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풍경이 느려진다. 창문을 열자, 바람에 실려 사이프러스와 포도밭에서 익어가는 햇살 냄새가 스친다. 가다 보면 오래된 베이지색 성벽이 하나둘 보이고,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볼파이아(Volpaia). 지도에는 ‘와이너리’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중세다. 흙 냄새와 햇살 그리고 오래된 시간의 향이 깃든 이 조용한 마을은 와인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끈다.

볼파이아는 이탈리아어로 ‘여우의 소굴’을 뜻한다. 실제로 와이너리의 로고에도 여우가 그려져 있다. 카스텔로 디 볼파이아(Castello di Volpaia, 이하 볼파이아)는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의 중부, 라다(Radda)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 5월, 1966년부터 볼파이아를 소유한 마스케로니-스티안티(Mascheroni-Stianti) 가문의 일원이자, 글로벌 홍보대사 겸 와이너리 오너인 페데리카 마스케로니 스티안티(Federica Mascheroni Stianti)를 만났다. 인터뷰를 통해 전통과 환경을 중심에 둔 이 와이너리의 철학이 와인에 얼마나 깊이 그리고 진하게 배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와인이 된 시간의 기록
볼파이아 성의 역사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172년에 작성된 문서에 이 마을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수백 년이 지나도 마을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 마스케로니-스티안티 가문의 열정 덕분이다.


페데리카가 보여준 마을은 중세의 건물 배치와 옛 우물, 좁은 골목길까지도 고색창연, 그대로였다. 유적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 와이너리가 있다면 보물찾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마을에 와인 셀러와 스테인리스 발효 탱크 같은 현대적인 설비를 들인다는 건 상상보다 훨씬 더 섬세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술 작품 복원가였던 그의 경력이 진가를 발휘했다. 미션은 단 하나. ‘마을을 그대로 살려 와이너리로 만드는 것’. 오래된 지붕을 열어 탱크를 넣고(사진 1, 2), 전선 하나를 깔 때도 옛 돌담을 피했다. “와인을 옮기는 파이프 하나를 설치(사진 3)할 때조차, 기존 건축물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수없이 고민했다”고. 볼파이아는 그렇게, 옛것을 지키며 새것을 품는 법을 알게 되었다. 효율보다 존중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고립’으로 완성된 테루아
마스케로니-스티안티 가문은 3대에 걸쳐 유기농 방식으로 포도밭을 관리해왔다. ‘유기농’이란 단어가 지금처럼 널리 쓰이기 훨씬 전부터, 자연의 속도에 맞춰 와인을 만들고 환경을 지켜온 것이다(공식 인증은 2003년에 받았다).
볼파이아의 입지도 독보적이다. 총 45헥타르에 이르는 포도원은 키안티 클라시코에서도 손꼽히는 고지대인 해발 400~650미터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일부 포도밭은 700미터에 이른다. 최근 걱정거리인 기후 변화의 영향을 덜 받고, 건강한 포도를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는 조건이다. 또한 포도밭을 둘러싼 숲은 외부의 영향을 막아주고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완충 역할도 한다. “좋은 와인을 만들려면, 먼저 좋은 땅이 있어야 한다. 이 순환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기농의 핵심이다.” 그의 말에는 긴 시간 쌓아온 확신이 담겨 있었다.

볼파이아 와인의 스타일은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가파른 남향 언덕에서 받는 햇빛, 밤낮의 기온차, 시원한 바람, 배수가 좋은 사암 토양까지. 신선한 과일 향과 미네랄리티, 또렷한 산도를 갖춘 우아하고 부드러운 와인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특히 산지오베제 품종 특유의 순수한 과일 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테루아 덕분이다.
품격의 계보를 잇다
볼파이아는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그란 셀레지오네는 물론 IGT급 와인과 마렘마 지역의 베르멘티노, 스푸만테 등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그 품질은 세계적인 와인 전문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인정받고 있다. 특히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2015는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선정 ‘올해의 100대 와인’에서 상위 3위 안에 오른 최초의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당시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키안티 클라시코가 고급 와인 산지로서 재탄생되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치토(Citto)는 볼파이아의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와인. 레이블에 그려진 시계는 천체 주기를 상징하는데 수확과 양조의 타이밍을 자연의 리듬과 질서에 맡긴다는 의미다. “인간의 와인 메이킹은 거들 뿐”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좋은 와인은 자연의 허락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산지오베제와 카베르네 소비뇽이 블렌딩된 치토는 부드럽고 캐주얼한 매력을 가져 부담 없다.
볼파이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콜타살라(Coltassala)를 마셔봐야 한다. 첫 싱글 빈야드 와인이자 그란 셀레지오네 등급의 와인. 1980년에 산지오베제 95%, 맘몰로 5%를 블렌딩해서 출시했다. 마셔보면 깊이와 섬세함, 부드러운 타닌과 단단한 구조감, 뛰어난 밸런스에 압도당하는데, 산지오베제의 가능성을 한껏 끌어올린, 가장 우아한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이 가능한 와인
바롤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최근 에트나까지 수많은 와인의 강세 속에서 키안티 클라시코는 종종 잊힌다. 하지만 볼파이아는 굳건히 자리를 지켜 왔다. 스펙터클은 없더라도, 일상 속에서 꾸준해서 좋고 손이 가는 와인. 숙성 잠재력도 충분한 미덕을 가졌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10년, 리제르바는 15년 이상 그리고 콜타살라는 20년을 넘겨도 흔들리지 않는다.
요즘은 무알코올 혹은 저알코올 주류가 대세다. 그런 흐름에 관해 볼파이아의 의견을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트렌드를 따라갈 생각이 없다. 와인은 자연에서 온 것이고, 알코올은 그 자연의 일부다. 알코올을 제거하는 건 오히려 인위적이다.” 정체성을 잃지 않는 단단함, 속도보다 시간을 따르는 볼파이아의 철학은 좋은 와인, 더 나아가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볼파이아의 와인들

프렐리우스 베르멘티노 2022(Prelius Vermentino 2022)
생산지 토스카나 마렘마
품종 베르멘티노 100%
양조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숙성, 6개월간 리(lees) 숙성 후 3개월간 병 숙성
알코올 13%
테이스팅 노트 밝은 볏짚 옐로우 컬러를 띤다. 플로럴한 아로마와 시트러스, 파인애플 그리고 미네랄 향이 부드럽게 피어난다. 잘 균형 잡힌 산도가 입안을 상쾌하게 하는 우아한 와인으로, 신선한 과일이 입안에서 폭발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문어 카르파치오, 멘보샤, 올리브 튀김, 샐러드와 잘 어울린다.

치토 2023(Citto 2023)
생산지 토스카나
품종 산지오베제 90%, 기타품종 10%
양조 20~26°C의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약 10일간 발효 후, 8일간 휴식을 갖고 젖산 발효 없이 마무리
알코올 13.5%
테이스팅 노트 루비 컬러를 띤다. 레드 체리, 라즈베리와 같은 베리 향에 약간의 후추, 가죽 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입안에서는 벨벳 같은 부드러운 텍스처에 강렬한 베리 향이 따라온다. 균형 잡힌 산도와 부드러운 타닌이 조화를 이룬다. 화덕 피자, 샐러드 파스타, 볼로네제 파스타와 잘 어울린다.

키안티 클라시코 DOCG 2021(Chianti Classico DOCG 2021)
생산지 토스카나 키안티 클라시코
품종 산지오베제, 메를로
양조 2021년 9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손수확한 포도를 12개월간 라지 캐스크에서 숙성한 후 병입
알코올 13.5%
테이스팅 노트 루비 컬러. 야생 딸기, 체리, 라즈베리와 같은 붉은 과실향의 프루티한 아로마에 약간의 장미 향이 어우러진다. 활기찬 타닌감과 균형 잡힌 구조감이 입안을 상쾌하게 하며, 프루티한 마무리가 기분 좋은 피날레를 선사한다. 추천 페어링은 크림 파스타, 치즈 버거, 흰 살 생선구이, 츠쿠네, 크로스티니 등이 있다.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DOCG 2021(Chianti Classico Riserva DOCG 2021)
생산지 토스카나 키안티 클라시코
품종 산지오베제 100%
양조 손 수확한 포도를 사용하여 24개월간 프렌치 바리크와 슬로베니안 배럴에서 숙성, 병입 후 3개월간 추가 숙성
알코올 14%
테이스팅 노트 약간의 가넷을 띠는 루비 컬러. 우아한 약간의 향신료 뉘앙스와 체리, 오렌지 필과 같은 과일 향과 약간의 허브 향이 뒤따라온다. 체리, 초콜릿, 무화과 풍미가 부드러운 타닌과 긴 여운이 탄탄한 구조를 보여주며 생동감을 유지한다. 마르게리따 피자, 오일 파스타, 볼로네제 파스타, 구운 포르치니 버섯에 곁들이면 좋다.

키안티 클라시코 그란 셀레지오네 콜타살라 2020(Chianti Classico Gran Selezione Coltassala 2020)
생산지 토스카나 키안티 클라시코
품종 산지오베제 95%, 맘몰로 5%
양조 손수확한 포도를 24개월간 새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 병입 후 최소 6개월간의 추가 숙성
알코올 14%
테이스팅 노트 비비드한 루비 컬러를 띤다. 우아한 약간의 바닐라, 카카오, 에스프레소의 아로마와 약간 스파이시한 플럼 향이 어우러져 부드럽게 퍼진다. 입안에서는 말린 체리, 감초, 담배 향과 크림처럼 부드러운 텍스처가 느껴진다. 균형 잡힌 산도와 부드러운 타닌이 조화를 이룬다. 추천 페어링 음식으로는 올리브 튀김,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 볼로네제 파스타, 구운 포르치니 버섯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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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까브드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