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메이커의 약속, 하디스의 이름을 담은 와인이라면

Written by강 은영

하디스는 지난해 새 수석 와인메이커로 헬렌 맥커시(Helen McCarthy)를 임명했다. 올해 170주년을 맞은 하디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석 와인메이커다. 아콜레이드 와인은 글로벌 와인 디렉터를 하디스의 수석 와인메이커에게 맡겨왔던바, 그녀는 호주 최대 와인 생산자이자 글로벌 와인 그룹을 책임지는 중책도 안았다. 그러니까 헬렌은 37명의 와인메이커(이 중 하디스 와인메이커는 그녀를 포함해 4명이다)와 빈티지 계획을 세우며 와인의 스타일과 브랜드의 역사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난 9월 3일 일요일 오후, 하디스의 170주년을 기념해 처음 한국을 찾은 헬렌 맥커시를 만났고 인터뷰는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지난 9월 초 방한한 하디스의 수석 와인메이커 헬렌 맥커시(Helen McCarthy)

하디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석 와인메이커

헬렌 맥커시는 자신을 ‘바로사 걸’이라 불렀다. 현재는 와인메이킹 외길인생 22년 차. 포도밭에서 유년을 보냈을 것 같은 프로필이지만, 그건 아니다. 애들레이드에서 자라 이공계열로 진로를 그리던 18살 소녀의 인생에 와인은 없었다. 파리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파리의 와인 컨퍼런스에 참여했던 친구는 와인 업계에 대한 청사진에 들떠 있었다. 90년대 중반 휴대폰도 없던 시절, 해외통화는 2시간이나 이어졌고 그때 그녀의 인생에도 와인이 들어왔다. 이후 다른 길은 돌아보지 않았다. 애들레이드 대학에 진학해 양조학 공부를 마친 뒤로는 호주의 기라성 같은 와이너리들을 거쳤다. 밀두라(Mildura)의 린드만(Lindeman’s), 클레어 밸리의 테일러스 와인(Taylors Wines), 쿠나라와의 윈즈(Wynns), 바로사의 쏜클락(Thorn-Clarke)과 펜폴즈(Penfolds)까지. 그리고 2022년 하디스의 수석 와인메이커이자 아콜레이드 와인의 글로벌 와인 디렉터로 임명된다. 하디스로 첫 출근하던 날은 여전히 생생하다. 현실의 무게(예산이 놓여 있었다)와 자부심(호주에서 오직 세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는 하디스 뮤지엄의 열쇠를 받았다!)이 참으로 묵직했다.

하디스의 차이

여러 와이너리를 두루 거친 그녀가 하디스에서 느낀 차이점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많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면서 말문을 열었다가 생각이 계속 더해지는지 말소리가 빨라졌다. “하디스는 좀 더 전통적인 와인메이킹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바스켓 프레스 이용. 틴타라, 아일린, 토마스 하디 와인은 모두 1902년에 만들어진 바스켓 프레스를 이용한다. 무엇보다 하디스의 가장 큰 특징은 ‘일관성’인데, 와인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 블렌딩에 많은 변주를 주지 않는 편이다. 블렌딩 철학에도 차이가 있다. 어느 지역의 포도든 수확해서 블렌딩할 수 있지만 그 블렌딩 속에서 어느 지역과 파트의 어떤 캐릭터가 담고 있는지를 표현해야 한다. 가령 이 캐릭터는 야라 밸리에서 왔고, 이 부분은 태즈메이니아의 것이라고. 또 우리는 와인이 ‘어디에서 왔고 어느 방향으로 가려 하는지’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하디스의 진실은 우아한 스타일에 있다. 일반적인 호주 와인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산도가 발달한 편이고 숙성력도 좋다.”

하디스의 오래된 바스켓 프레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바겠지만 하디스의 차별점 중 하나는 넓은 와인 범주다.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하디스는 커머셜 라인뿐 아니라 프리미엄 라인에서도 세계 시장에서 많은 성장을 거두고 있다. 놀라운 점은 몇 달러부터 몇백 달러에 이르는 모든 레인지의 와인에서 하디스의 DNA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어떤 럭셔리 브랜드에서는 프리미엄 라인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저가의 기본급 와인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디스는 소비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다. 지갑 안에 얼마가 있든 하디스라면 괜찮은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거라고.”

하디스 ‘HRB’ 와인들

와인메이커의 최애 와인과 하디스 대표 와인

그렇다면 하디스의 수많은 와인 중 와인메이커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뭘까? 그녀는 HRB 리슬링을 꼽았다. 다른 포도밭의 와인을 블렌딩하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HRB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그중 리슬링은 생산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녀가 누차 밝혀 온 최애 품종이다. ‘리슬링이 왜 그렇게 좋으냐?’는 질문엔 거의 낚아채듯 반응하며 덕후의 눈빛으로 가쁘게 속삭였다. “와인메이킹이란 포도밭에서 제대로 하는 것, 그게 전부다. 리슬링은 포도밭 한 줄 한 줄 정확하게 언제 포도를 수확할지, 어떻게 핸들링할지, 그냥 단지 오크를 사용해서도 안 되고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해야 하는데 그 점이 좋다. 리슬링이 요구하는 완벽함이. 리슬링은 잘 만들기 정말 어려운 와인이고, 반대로 만들기 아주 쉬운 와인이다. 완벽한 포도를 얻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망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완벽한 리슬링에는 온전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완벽을 요구하는 포도의 까탈스러움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인메이커란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듯, 자연에 대한 경이를 가슴에 새기는 존재라는 걸. 그리하여 와인메이킹에서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hands off’ 손을 뗄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야 할 길이다. 이것은 와인 업계에 널리 알려진 정답이나 비법을 안다 한들 다들 맛집이 되는 것도 아니오, 누구나 정도를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와인메이킹의 기교가 필요 없는 완벽한 포도를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하디스에서 일하는 것은 행운이다. 모든 와이너리가 오랜 역사와 그에 걸맞은 오래된 포도밭, 뛰어난 퀄리티의 포도밭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디스의 맥라렌 베일 포도밭과 틴타라 셀러 도어

그녀는 하디스를 대표하는 와인으로는 주저 없이 틴타라를 선택했다. 틴타라는 와인을 오픈하는 매 순간 정확하게 이 와인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고. 하디스의 역사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와인이기도 하다. “다른 맥라렌 베일의 와인들이 맥라렌 베일 안의 특정 지역에서 나온 포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틴타라의 경우 맥라렌 베일의 거의 모든 지역의 포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차별화되는 캐릭터가 있다. 틴타라 쉬라즈는 블라인드로 시음해도 단번에 맞출 수 있는 특유의 캐릭터가 있는데, 약간의 탄닌과 기분 좋은 밀크초콜릿의 풍미가 느껴진다.”

하디스 ‘틴타라’ 와인

알면 알수록 더 좋은 하디스

그녀는 “하디스는 알아갈수록 점점 더 좋아진다”고 했다. 자신이 일하는 브랜드가 17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그 속에는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브랜드를 더 애정하게 하는 요소다. 특히 감정이입이 되는 존재는 아일린 하디스. 와인메이커 이전에 한 딸의 어머니로서, 앞선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간 이 여성에게 많은 용기를 얻었다. 아일린 역시 바로사 출신이었다는 점도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지점.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호주의 가장 ‘네임드’ 와이너리인 하디스에는 가장 유명한 호주 와인 생산지인 바로사 밸리의 와인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도 이점이 궁금했던 부분이라며 맥라렌 베일을 터전으로 정체성을 형성한 하디스의 입장에서는 맥라렌 베일 인근의 바로사 밸리 와인을 생산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긴 것 같다고 답했다. 전통과 일관성을 추구하는 하디스의 면모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은 변화의 편 아니겠나. 그녀는 “언젠가 바로사 밸리의 하디스 와인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라며 웃었다. 실상 2022년 HRB 시리즈에는 이든 밸리의 포도가 사용되었는데(이든 밸리는 바로사 존에 속해 있다)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한 셈.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미래는 모를 일이다.

하디스의 맥라렌 플랫(McLaren Flat) 포도밭

170주년 기념 와인과 하디스의 미래

하디스는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키면서도 소비자들에게 늘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곤 했다. 이번 170주년을 기념해서는 리미티드 에디션 와인 ‘8’을 출시했다. 엄선한 8개의 배럴을 블렌딩한 와인으로 단 2,400병만 생산했다고. 헬렌의 위시리스트에는 포티파이드 와인 생산도 있다. 호주에서 와인 산업 초기에 포티파이드 와인이 성행했던 것처럼 하디스 역시 포티파이드 와인을 만들어 온 역사가 깊다. 하디스 뮤지엄에서는 1950년대의 포티파이드 와인도 볼 수 있다 한다. 포티파이트 와인에 대한 실험적인 생산은 이미 착수되었으니, 언젠가 하디스의 애니버서리 와인으로 포티파이드 와인이 출시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전 세계 모든 와인 생산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 이슈에 따라 하디스에서도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단적으로 태즈메이니아에 꽤 넓은 규모로 쉬라즈를 식재했고 시원한 기후의 페퍼 향이 두드러지는 쉬라즈를 생산하고자 한다. 리슬링 러버인 그녀는 서호주 프랭크랜드 리버의 리슬링도 기대하고 있으며, 피아노나 몬테풀치아노 같은 많은 이탈리아 품종도 실험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디스 170주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와인 ‘8’

“하디스는 계속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와인메이커는 자신했다. “와인업계가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하디스는 성장했고, 이것은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며 “굿 뉴스는 새로 유입된 와인 소비자들이 우리 와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하디스의 와인은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9백만 케이스, 즉 1억 8백만 병씩 소비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말했다. “나의 임무는 하디스가 지켜온 퀄리티를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실험하고 있는 새로운 품종이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이 마실 가치가 있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하디스의 이름이 있는 와인이라면 그래야 하니까. 많은 와인 브랜드가 새로 생겨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하디스는 있어 왔고 앞으로 또 다른 170년의 역사를 더해갈 것이다.”

지난 9월 초 방한하여 진행한 마스터 클래스의 참석 소믈리에들과 와이메이커 헬렌 맥커시

강은영 사진 제공 아콜레이드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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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3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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