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믿는 한 남자가 빚어낸 다섯 잔의 세계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하우스 오브 신세계’ 아펙스(Apex Room)에서 열린 한 작은 테이블 시음회 자리에서, 장 샤를 부아셰(Jean-Charles Boisset)는 등장과 동시에 공간의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실크 라펠이 은은하게 반짝이며, 제스처 하나하나가 과하지 않게 흐르고, 말의 호흡과 리듬이 배우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날의 주인공은 와인도, 브랜드도 아닌 ‘장 샤를 부아셰라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 대한 감각, 미국을 향한 긴 여정,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이끄는 근본적인 철학을 두 시간 동안 쉼 없이 풀어냈으며, 테이블 위 다섯 잔의 와인은 그 이야기의 다섯 장면처럼 이어졌다.

부조에서 시작된 한 소년의 감각
1969년 부르고뉴의 부조(Vougeot)에서 태어난 장 샤를 부아셰는 세계적인 그랑 크뤼 마을인 쥬브레-샹베르탱과 불과 3km 떨어진 곳에서 자랐다. 조부모는 지역 학교의 교사였고, 그의 어린 시절은 책보다 포도밭·텃밭·숲이 먼저 가르침을 주는 시절이었다. 그는 “할머니는 화학이 아닌 자연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셨다”라고 말한다. 벌과 곤충을 해치지 않으며, 흙이 스스로 치유하도록 돕는 방식, 땅을 만지기 전에 먼저 바라보는 태도 등. 이 모든 것들이 훗날 그의 유기농·바이오다이내믹 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1970년대는 유럽 농업에 살충제와 제초제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였다. 어린 장 샤를은 고향 마을의 변화와 토양의 상처를 직접 목격했고, 이 기억은 부모 세대가 만든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땅과 대화하는 법’을 찾게 만들었다.
열한 살의 캘리포니아 - 하나의 문장이 인생을 결정하다
그의 인생을 결정한 순간은 열한 살에 찾아왔다. 가족과 함께 미국을 처음 방문해 몬터레이에서 소노마까지 이어지는 태평양 루트를 따라 이동하던 중, 그는 풍경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부모와 부모에게 말했다.
“언젠가 저는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 겁니다.”
그 말은 단순한 소년의 감상에 머물지 않았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그는 양조를 익히고, 대학에서는 비즈니스 교육을 받으며 ‘규모 있는 와인 기업이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대 초, 그는 가족이 계획했던 미국지사 정리 계획을 뒤집고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는 결정을 내린다. 이때부터 그의 세계는 두 대륙을 자연스럽게 넘나들기 시작했다.

부아셰 컬렉션 - 두 대륙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다
그가 구축한 부아셰 컬렉션은 오늘날 약 40개의 도멘과 브랜드를 포함하는 거대한 세계다. 부르고뉴에서는 도멘 드 라 부즈레(Domaine de la Vougeraie)를 설립하며 가문의 포도밭을 하나의 목소리로 묶었고, 장-클로드 부아셰(Jean-Claude Boisset) 브랜드를 재정비하며 ‘전통의 현대적 표현’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르루아(Leroy) 출신의 천재 와인메이커 그레고리 파트리아(Grégory Patriat)를 영입해 브랜드의 수준과 감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미국에서는 데로쉐 빈야드(DeLoach Vineyards)와 레이몬드 빈야드(Raymond Vineyards)를 잇따라 인수하며 포도원을 통째로 갈아엎는 수준의 재정비를 진행했다. 두 와이너리는 전 구획 유기농·바이오다이내믹 인증을 획득했고, 나파의 레이몬드는 나파 그린(Napa Green) 인증과 태양광·물 관리 시스템까지 구축하며 ‘지속 가능한 나파의 모델’로 꼽힌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이니셜을 딴 JCB 컬렉션을 통해 와인·향수·주얼리·예술을 하나의 세계로 엮는 감각적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화려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그의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포도를 내버려 두고, 자연이 먼저 말하게 하는 것.”

“Let it be… Let the grapes be.” 최소 개입의 정교함
그가 인용한 비틀즈의 ‘Let it be’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의 양조 세계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그는 ‘포도를 내버려 둔다’고 말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치밀하고 집중적인 감각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포도는 천천히 눌러 순수한 주스만 남기는 2시간 이상의 롱 프레싱을 거치고, 펌프를 사용하지 않는 중력 이동(gravity flow)으로 부드럽게 이동한다. 디스템과 홀 클러스터의 비율은 식물성과 구조의 균형을 위해 매 빈티지 세밀하게 조율되며, 자연 효모 발효는 포도 스스로 리듬을 찾도록 돕는다. 무여과·저황 처리까지 더해져 와인은 ‘인위적 흔적’을 거의 갖지 않은 채 병에 담긴다.
그가 말하듯, 최소 개입주의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를 지우고 자연의 목소리를 증폭하는 기술”에 가깝다.
이 철학은 이날 테이블 위의 다섯 잔에서 역시 선명히 드러났다.
다섯 잔의 와인 — 장 샤를 부아셰라는 세계를 읽는 다섯 문장

장-클로드 부아셰 뫼르소 “르 리모쟁” 2019
Jean-Claude Boisset Meursault “Le Limozin” 2019
뫼르소의 고요한 에너지가 잔에서 선명하게 살아올라
르 리모쟁은 점토와 석회가 얇게 교차한 토양에서 나오는 긴장감과 밀도를 특징으로 한다. 풍만한 버터리함 대신 구운 레몬, 젖은 석회, 미세한 헤이즐넛이 구조적으로 쌓이는 스타일이며, 긴 프레싱·자연 효모·미디엄 토스트 오크가 ‘땅의 목소리’를 우선한다. 마지막 순간에 짠기 어린 미네랄이 되돌아오는 여운은 이 와인이 보여주는 본질. “땅이 말하는 뫼르소”를 명확히 드러낸다.

데로쉐 러시안 리버 밸리 샤르도네 2018
DeLoach Russian River Valley Chardonnay 2018
샤르도네가 대륙을 건너며 새 문법을 얻는 방식
러시안 리버의 차가운 안개는 포도에 ‘공기형 미네랄’을 입힌다. 구운 사과·복숭아·레몬 커드의 풍만함과 안정적인 산도가 어우러지며, 프렌치 오크는 견과류 결을 조심스럽게 더한다. 뫼르소가 돌에서 올라오는 짠 미네랄이라면, 이 와인은 새벽 공기 같은 미네랄을 가진다. 부르고뉴와 소노마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메시지를 말하는 순간이다.

장-클로드 부아셰 뉘생조르주 프리미에 크뤼 “오 샤뇨” 2022
Jean-Claude Boisset Nuits-Saint-Georges 1er Cru “Aux Chaignots” 2022
뉘생조르주의 음영이 잔 안에 조용히 내려앉은 듯한 피노누아
오 샤뇨는 북단의 프리미에 크뤼로 우아하고 세련된 캐릭터를 보여준다. 80% 디스템·20% 홀 클러스터, 23일 마세레이션, 오픈탑 발효 - 포도의 결을 지키는 방식들이 포도 자체의 레이어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라즈베리·제비꽃·흑연·젖은 흙이 층층이 쌓이며, 분필을 곱게 갈아 놓은 듯한 타닌이 긴 여운을 남긴다.

레이몬드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2015
Raymond Napa Valley Cabernet Sauvignon 2015
Old World의 절제와 New World의 힘이 한 문장 안에서 공존
나파의 고전적 카베르네 구조 속에서도 과도한 농도 대신 선명함·균형·우아함이 우선한다. 카시스·블랙베리·삼나무·시가 박스의 아로마가 레이어를 만들고, 실키한 타닌은 단단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라벨이 종이가 아닌 벨벳 패브릭이라는 점은 그의 감각적 세계관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JCB “더 서리얼리스트” 나파 밸리 레드 와인 201
JCB “The Surrealist” Napa Valley Red Wine 2015
한 사람의 철학·상징·감각을 담은 컬트 와인의 정점
해마다 3,000병 미만만 생산되는 이 와인은 프티 베르도와 카베르네 소비뇽이 농밀하게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초현실적 블렌드다. 금속 엠블럼은 그의 두 정체성.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전통과 혁신의 양면을 상징하며, 블랙베리·초콜릿·스파이스·트러플이 압도적인 깊이로 이어진다. 그는 “마지막 날 잔에 따른다면 이 와인일 것”이라 말했다.

에필로그 — 다섯 잔의 와인, 그의 인생 다섯 장면
이날 우리가 마신 것은 단순한 다섯 가지 와인이 아니었다. 부르고뉴의 흙에서 뛰어놀던 소년, 열한 살의 캘리포니아에서 미래를 예감한 청년, 두 대륙을 연결하는 세계를 구축한 기업가, 그리고 자연 앞에서 끝없이 겸손한 철학자. - 이 네 장면이 마지막 잔에서 하나로 이어졌다. 장 샤를 부아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연이 만든 것을 자연 답게 지켜주는 사람들일 뿐”이며, 포도를 내버려 두면 와인은 결국 자신의 빛을 스스로 찾아간다. 한국에서의 이 다섯 잔은 그의 긴 여정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가는 순간이었다.
수입사 국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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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배준원 사진·자료 제공 국순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