있지만, 오랫동안 숙성시키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확 시점, 발효 방식, 숙성 조건을 비롯한 모든 과정에 정밀한 관리와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오랫동안 숙성 가능한 와인을 양조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 되는 이유다.
“It’s like RM with many families.(마치 RM 샴페인을 많은 가족들이 함께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마이의 지속가능한 와인메이킹과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
“We share one vision.” 같은 비젼을 공유하는 마이 그랑 크뤼 마을 사람들은 전부 지속 가능한 와인메이킹을 실천하고 있다. 토양을 관리하는 데 화학재를 덜 쓰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건강한 토양의 양성을 유도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2021년에 전체 와이너리에 HVE(Haute Valeur Environnementale: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환경적 가치가 높은 농산물, 축산물, 임산물, 수산물에 대한 인증제도)와 VDC(Viticulture Durable en Champagne: 샹파뉴의 지속 가능한 포도 재배 인증제도)의 두 개의 인증 마크도 받았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지속 가능한 와인메이킹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커뮤니티 관점에서도 노력하고 있다. 좋은 와인을 만들어 팔고, 그 수익으로 가족들이 좋은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지속 가능한 와인메이킹과 함께 샹파뉴 지역에서 최근 주목 받는 주제 중 하나는 기후 변화이다. 발레리는 "It’s a reality(이것은 현실)"이라며, 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기후 변화의 현실을 언급했다. 2022년에는 9월 1일에 수확을 시작했지만, 10년 전까지는 9월 말에 포도를 수확했던 것과 비교하여,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수확 시기가 당겨진 것을 지적했다. 이외에도 2022년에는 극한 폭염이 발생하고, 2023년에는 과도한 강우를 겪었다고 한다.
마이 지역은 프랑스 샹파뉴에서도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후 변화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한 편이지만, 이 지역조차 프랑스 최북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더 북쪽 지역과 비교하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로 인해 샴페인 생산자들은 어떻게 보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와인의 품질을 높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샴페인 생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왜냐하면 포도의 당도가 알코올 농도를 결정하므로, 원하는 알코올 레벨을 얻기 위해 수확을 조기에 진행해야 하지만, 이로 인해 포도 껍질이 충분히 익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곰팡이에 강한 Voltis*라는 새로운 포도 품종이 개발되어 2022년부터는 샴페인 양조에 허용되었다고 언급하며, 샴페인 생산자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와인 테이스팅
샴페인 마이 브륏 리저브 Champagne Mailly Brut Reserve
가장 생산량이 많은 그들의 엔트리 샴페인은 피노 누아 75%, 샤르도네 25% 블렌드로, 3년간 오크 숙성에 18개월 병 숙성, 도사주는 7g/L로 출시된다. 4년 반을 숙성하고 출시하는 와인이기 때문에, 와인을 오픈하자마자 농축된 풍미가 코를 감싼다. 광채가 나는 금빛 복합적 과실향, 섬세한 기포, 정교하며 농축된 풍미, 산도, 잔잔한 탄산감, 상대적으로 높은 도사주가 느껴지는 와인. 볼륨감 있게 입안 전체를 꽉 채운다.
샴페인 마이 엑스트라 브륏 2015 Champagne Mailly Extra Brut 2015
피노 누아 75%, 샤르도네 25% 블렌드로 ‘리저브’와 동일한 기간인 3년간 오크통 숙성과 18개월 병 숙성을 거치고, 도사주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자체가 퀄리티에 대한 높은 자신감을 반영한다. 도사주로 쉽게 얻어낼 수도 있는 풍부한 질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엑스트라 브륏의 강건한 풍미와 함께 느껴지는 날카로운 볼륨감은 다채로운 꽃향, 너트향, 브뤼오슈향과 시트러스 향과 함께 아주 조화롭게 다가왔다.
샴페인 마이 랑텀프렐 2017 Champagne Mailly L'intemporelle 2017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15,427병만 생산된 ‘랑텀프렐 2017’은 투명한 병에 담겨 색깔부터 은은한 금빛을 뽐낸다. 피노 누아 60%, 샤르도네 40%와 도사주 6-7g/L로, 아주 잔잔한 기포와 높은 미네랄감, 신선한 산도, 감귤류 풍미, 약간의 당분 첨가를 통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엄청나게 섬세한 향들이 정교하게 밸런스를 맞추며 천천히 다가오는 와인이다. 섬세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랑텀프렐은 럭셔리한 박스에 담겨 출시되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기 좋은 샴페인이다.
샴페인 마이 크랑 크뤼 밀레짐 1997 매그넘 셀렉션 Champagne Mailly Grand Cru Millesime 1997 Magnum Selection
장기간 숙성을 위해 만들어진 1997 매그넘 셀렉션은 피노 누아 75%, 샤르도네 25%로 블렌딩되었으며, 엄청난 힘이 그대로 느껴지는 샴페인이었다. 상대적으로 어린 샴페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폭발적인 브뤼오쉬 풍미는 마치 달콤한 군밤 향을 연상시켰는데, 엄청난 산도와 조화를 이뤄 1997 빈티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도사주가 2g/L임에도 불구하고 입안을 가득 채우는 섬세한 풍미는 숙성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마스터피스였다. 이 매그넘 컬렉션은 20년 동안 셀러에서 숙성되어 출시되었는데, 신선함과 함께 밸런스를 이루는 숙성향이 인상적이다.
문의 국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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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천혜림, 사진·자료 제공 국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