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여성의 업적을 기념하고 성평등 사회를 향한 인식개선과 여성들의 연대를 다지는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와인산업 또한 수 세기 동안 남성들이 지배했던 분야로 여성들의 노고는 쉽게 잊혀지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여성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여성들은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성장하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19세기 전통의 한계를 깨고 성공 신화를 썼던 바브-니콜 클리코(Barbe-Nicole Clicquot)와 루이스 포므리(Louise Pommery)의 후예들을 만나보려 한다.
1장. 와인역사 속 꼭꼭 숨겨둔 여인의 향기
구석기 시대 여성은 채집의 주체였다. 어느날 여성은 우연히 방치했던 포도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나는 걸 보고 기겁했다. 식량이 귀했던 때라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 무시무시한 액체를 마셔보니 기분 좋은 향과 맛에 놀라 그 경험을 반복하고자 노력했을 것. 신비한 와인의 마법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고 맛을 더 좋게 할 수 없나 실험도 해보고 잘 만들어지면 주고 팔면서 무역이 왕성해졌다. 많은 역사학자가 지적한바, 와인이 고부가가치를 가진 식품으로 인식되면서 (어떤) 사람들은 와인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누가 만들고 거래하고 마실 수 있는지를 빠르게 정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은 와인을 마시고 와인 거래에도 참여했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선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게다가 대지와 농사의 여신이 관할했던 와인을 디오니소스(그리스)와 바쿠스(로마)로 알려진 남신의 영역에 두어 문화적 연결까지 싹둑 잘라냈다. 이후 로마 시대에 와인 무역이 번창하면서 여성의 와인 음용이 허용된 반면에 남성들은 와인 생산, 거래 등 경제적 이윤을 거머쥐었다.
1800년대 프랑스 혁명이 불평등한 봉건제 사회를 무너뜨렸지만 여성 차별은 여전했고 와인 산업 역시 남성들의 독점 아래에 있었다. 1804년 제정된 나폴레옹 법전에 의하면 여성은 후견인인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 없이 재산이나 사업체를 가질 수 없었다. 당시 여성이 합법적으로 와이너리를 소유할 방법은 과부가 되거나 독신녀로 늙어가는 것뿐. 1805년 남편의 샴페인 사업을 물려받은 바브-니콜 클리코가 좋은 예다. ‘최초’란 타이틀이 어울리는 위대한 여성답게 그녀는 리들링 테이블(riddling table)을 발명해 샴페인의 품질 향상에 이바지했고 최초의 로제 샴페인도 만들며 창의성을 발휘했다. 1858년 루이스 포므리 또한 남편의 삼페인 사업을 상속받아 영국 시장을 개척했고 최초의 브륏 샴페인을 생산하여 샴페인의 스타일을 바꾼 주인공.
캘리포니아 최초의 여성 와인메이커로 기록된 한나 와인버거(Hannah Weinberger) 또한 1882년 남편 사망 후에 JC 와인버거 와이너리(JC Weinberger Winery)를 이어받았다. 1889년 카베르네 소비뇽을 가지고 파리 세계 박람회에 참가한 결과, 은메달을 수상해 나파 밸리 와인 전체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그녀는 1920년 금주령 때문에 와이너리를 폐쇄할 때까지 운영했고 와이너리 부지는 현재 세인트 헬레나 북쪽에 위치한 윌리엄 콜 빈야드(William Cole Vineyards)의 일부가 되었다.
포르투갈의 와인 역사상 전설처럼 회자되는 첫 여성 와인 사업가, 도나 안토니아 페헤이라(Dona Antónia Ferreira)는 1844년 고작 33세에 과부가 되어 가족 와이너리, 까사 페헤이라(Casa Ferreira, 순수한 포르투갈 가문이 설립)를 이어받았다. 그녀는 포도나무를 심고 직원을 고용하고 정부의 지원 부족에 맞서 싸우며 당시 여성에게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냈다. 1860년대 중반 필록세라가 도우로 지역을 침범했을 때 해결 방법을 구하기 위해 영국에 가서 미국 포도나무 뿌리를 사용하는 방법을 갖고 돌아왔다. 평소 자선사업과 검소한 생활을 해온 그녀는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이 여성들은 1800년대 견고한 유리천장을 깨고 오늘날 와인 양조 산업에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토대와 스스로 밑거름이 된 선구자들이었다.
2장. 나비처럼 우아하게, 벌처럼 강하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상속을 통해 여성이 와이너리 소유나 와인 양조의 세계로 입문하는 게 흔해졌다. 또한 와인교육의 기회가 활짝 열리면서 여성들이 자신의 와이너리를 시작하거나 와인메이커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와인업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020년 와인 인텔리전스(Wine Intelligence)에 따르면 약 40%로 추정하는데 와인메이커, 포도 재배자, 소믈리에, 마케터 등 다양한 직업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2020년 산타클라라 대학의 연구에서 캘리포니아에 있는 4,200개 이상의 와이너리 중 여성 수석 와인메이커의 비율은 약 14%라고 보고했다.
프랑스의 경우, 비티스피레(Vitisphere)에 의하면 전국 샤토와 도멘에서 최고 경영 혹은 소유하고 있는 여성은 총 12,700명 이상이다(2019년 기준). 추가로 121,000명의 여성들이 일하고 있다. 프랑스 각 지역엔 여성 와인업계 종사자를 지원하는 협회가 있으며 포도 재배를 공부하는 여성의 수도 늘고 있다. CIVC(샴페인 생산과 유통, 판촉을 통제)는 샹파뉴 전체 셀러 마스터 중 여성의 비율이 약 10%라고 추정한다. 2018년 크리비스(Cribis)의 조사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약 73,700개 와이너리 중 여성이 관리하는 와이너리는 ⅟4 이상이라고 한다. 변화의 속도는 더디지만 그 물결은 멈추지 않고 있다. 오늘날 와인업계에서 주목하는 7인의 여성 와인메이커를 만나보자(알파벳순).
1. 알리스 테티엔(Alice Tétienne) / 샴페인 앙리오(Champagne Henriot)
2020년 샴페인 앙리오는 젊고 재능있는 양조학자, 알리스 테티엔을 셀러 마스터로 임명했다. 그녀에게 하우스 최초의 여성 셀러 마스터란 “하우스 유산의 연속성을 의미”한다고. 니콜라스 앙리오(Nicolas Henriot)의 젊은 과부 아폴린느 앙리오(Apolline Henriot)는 1808년 메종 앙리오(Maison Henriot)를 설립했고 1880년 증손자 폴(Paul)과 결혼한 마리 마게(Marie Marguet)에게 이어진 역사가 있기 때문. 샹파뉴 출신인 그녀는 포도밭에서 자랐고 와인업계에서 일하기를 꿈꿨다. 와인과 샴페인 관련 학위를 받은 후 그녀는 로랑 페리에(Laurent-Perrier)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다. 이후 양조학에 전념해 국립 양조학자 학위를 취득하고 2014년 니콜라스 푸이야트(Nicolas Feuillatte), 2015년 메종 크룩(Maison Krug)에서 일했다. 앙리오의 셀러 마스터로 일하는 소감은? “역사적인 포도밭을 반영하는 샴페인 양조를 통해 앙리오의 유산을 지키고픈 존경심과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이 유산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라고.
2. 세실 박(Cecil Park) / 이노바투스(INNOVATUS)
2007년부터 17년째 와인을 만들고 컨설팅 해온 나파 밸리의 유일한 한국인 여성 와인메이커, 세실 박. 한국에서 평범한 K-직장인이었던 그녀는 MBA에 진학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와인의 무한한 다양성에 매료”되었고 UC 데이비스(UC Davis)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학을 전공하게 된다. 와인 실험실의 기술 인턴으로 와인 양조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하이드 바렛, 아론 포트, 롭 로슨, 사라 고트 등 나파 밸리의 대스타급 와인메이커들로부터 와인 양조는 물론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배웠다. 2014년에 라틴어로 ‘혁신’을 뜻하는 이노바투스를 설립한다. “폭넓게 발달한 미각 덕분에 독특한 이노바투스 퀴베 레드를 만들게 되었고 포도밭과 맛의 스펙트럼에 대한 나만의 해석으로 이노바투스 와인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비오니에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부터 피노 누아, 시라, 카베르네 프랑을 블렌딩한 이노바투스 퀴베 레드 등 시음해 본 결과 기존의 틀을 벗어나 그녀만의 재능과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는 평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다.
3. 클레어 노댕(Claire Naudin) / 도멘 앙리 나댕-페랑(Domaine Henri Naudin-Ferrand)
농업공학, 양조학 학위를 따고 고향에 돌아온 클레어 노댕은 1994년에 도멘을 물려받아 빠르게 자신의 스타일대로 바꿔갔다. 포도밭은 22헥타르, 80%가 오뜨 꼬뜨(Hautes Côtes)와 같은 지역 아펠라시옹에 있고 나머지는 마을 아펠라시옹(알록스 꼬르통[Aloxe Corton]), 프리미에 크뤼(라두아[Ladoix] 및 뉘-생-조르쥬[Nuits-Saint-Georges]) 그리고 그랑 크뤼(에세죠[Echezeaux])에 있다. 지속 가능한 포도 재배의 열렬한 팬인 그녀는 유기농을 기본으로 표준화를 거부하며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여성 포도 재배자이자 열정 넘치는 어머니로서 자신이 받은 것을 영속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 또한 클레어는 소외되고 평가 절하되었던 오뜨 꼬뜨 드 본과 오뜨 꼬뜨 드 뉘 지역 아펠라시옹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먼저 믿었다. (이 지역의) 각 구획에서 자라는 야생화 이름을 따서 만든 ‘더 플라워 시리즈’라는 와인 컬렉션으로 ‘테루아의 운명이 빛을 발하다’ 또는 ‘경외심을 표할 수밖에 없다’ 등 호평을 받고 있다.
4. 이사벨 길리사스티(Isabel Guilisasti) & 이사벨 미타라키(Isabel Mitarakis) / 콘차이토로(Concha y Toro)
1883년에 설립되어 전세계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와인 브랜드, 칠레의 콘차이토로(Concha y Toro)의 고급 와인과 기업 이미지를 담당해온 길리사스티는 칠레와인업계에서 20년 이상 경력을 쌓았다. 그녀는 오랜 와인 양조 전통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 관한 이해가 깊다. 뛰어난 미적 감각과 창의력으로 콘차이토로의 고급 와인 브랜드들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알기 쉽게 전달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딸인 미타라키가 만드는 고급 와인 라인, 그라바스를 함께 담당하고 있다. 칠레 가톨릭 대학에서 양조학 전공으로 농업공학 학위를 받는 그녀는 2011년에 콘차이토로에서 양조를 시작했다. 2013년 돈 멜초르(Don Melchor) 팀에 합류, 보조 와인메이커로 일하면서 와인메이커 엔리케 티라도(Enrique Tirado)와 함께 다양한 프로세스를 감독하며 경력을 쌓았다. 2019년부터 안데스산맥과 마이포 분지에서 해마다 침식되고 옮겨지면서 형성된 자갈지대에서 생산하는 와인, 그라바스 라인을 담당하고 있다.
5. 헬렌 마스터스(Helen Masters) / 아타랑기(Ata Rangi)
2003년 말부터 현재까지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와이너리, 아타랑기의 수석 와인메이커. 1991년 고등학교 졸업 후 아타랑기에 직접 연락해 인터뷰를 봤고 그 자리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받은 헬렌은 1년 동안 포도밭, 와이너리, 셀러도어에서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뉴질랜드 메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네슬레에서 3년간 일한 후 와인 양조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리건과 캘리포니아에서 경력을 쌓은 후 마침내 연어처럼 아타랑기로 돌아온 그녀는 2004년에 수석 와인메이커로 승진했다. 2019년 호주/뉴질랜드에 초점을 맞춘 잡지인 구루메 트래블러 와인(Gourmet Traveler Wine)은 그녀를 ‘올해의 뉴질랜드 와인메이커’로 선정했다. 그녀는 각 와인의 빈티지를 표현한다는 철학을 가진 와인메이커. “빈티지가 와인을 표현하는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와인에서 과일과 토양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숨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연과 조연을 확실하게 구분하자.
6. 마리아 바르가스(María Vargas) /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Marqués de Murrieta)
유서 깊은 와인 전통을 가진 리오하에서 태어난 마리아 바르가스는 리오하 대학에서 농학과 포도 재배학을 전공했다. 1995년 꿈꿨던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에서 입사해 2020년에 기술 디렉터가 된 마리아는 마르케스 데 무리에타를 ‘세계 최고의 와이너리’라는 위치까지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본인 또한 스페인 최고의 양조 전문가로 성장했다. 2017년 팀 앳킨(Tim Atkin)이 선정하는 “올해 최고의 와인메이커”부터 Women's Wine & Spirits Award 2021에서 세계 최고의 양조학자로 선정되며 놀라운 행운이 이어졌다. 거의 200년 역사의 와이너리에서 그녀의 과제란? “역사적 유산을 받았고 우리의 책임은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유산을 위해 일하는 것” 그리고 와인의 트렌드에 관해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녀의 한마디! “와인메이커로서 최고의 경험 중 하나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유행이나 트렌드는 없다.” 옳소!
7. 사라 크로(Sarah Crowe) / 야라 예링(Yarra Yering)
프랑스의 가을 포도밭을 본 후 피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된 사라는 몇 년 후 헌터 밸리의 유명한 브로큰우드(Brokenwood)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일을 구했다. 9년 동안 와인 양조를 배우고 포도 재배 학위까지 취득했으며 ‘올해의 라이징 스타상’을 수상했다. 2013년 그녀는 베일리 카로더스 박사가 설립한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존경받는 와이너리 중 하나, 야라 예링으로 향했고 와인메이커가 되었다. 과거 스타일을 존중하며 야라 예링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던 그녀를 2017년 유명한 호주 와인 평론가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liday)가 올해의 와인메이커로 꼽았고 2022년 호주 포도 재배 및 양조학협회(ASVO)도 올해의 와인메이커로 선정했다. 사라는 포도밭으로 먼저 뛰어가는 와인메이커로 포도밭과 기후의 고유한 특성 파악하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첫 단추이다. “내가 와인을 만드는 동기는 매년 그 계절을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최고의 와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지만 쉽게 보여야 한다.” 와인은 실험실이 아닌 포도밭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에 떠오른다.
3장. 와인잔에 담길 미래를 향하여
여성이 주도하는 와이너리들은 다양한 스타일, 지속 가능성, 혁신을 강조하며 업계의 표준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 초기 선구자부터 현재 혁신가까지 여성은 개인의 성공을 넘어 와인 양조의 지형을 더 확장하고 고정관념을 깨며 미래세대 여성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앞으로 와인산업에서 여성의 역할은 진화할 것이며 이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은 지치지 않고 활약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글 박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