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김관웅
파이낸셜뉴스 fnnews.com
- 김관웅의 도슨트 와인-실레누스 타이로스
- 풀바디 나파 와인인데 가볍고 산뜻한 질감에 좋은 산도까지
- 실레누스 그려진 라벨엔 어떤 의미 담겨 있을까
며칠 전 라벨이 아주 인상적인 와인을 만났습니다. 땅딸막한 배불뚝이 노인이 한 손에는 포도송이를, 다른 손엔 술잔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노인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요정 '실레누스(Silenus)'로 인류에게 와인을 전해준 '술의 신' 바쿠스(Bacchus)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입니다. 미국 나파밸리 실레누스(Silenus) 와이너리가 만드는 타이로스(Tyros) 와인은 전형적인 나파밸리의 풀바디 와인임에도 질감이 그리 무겁지 않고 산도가 아주 좋아 발랄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비교적 부담없는 가격에도 잘 만들어진 고가의 나파 와인 감성을 느낄 수 있고, 라벨에 담긴 여러가지 스토리도 즐길 수 있는 재미난 와인입니다.
■화가들이 즐겨 그린 요정 실레누스
요정 실레누스는 고대부터 화가들이 좋아하는 단골손님이었습니다. 늘 술에 취한 채 당나귀를 타고 가는, 어찌보면 당나귀에 실려가는 장면으로 자주 그려집니다. 바쿠스보다 더 술을 상징하는 아이콘입니다. 실레누스는 산과 들에 사는 사티로스 요정 중 하나로 상체는 사람, 하체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예언능력이 있지만 술에 취해야만 그 능력이 발휘됩니다. 실레누스가 보이면 늘 근처에 바쿠스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바쿠스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실레누스가 바쿠스의 양아버지가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우스가 인간 세상 테베의 공주 세멜레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여인으로 변해 세멜레를 찾아갑니다. "제우스에게 정말로 사랑한다면 본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해보라"며 꼬드깁니다. 본 모습이 번개인 제우스는 세멜레의 계속된 간청에 자신을 드러내고 세멜레는 벼락에 타 죽습니다. 제우스가 재빨리 세멜레의 뱃속에서 아기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꿰맵니다. 이후 날짜를 다 채우고 태어난 아기가 바쿠스였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한 번, 아버지 허벅지서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태어났다고 해서 '디오니소스(Dionysos)'로 불립니다.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해 어린 바쿠스를 그리스 올림푸스 산에서 멀리 떨어진 니사로 옮겨 요정 사티로스에게 양육을 맡기게 됩니다. 실레누스가 바쿠스의 양아버지이자 스승이 된 사연입니다.
실레누스가 어느 날 프리기아 지방에서 바쿠스와 행렬을 이루며 가다 홀로 남게 됐습니다. 매번 그렇듯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바쿠스 추종자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들이 만취한 실레노스를 잡아다 프리기아 왕 미다스에게 바칩니다. 미다스는 실레누스가 바쿠스의 양아버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미다스는 열흘 밤 열흘 낮 동안 잔치를 벌인 후 실레누스를 바쿠스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쿠스가 고마운 마음에 미다스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하자, 미다스는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소원은 저주였습니다. 미다스가 물을 마시려 입을 대도, 배가 고파 빵을 집어들어도 황금이 됐습니다. 미다스는 바쿠스에게 "자신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달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유명한 '미다스의 황금' 이야기가 실레누스에서 시작됐습니다.
■인류 최초로 와인에 취한 사람은 누구
"형님, 아우님! 어서 와 보세요. 하하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고 있어요."
실레누스와 바쿠스가 술에 취해 사는 신과 요정이라면 인류 최초로 와인에 취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Noah)입니다. 노아가 대홍수를 겪은 후 땅에 정착한 첫 해 어느 날,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를 수확해 만든 와인에 취해 그만 벌거벗은 채 잠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둘째 아들 함(Ham)이 아버지의 취한 모습을 보고 마치 구경거리가 난듯 행동합니다. 이를 본 형 셈(Sem), 동생 야벳(Japheth)이 겉옷을 가지고 뒷걸음질로 다가가 아버지의 몸을 덮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네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다." 술에서 깬 노아가 자초지종을 알고 함에게 이같은 저주를 퍼붓습니다. 성경 속 창세기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 저주는 나중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첫째 아들 셈은 중동과 아시아계, 셋째 아들 야벳은 아리안계 유럽인의 선조가 됩니다. 둘째 아들 함의 자손이 아프리카계 후손입니다.
노아가 대홍수를 겪은 후 방주에서 처음 나와 밟은 땅이 아라라트 산 높은 계곡지대였습니다. 아라라트 산은 터키 동부와 아르메니아 국경 사이에 있는 만년설산으로 높이가 5000m가 넘습니다. 여기서 발원한 물이 남으로 흘러흘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만듭니다. 이 곳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시작됩니다. 아라라트 산 북쪽에는 조지아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산지로 역사가 무려 8500년에 달합니다. 조지아는 이 곳에서만 나는 레드 품종 사페라비(Saperavi)로 와인을 만들고 거대한 항아리 같은 크베브리(Qvevri)에서 숙성을 합니다. 인류 최초의 와인 모습입니다. 조지아에서는 와인을 그비노(Gvino)라고 부릅니다. 이게 이탈리아로 넘어와 비노(Vino), 프랑스에서 뱅(Vin), 독일에서는 바인(Wine), 영국으로 전해져 와인(Wine)이 됩니다. 각 나라 와인의 명칭이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와 병든 바쿠스엔 어떤 사연이
황달기 가득한 얼굴에 술취한듯 퀭한 눈, 게다가 핏기없이 퍼런 입술까지…. 카라바조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1593년 그린 '병든 바쿠스'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그려진 전형적인 바쿠스의 모습과 달리 어딘지 좀 이상해보입니다. 카라바조가 바쿠스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은 자화상입니다.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의 얼굴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가득한 건 왜일까요.
카라바조는 로마로 갓 상경해 돈도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밑으로 들어가 정물화나 제대화를 그리는 보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보수도 받지 못해 매일 굶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돈이 조금 생기면 술을 사 마시며 끼니를 대신했습니다. 결국 큰 병에 걸렸고 무려 6개월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흑사병이 다시 유행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카라바조가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같이 살아난 후 그린 그림입니다.
카라바조는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바로크를 연 천재 화가입니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테네브리즘(Tenebrism)'입니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법으로 어두운 곳에서 마치 촛불을 켠 듯 격렬한 명암을 줘 극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게 특징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오로지 인물과 사건에만 집중하도록 시선을 잡아두고 어느 순간 확 빨아들이는 힘이 엄청납니다. 벨라스케스, 루벤스, 렘브란트 등 바로크 거장들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테네브로시(Tenebrosi)', 이른바 '카라바조파'라 부릅니다.
카라바조는 온갖 기행을 일삼은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술, 도박, 폭행도 모자라 급기야 로마의 한 광장에서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34살때입니다. 지명수배가 내려지고 이를 피해 떠돌아다니다 4년 뒤 도망자 신세로 죽습니다. 하지만 그가 도망자 시절 그린 그림들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사람을 죽인 손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가는 곳마다 열렬한 팬덤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그림 속 희생자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습니다. 살인에 대한 참회였을까요.
■풀바디인데 무겁지 않고 발랄한 나파 와인
다시 돌아와 잔에 담긴 실레누스 타이로스 와인을 들어올립니다. 짙은 검붉은 색 와인 잔에서 나파의 잘익은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향이 진하게 피어오릅니다. 주된 과실향은 블랙계열입니다. 꽃 향과 섞여 올라오는 담뱃갑 향과 가죽 향, 연필심 향, 젖은 나뭇잎 향 등 2차 향도 아주 좋습니다. 입에 살짝 흘려보니 의외로 질감이 가볍습니다.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진한 과실향과 부드럽고 두툼한 타닌, 특히 미디엄 플러스 수준의 산도는 와인을 아주 발랄하게 만듭니다. 알코올도수 14.5%의 풀바디 나파밸리 와인임에도 전혀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와인이 입속에서 사라지고 난 후 남는 것은 잇몸과 치아를 포근포근 덮는 살집좋은 타닌, 그리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훈연향이 밴 신맛입니다. 피니시는 적어도 두세숨 이어집니다.
글 김관웅
출처 파이낸셜뉴스 fnnews.com (원본 기사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