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와인 페어링은 없었다. ‘하디스 와인 페어링 챌린지’라 할까? 먼저 소믈리에에게 하디스 와인리스트와 미션을 전달한다. ‘동봉한 와인 테크닉 노트를 참조하여 페어링하고 싶은 메뉴 고르기. 단, 소비자들에게 감정이입할 것.’ 소믈리에가 주문한 메뉴는 배달앱, 백화점과 마트 식품코너, 파인다이닝 등 전 채널을 망라해 공수한다. 미션의 성패는 도전자에게 달린 바, 주은의 김주용 소믈리에가 콜에 응했으니 이미 8할의 성공은 손에 잡혔다. 기대를 많이 했음에도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미션에 대한 접근법은 소믈리에의 페어링 철학을 엿보게 했다. 주용쏨의 주문이 현실이 된 것은 아콜레이드와인코리아 석시경 매니저가 발품을 파는 동시에 배달앱에 접속하는 전천후 음식 주문 신공을 발휘했기 때문이나 그 바탕에는 K-외식산업의 독특한 지형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 한국에서의 와인 페어링이 얼마나 무한 가능성이 있는지도 실감했다. 무엇보다 실제 페어링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기도, 반대로 예상을 빗나가기도 해서 하디스의 와인 철학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미션
미션을 받고 김주용 소믈리에는 생각했다. 호주는 방대한 땅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해내는 곳이지만, 호주 와인과 음식을 페어링할 때면 단순하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그가 소리를 높였다. “대표적으로 쉬라즈를 구글 검색해보라. 대부분 붉은 고기와 매칭하고 있다. 그것이 베스트 페어링임을 부정할 순 없겠지만. 이번에는 기존 레퍼토리를 좀 배제하고 페어링의 폭을 넓혀 봐도 좋을 것 같다.” 동시에 호주 와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소비자들의 선호를 고려했다. 배달앱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주문하는 메뉴를 검색하고, 레스토랑 예약앱에서 가장 많이 찾는 식당과 웨이팅이 긴 맛집의 메뉴도 조사했다. 소믈리에의 지식과 경험을 발판삼아 한국의 식문화와 대중의 관점을 고려한 하디스 와인 페어링은 이렇게 시작된다.
1라운드: 아일린 하디 샤르도네 X 비빔밥과 칠리 새우
하디스의 최상급 레인지 중 하나인 아일린 하디, 이 레인지의 샤르도네는 서늘한 기후의 명산지로 꼽히는 태즈메이니아와 애들레이드 힐에서 엄선한 포도를 썼다. 이 2022 빈티지 와인에 김주용 소믈리에는 비빔밥을 선택하며 자신의 내공을 슬쩍 비췄다. 그는 먼저 품종에 대해 생각해봤다. 화이트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샤르도네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배제될 때가 있다. 때로 소믈리에들은 샤르도네를 페어링에 쓰는 건 너무 쉬운 길 같아 주춤한다. 미국 시장에서는 ABC(anything but chardonnay, 샤르도네만 아니면 돼)를 외칠 때도 있었다. 한국인의 소울푸드 비빔밥은 어떤가. 남은 재료 몇 가지에 고추장 한 숟가락 쓱쓱 해서 뚝딱하는, 우리에겐 특별하지 않은 메뉴. “헌데 2023년 전 세계 구글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레시피 1위가 비빔밥이었다.” 김주용 소믈리에가 최근 기사를 보여주며 말했다. 샤르도네와 비빔밥. 거 참 상징적인 조합이다. 함께 놓고 보니 새롭다. 요정 할머니를 만난 신데렐라처럼. 보다 중요한 것은 맛의 어우러짐. 이 익숙한 맛을 해체해 보자(비빔밥은 인근 ‘본죽 & 비빔밥’에서 배달시킨 것이었다). 단호박 고추장소스의 달콤하게 매운맛, 아삭하게 볶은 야채와 참기름 한 방울의 고소함, 쌀밥의 찰기가 입안에서 버무려진다. 샤르도네의 너티(nutty)함이 참기름의 고소함을 마크한다면 와인의 시트러스한 과일 풍미는 매콤달콤한 양념을 북돋운다. 음식과 와인의 바디감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김주용 소믈리에는 와인을 시음하며 “퍼포먼스가 상당히 강하다. 굉장히 아로마틱하고 오크의 과감함도 태즈메이니아의 미네랄리티도 잘 느껴진다”고 이야기했다. “호주를 넘어 샤르도네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와인”이라며 “다양한 음식들과 두루 잘 어울릴 테지만, 산도가 꽤 있는 풀바디 화이트 와인이라 비빔밥의 강한 양념에도 밀리지 않으면서 본인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아일린 하디 샤르도네를 위한 또 다른 옵션으로 칠리새우를 꼽으며 말했다. “지리적으로 호주와 가까운 싱가포르에서는 호주 와인들을 편하게 많이 볼 수 있는데, 싱가포르에서 칠리크랩과 호주 샤르도네를 맛있게 마셨던 기억이 있어서 골라봤다. 보통 해산물은 화이트 와인과 매칭을 잘 하는데도 소스가 붉은 톤으로 가면 꺼리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약간 매콤한 소스에 겉바속촉의 튀김은 이 와인과 잘 어우러진다. 물론 크리미한 소스를 선택해도 좋다.”
2라운드: 아일린 하디 피노 누아 X 고등어와 참치 초밥
아일린 하디 피노 누아는 최근 국내 수입이 시작됐다. 빈티지는 2021년. 김주용 소믈리에는 이번에도 다소 과감한 선택을 한다. “흔히 스시나 해산물에는 화이트 와인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화이트 와인과 먹었을 때 더 비릿하고 오히려 레드와 매칭해서 괜찮았던 경험도 많았다. 참치, 연어, 고등어, 장어 같은 생선을 먹을 때는 레드 와인의 타닌을 고려해본다. 특히 어려운 난이도의 해산물을 만났을 때는 약간 타닌을 가지고 있는 옅은 레드 와인을 매칭하곤 했다. 소비자들이 스시야를 갈 때 가져가는 와인도 피노 누아가 압도적이다. 그런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와인 애호가들에게 참치나 방어는 피노 누아의 소울메이트로 곧잘 언급되는 생선이다. 예상대로 참치 초밥과 아일린 하디 피노 누아의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다만 등 푸른 생선 고등어가 날것으로 나타날 때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는데, 초절임한 생강이 다소 비릿할 수 있는 고등어회의 맛을 잡아주면서 킥을 날렸다. 소믈리에의 말대로 오히려 레드 와인이기에 힘의 균형이 더 맞고 입 안에서 각종 풍미가 폭발한다. 아일린 하디 피노 누아는 태즈메이니아의 포도를 쓰며, 100% 프렌치 바리끄에서 9개월간 숙성을 거친다. 와인을 시음한 김주용 소믈리에는 “아직은 영 빈티지라 과실미가 전면에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흙냄새와 게이미(gamey, 사냥고기 같은)한 특징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3라운드: 틴타라 쉬라즈 X 탄두리 치킨과 초콜릿 푸딩
틴타라는 하디스의 탄탄한 기본기를 보여주는 레인지. 호주 쉬라즈라면 아무래도 바로사 밸리가 먼저 떠오를 테지만, 틴타라의 쉬라즈는 맥라렌 베일의 포도를 이용한다. 하디스의 홈으로 불리는 틴타라가 맥라렌 베일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김주용 소믈리에가 틴타라 쉬라즈에 맞춰 주문한 탄두리 치킨과 커리는 배달앱을 통해, 초콜릿 푸딩은 백화점 식품관에서 공수했다. 그는 “호주 쉬라즈의 향신료 특징을 고려해 치킨 중에서도 스파이시함과 향신료 향이 두드러지는 탄두리 치킨을 골랐다”며 “피쉬소스나 고수 등 향이 강한 재료가 들어가는 아시아 음식을 먹을 때는 호주 쉬라즈를 떠올려 보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맥라렌 베일의 쉬라즈가 그렇다. 바로사 쉬라즈가 좀 더 짙은 과일 풍미를 내고 쿠나와라의 것은 좀 더 드라이하면서 미네랄리티가 느껴진다면 맥라렌 베일의 쉬라즈는 유칼립투스나 민트 같은 화한 향과 허브 향이 특징이다. 틴타라의 쉬라즈는 향이 강하고 바디감도 좋은 편이지만 생각보다 진하지 않고 뒷맛이 산뜻하다는 인상을 준다. 탄두리 치킨과는 맷집도 비슷하고 스파이시한 바이브도 잘 맞아서 완벽하게 어울렸다.
히든카드 아일린 하디 쉬라즈 2020
소믈리에들이 와인 디너를 준비할 때는 사전에 와인과 어울릴 여러 음식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최상의 페어링을 찾아낸다. 이번 미션이 흥미로웠던 것은 소믈리에가 시음을 끝낸 후 최종적으로 내린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기대 이상의 마리아주에 박수칠 때도, 소믈리에가 예상한 그림에서 살짝 빗나간 페어링 결과물을 마주할 때도 있었다. 앞서 틴타라 쉬라즈와 커리 페어링은 호불호가 나뉠 수 있겠다는 결론이 났다. 서로의 스파이시함이 매운 맛을 증폭시켜서 매운 맛 마니아들은 환호하겠지만, 좋은 페어링의 정석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다. 원래 와인리스트에 없었던 아일린 하디 쉬라즈 2020이 복병으로 나타나 판도를 뒤집었다. 같은 품종이지만 틴타라 쉬라즈에 비교하면 실키한 텍스처가 압도적이고 훨씬 복합미가 뛰어난 이 와인은 세상에서 커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 틴타라 쉬라즈와는 놀랍도록 행보가 달랐다. 매운 맛을 증폭시키기보다는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음식의 강한 캐릭터를 가볍게 제압했다.
4라운드: 아일린 하디 쉬라즈 1999 X 소꼬리찜
4라운드 페어링의 포인트는 시간이다. 일단 와인이 아일린 하디 쉬라즈 1999 빈티지. 지난 세기에 만들어진 쉬라즈에는 그에 비등한 노력과 시간이 든 음식이 필요하다고, 김주용 소믈리에는 생각했다. 소꼬리찜은 장시간 뭉근하게 끓여서 고기를 연하게 하고 깊은 맛을 베이게 하는 시간이 만들어 주는 음식이라, 여기에는 또 그만한 와인이 필요한 법이다. 감사하게도 박주은 셰프가 주은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 소꼬리찜을 준비해줬다. 소꼬리찜에는 소울이 있다. 오랜 시간 천천히 숙성한 와인 앞에서는 겸허한 마음이 든다. 와인도 음식도 어떤 것은 더 캐주얼하고 어떤 것은 더 격식을 차리게 되는데, 이 태도의 온도가 맞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소꼬리찜과 아일린 하디 쉬라즈는 상당히 감동을 주는 페어링이었지만 의외로 김주용 소믈리에는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아일린 하디 쉬라즈가 더 우아하고 드라이해서 음식이 좀 무겁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런 섬세한 와인에 귀 기울 때는 좀 더 심플한 조리법으로 음식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이래서 다들 좋은 스테이크를 추천하나 보다”며 웃음을 보였다.
5라운드: 틴타라 카베르네 소비뇽 X 라구 라자냐와 보쌈
이제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가보자. 김주용 소믈리에에 따르면 카베르네 소비뇽은 가장 인기 있는 레드 품종이지만, 샤르도네와는 또 다른 의미로 레스토랑에서 페어링에 잘 안 쓰는 와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이만한 와인이 잘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산도도 좋고 포도의 개성이 아주 뚜렷하며 음식 페어링 범위도 훨씬 넓은 와인이라고. 그는 보쌈을 떠올렸다. 쌈은 그 자체로 가장 한국적인 음식 중 하나인데, 여기엔 김치도 세트다. 돼지고기를 새우젓에 살짝 찍은 다음 김치에 돌돌 말아 크게 한 입 넣고 틴타라 카베르네 소비뇽 한 모금 적시면, 든든하기 이를 데 없다. 치즈를 아낌없이 넣은 라자냐와도 좋았다. 김주용 소믈리에는 “틴타라 카베르네 소비뇽은 입 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역할도 아주 좋아서 두루두루 매칭하기 좋다”며 “케밥, 햄버거, 피자 무엇이든”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6라운드: 토마스 하디 1999 X 양꼬치와 꽁떼 치즈
또 한 번 올드 빈티지가 나왔다. 토마스 하디는 하디스 창립자의 이름을 딴 최고급 시그니처 와인이다. 1999년 빈티지는 100% 마가렛 리버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했다. 백레이블에는 2015년까지 셀러링을 하는 게 좋다고 나와 있지만, 심히 겸손한 발언이었다. 8년이 더 지난 지금도 약간의 벽돌색을 띌 뿐 와인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김주용 소믈리에는 “너무 잘 만든 와인이라 일단 그 자체로 식욕을 당기게 한다”고 최고의 찬사를 보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어린 양고기와 보르도 레드는 교과서적인 매칭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카베르네 소비뇽과 양고기 매칭은 늘 좋다. 훈연한 고기와 스파이시한 향신료가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과연 토마스 하디와 양꼬치는 뫼비우스의 띠였다.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영원히 이 사이를 맴돌아야 한다. 그는 “그릴한 음식, 애니멀한 캐릭터가 느껴지는 음식이라면 다 잘 어우러질 것”이라며 “소시지나 피순대와도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숙성한 꽁떼 치즈와도 훌륭했다.
하디스 와인을 오롯이
앞서 언급했듯, 김주용 소믈리에는 몇몇 페어링은 자신의 예상과는 달랐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틴타라 쉬라즈와 초콜릿 푸딩이다. 이 페어링을 생각한 것은 평소 “디저트랑 무슨 와인을 먹으면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서였다. 보통 그 무슨 와인에는 ‘디저트 와인이나 포티파이트 말고’라는 숨은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때 가장 괜찮은 답 중 하나는 호주 쉬라즈란 것을 익히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디스의 쉬라즈가 그의 생각 속에 있는 일반적인 호주 쉬라즈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다. 막상 시음을 해보니 그 차이가 더 컸다고 한다. 좀 더 진하고 과일의 단맛이 많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드라이하고 산뜻한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이 흥미로운 와인 페어링 여정을 거치며 몇 달 전 하디스 수석 와인메이커 헬렌 맥커시(Helen McCarthy)를 인터뷰했을 때 그녀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디스의 진실은 우아한 스타일에 있다”고, “일반적인 호주 와인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산도가 발달한 편이고 숙성력도 좋다고 그것이 하디스의 차이”라던 그 말. 음식과 페어링해보면 하디스의 차이가 더 오롯이 느껴진다.
글 강은영 사진 와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