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포도가 스스로 발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또 발효와 숙성이 끝난 와인을 그대로 병에 담아 출시하는 와이너리가 있다. 물론 많은 자연주의 와인 생산자가 추구하는 바이긴 하지만, 모비아(Movia) 와이너리에는 특별한 한 끗이 있다. 출시된 와인을 서빙 전 소믈리에의 손에서 데고르주망하고 침전물을 걸러내어 완성시킨다는 것. 낭만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8월 28일(월) 슬로베니아 와인 & 모비아 세미나에서 만나본 모비아 와인의 인상은 “’클래식’이란 옷을 입은 ‘혁신적인’ 와인”이었다. 세미나는 모비아 와이너리가 있는 슬로베니아에서 4년간 와인을 만들었던 박순석 소믈리에가 진행했다.
자연주의 와인의 조력자
모비아 와이너리는 슬로베니아 오렌지 와인의 부흥을 일으킨 1세대 와인 생산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족 소유로 유지되어 온 거의 유일한 와이너리이며, 1820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왔다. 포도밭은 슬로베니아 브르다(Brda) 지역과 이탈리아 북동부 콜리오(Collio) 지역에 걸쳐 있는데, “길 하나만 건너면”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이 갈라지는 곳이라고 한다. 현재 와이너리를 이끄는 이는 8대 와인 생산자인 알레스 크리스탄치치(Aleš Kristančič). 보르도와 부르고뉴에서 양조 기술을 갈고닦았다. 세계 최고의 와인 생산지로 불리는 곳에서 수학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선택한 길은 완전히 다른 길이었다. 박순석 소믈리에는 그 새로운 길의 결과에 대해 “컨트롤된 자연주의 와인” 생산자라 표현했다. 내추럴 와인이더라도 침용 온도를 컨트롤하거나 필요에 따라 소량의 이산화황을 첨가하는 등 예민하게 컨트롤하여, 비교적 일관된 품질로 와인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포도 그대로를 와인병에 담아내되, 최상의 모습을 표현하도록 돕는 조력자라고 할까.
마지막 춤은 소믈리에의 손에서
모비아 와이너리의 ‘컨트롤된 자연주의 와인 생산자’적 면모는 이들의 스파클링 와인 푸로(Puro)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푸로는 당분, 효모, 이산화황 첨가 없이 생산하는 내추럴 스파클링 와인이다. ‘효모와 당분을 넣어 병 내 2차 발효하는 스파클링 와인이 내추럴 와인일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푸로는 다음 해 수확한 포도즙을 7% 첨가하여 병입함으로써 해결했다. 이름 그대로 포도만을 원료로 한 순수한(Puro) 와인이다. 병입 후 5년의 긴 숙성을 거친 후 푸로 와인은 거꾸로 세워진 채 출시된다. 데고르주망을 하지 않은 그대로. 병목에 모인 효모 찌꺼기를 빼내는 데고르주망을 하면 비는 양만큼 와인과 당분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포도즙만으로 2차 발효를 하는 모비아답게 이 역시도 첨가물로 보기 때문이다. 덕분에 병 속의 와인은 효모에 의해 오랜 기간 산화로부터 보호되고, 또 좋은 풍미를 얻게 된다. 2004 빈티지의 푸로 로제 와인을 몇 해 전 맛본 적 있다는 박순석 소믈리에는 “십수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효모 찌꺼기가 산화로부터 와인을 보호해 매우 신선했다”라며 효모 찌꺼기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그렇게 거꾸로 세워진 채로 세상에 나온 푸로 스파클링 와인은 서빙 전 소믈리에의 손에서 완성된다. 소믈리에가 병목이 아래를 향하게 물속에 넣어 오픈하면서 데고르주망되고, 완전한 와인이 되는 것이다.
이번 세미나에서도 박순석 소믈리에가 손수 데고르주망 시범을 보이며 서빙 직전에 와인병을 오픈했다. 먼저 시음한 모비아 푸로 2017 빈티지는 샤르도네 100%로 만들었으며, 발효 중 자연적으로 생성된 소량의 이산화황 외엔 어떠한 첨가물도 넣지 않았다. 와인 잔을 코에 가져다 대면 사과, 시트러스, 흰 꽃, 빵의 향긋한 아로마가 풍겨 나오고, 이어서 농익은 사과, 강렬한 감귤류, 파인애플, 바나나, 모과, 허니서클의 화려한 풍미가 입 안에서 펼쳐졌다. 향만 맡으면 달콤할 것 같지만 굉장히 드라이했으며, 섬세하면서도 화려했다. 다음은 피노 누아 100%로 만든 푸로 로제 2016. 푸로 스파클링 화이트와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와인은 신선한 라즈베리, 체리, 석류 등의 과즙미가 터지면서 장미 향이 호사스럽게 감돌았고, 매우 드라이하며 꼿꼿한 산미를 보였다. 두 와인의 공통점은 6~7년 전 빈티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독특한 신선함과 화려한 풍미. 이 정도면 샴페인 만능주의자의 미각도 매료시키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와인이지 않을까. 일면 투박해 보이기도 하는 장비들로 물 속 데고르주망을 하는 이유가 절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님을, 그렇게 받아낸 한 잔의 와인에 담겨 있는 포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알 수 있다.
달이 차오르면 와인병도 채워진다
소믈리에의 손에서 완성되는 또 하나의 와인이 있다. 바로 이 지역 토착 품종인 리볼라 100%로 만든 모비아 루나(Lunar)로, 모비아의 아이콘 와인이자 오렌지 와인이다. 모비아 와이너리가 자리한 이탈리아 북동부-슬로베니아는 오렌지 와인 무브먼트의 본류라 할 수 있다. 오렌지 와인은 레드 와인처럼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 년 이상 껍질과 함께 발효 및 침용하여 생산한 화이트 와인을 일컫는다. 전통적인 와인 양조법이지만 현대에 와서 사라지다시피 한 것을 1990년대에 슬로베니아의 몇몇 와인 생산자들이 부활시켰다. 이 과거로의 회귀는 내추럴 와인의 붐과 함께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같은 오렌지 와인으로 분류될지라도 침용 기간과 방식에 따라 결과물은 변화무쌍한데, 모비아는 온도를 낮춰서 섬세하게 캐릭터를 뽑아내는 스타일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루나 와인은 달의 주기에 따라 생산된다. 이것은 달의 인력이 지구와 생명체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데, 와인 역시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달의 주기에 맞추는 것이다. 하긴 바닷물의 높낮이도 달의 영향을 받는데 와인인들 영향을 안 받을까. 루나 와인은 보름달이 뜰 때 병입된다. 건강하게 재배한 좋은 포도 그 자체만 넣어서 만든 와인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병에 담고, 소믈리에가 서빙 전 디캔팅으로 침전물을 걸러내면서 와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세미나에서도 와인은 이렇게 준비되었고, 사과, 살구, 화이트 발사믹, 꿀의 풍부한 향과 갈변 사과, 바나나, 레몬, 페퍼, 드라이 허브, 건초 등의 화려한 풍미가 펼쳐졌다. 현란한 하드록 기타 솔로 같은 와인인데, 넘치는 법 없는 절제력을 갖추고 있어 누구나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라 하겠다.
이 정도로 잘 다듬어진 내추럴 와인이라면
소비자로서 내추럴 와인을 대할 때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은 병마다 와인의 컨디션이 다를 수 있고, 운이 나쁘면 결함이 있는 와인을 만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컨트롤된 자연주의 와인’인 모비아라면 일관성을 조금 더 기대해도 되겠다. 앞서 소개한 와인 외에도 세미나에선 3종의 와인을 더 만나볼 수 있었는데, 모두 튀는 요소 없이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우선 소비뇽 블랑부터 보자. 2021 빈티지로 출시된 소비뇽 블랑은 슬로베니아산 콘크리트 에그에서 8개월간 숙성했으며, 극소량의 이산화황을 넣었다. 와인에서는 복숭아, 살구 등 핵과류의 과일 아로마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부드러운 인상의 와인으로, 복숭아, 오렌지, 꿀, 바닐라, 허브 등이 조화된 풍미가 오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다음으로 만나본 리볼라 2020 빈티지는 프리런 쥬스로만 발효한 와인이다. 완성된 와인에서 오크 느낌이 많이 나는 것을 지양하고자 프렌치 오크와 콘크리트 에그를 반반씩 섞어 숙성했다. 신선한 허브 향을 강하게 풍기는 이 와인은 사과, 배, 오렌지 등의 진한 과일 풍미에 위스키가 연상되는 달콤한 오크 터치와 빳빳한 탄닌이 조화를 이루며 긴 여운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모드리(Modri) 피노 누아 2017 빈티지가 있다. 프렌치 오크에서 48개월간 숙성했는데, 이는 오크향을 입히기보다는 미세 산화를 위함이라 한다. 잔에서는 잘 익은 체리, 블랙베리의 진하고 풍부한 과일향이 장미, 허브, 훈연 향과 뒤섞여 올라와 매우 복합적인 향을 즐길 수 있다. 피노 누아의 쥬시함과 강렬한 면모가 동시에 표현된 와인으로, 입 안에서는 블랙 체리, 블랙베리, 토스트, 가죽, 허브 등이 생동감 넘치는 풍미를 구사했다.
모비아는 오래된 와이너리지만, 현재의 8대 생산자에 와서 포도 외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완전한 내추럴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었고, 또 옛 방식으로 껍질 침용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 오렌지 와인 무브먼트의 부흥을 일으켰다. 혁신이라는 게 반드시 첨단 기술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사실을, 모비아 와이너리는 무엇이든 자동화되어 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그들의 와인으로 외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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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자료 제공 에노테카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