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박세회
원문 <에스콰이어>
16명의 와인 저널리스트들이 버스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올라가며 15개의 와이너리와 빈야드를 견학하는‘와인즈 온 어 미션’ 트립에 <에스콰이어>가 참가했다. ‘지속가능성’을 향해 포도 재배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현장을 목도했다.

파이시네스 랜치에서 만난 남자
5일째였다. 10개국에서 모인 16명의 와인 저널리스트들이 한 버스를 타고 샌타바버라의 ‘밸리 프로젝트’에서 출발해 지속 가능한 포도 재배에 힘쓰는 15개의 포도농장 혹은 와인 양조장을 탐방하는 ‘와인즈 온 어 미션’(Wines on a Mission) 여행의 다섯 번째 날. 우리는 샌타바버라에서 산타마리아 밸리로,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 파소로블레스로, 드디어 샐리나스강을 따라 몬터레이까지 올라와 이제 막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참이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몬터레이 해변에서 내륙으로 향하더니 허름한 목조 건물들이 서 있는 광활한 구릉지 앞에 우리를 내려줬다. 저 멀리엔 끝없는 구릉의 녹지가 굽이굽이 이어졌고, 눈앞에는 수리가 필요해 보이는 트랙터와 농기계들이 거대한 슬레이트 지붕 창고 안에 줄지어 있었다. 그곳 ‘파이시네스 랜치’(Paicines Ranch)는 포도밭 입구에 예쁜 건물이 있고, 그 안에 팬시한 테이스팅 룸이 마련되어 있었던,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빈야드 혹은 와이너리들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잠시 후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나타나 마치 예수처럼 우리를 이끌고 언덕으로 향했다. 나는 포도밭이 대체 어딨나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포도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언덕 중턱에서 잠시 멈춘 남자가 얘기했다. “이곳 파이시네스 랜치는 총 7,800에이커 규모이고, 그중 포도원은 약 25에이커 정도예요. 600에이커의 땅에는 다른 작물들을 재배하고 나머지는 목초지로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지요.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농업 방식입니다.” 올해로 26년 차이자 이 거대한 농장의 디렉터인 켈리 멀빌이 말했다. 켈리는 짐바브웨 출신의 생태학자 앨런 세이버리와 함께 캘리포니아 농업, 특히 와인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다.
켈리와 앨런이 대표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포도 농업의 새로운 동반자가 바로 ‘양’이다. ‘음매’ 하고 우는 바로 그 동물. “애초에 이 땅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어요. 바이슨, 엘크, 프롱혼 떼가 이 땅을 뛰어다녔죠. 농업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동물들을 전부 사라지게 했지요. 그래야 밭의 생태계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한 짓이 오히려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동물들의 배설물, 특히 소변이 이 땅을 비옥하게 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죠.” 켈리가 말했다. 잠시 후 그의 동료들이 양 떼를 몰고 왔다. “우리가 양 떼를 포도의 생장기에 풀어놓는 이유는 이 양 떼들이 커버 크롭을 뜯어먹고 작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배변 활동을 하면서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이 양들이 우리가 잃어버린 홀리스틱 에코 시스템을 완성하는 역할을 하지요.”
양 떼들은 홀리스틱 에코 시스템의 또 다른 단추인 커버 크롭(포도밭을 뒤덮고 있는 잡풀들)과 짝을 이룬다. 16개의 와이너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수없이 들은 이야기가 바로 ‘커버 크롭’에 대한 이야기였다. 포도나무 옆에서 자라는 커버 크롭은 보통 포도나무가 마셔야 할 물을 두고 경쟁하는 잡풀, 혹은 병충해를 옮기는 벌레와 균주의 재배 온상으로 여겨져 제초제를 뿌려 제거해야 하는 잡초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포도 재배 연구자가 커버 크롭의 장점을 설파하고 있다. 포도나무와 나무 사이에 커버 크롭을 자라게 두면 이 커버 크롭들이 지열이 지나치게올라가는 현상을 방지하고,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 빛을 가려주어 흙 속의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밭갈이를 하면 죽은 커버 크롭이 토양에 흡수되어 자연 퇴비 역할을 한다.
그러나 와인 애호가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커버 크롭이 와인이 가진 복합미를 끌어올린다는 사실에 있다. 여정 첫날 우리는 디어버그 앤 스타레인 빈야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스타레인의 포도밭 인근에 옐로 머스터드 꽃이 만개했는데, 그 꽃이 너무도 맛있어 보여(그렇다, 나는 종종 포도밭에 나는 작품들을 뜯어 먹어보곤 한다) 한 송이를 뜯어 먹어봤다. 놀랍게도 그 꽃에서는 머스터드의 알싸한 맛과 함께 마치 바질이나 와일드 루콜라를 연상케 하는 감칠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가 마신 스타레인의 와인에 그 맛이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빈야드의 경영자이자 와인메이커인 타일러 토마스가 내게 뜯어준 세이지에서는 유칼립투스와 레몬그라스의 풍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점심에 마신 디어버그 피노 누아 2021에서 세이지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와인의 껍질에는 수많은 물질이 달라붙는데, 커버 크롭과 주변 식물들의 향미 물질들이 공기 중에 날아다니다 들러붙어 양조 과정에서 섞이기 마련이죠.” 타일러가 말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문제는 이 커버 크롭을 어떻게 적정 수준으로 통제하느냐다. 커버 크롭이 너무 자라면 포도나무가 흡수해야 할 토양 속 수분을 모두 흡수해 자칫 나무를 말라 죽게 할 수 있다. 컨벤셔널한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었다. 제초제를 뿌려 애초에 죽이거나, 제초기로 깎거나, 트랙터를 타고 아예 밭을 갈아버리거나. 많은 오가닉 농가가 택한 방식은 ‘트랙터’를 이용한 ‘틸링’(tilling, 밭갈이)이었다. 여기서 캘리포니아 포도 재배자들에게 햄릿의 문제만큼 중요한 질문이 등장한다. 바로 ‘틸(till)이냐 노틸(no-till)이냐’의 문제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밭갈이는 커버 크롭과 토양의 표면을 인위적으로 파괴하며 토양의 얕은 심층을 표토 위에 섞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면 식물이 뿌리 내리기 더 좋은 부드러운 토양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지켜보다 보니 밭갈이에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게 타일러의 생각이다. “한 10년 동안 밭갈이를 주기적으로 한 땅과 밭갈이를 주기적으로 하지 않은 땅의 데이터를 살펴봤어요. 언뜻 생각하면 밭갈이를 하면 땅의 표층이 부드러워질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트랙터의 무게 때문에 오히려 땅이 눌려 더 단단해진다는 것이죠.”
아주 오래전에 유튜브에서 본 한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부르고뉴의 가장 유명한 그랑 크뤼 밭인 라타슈,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가 포도를 경작하는 모노폴(단독 소유) 밭인 바로 그 라타슈 밭에선 트랙터 때문에 일어나는 토지 압착을 막기 위해 소에 쟁기를 물려 밭을 간다는 사실이었다. 밭을 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포도나무와 경쟁하는 잡초들을 주기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표토층의 다공성을 늘리기 위해서다. 물이 빨리 흡수되고, 지렁이가 기어 다닐 수 있는 다공성의 흙에서 포도나무 역시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는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제초제를 쓰지 않고 최대한 트랙터를 적게 쓰면서, 커버 크롭의 활성화를 통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켈리 멀빌이 도달한 답이 바로 ‘양’이다. 켈리와 파이시네스 랜치만 양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센트럴코스트 와인 재배의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와이너리 중 하나인 타블라스 크릭은 역시 제초제를 쓰지 않고, 커버 크롭을 키우며, 양을 풀어 커버 크롭의 생장을 통제한다. 다양한 수종의 식물들을 좁은 공간에 식재해 단기간에 전체 식물들의 생장을 촉진하는 ‘미야와키 포레스트’를 포도원 안에 조성해 탄소 배출 마이너스를 달성 중인 샤미살 빈야드 역시 양으로 커버 크롭을 통제한다. 호프 패밀리 와인스 역시 겨울철엔 자신들의 에스테이트 빈야드에 양을 풀어 잡초를 제거한다. 여러 와이너리들이 양 떼를 포도밭에 들이고 싶어 하는 현상 때문에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을 정도다. “여러 와이너리들이 양 떼를 농업에 쓰고는 싶어 하지만 사계절 관리할 여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양 떼를 관리하고 대여(lease)하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어요. 지금 저희 땅에 있는 양들도 리스한 것들이에요. 이 양 떼들이 캘리포니아 전역의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잡초를 먹어요.” 샤미살 빈야드의 브리앤 잉글스가 말했다.
물론 양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여러 농가에서는 오래전부터 토지가 압축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양을 키워왔다. 다만 켈리 멜빈의 파이시네스 랜치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양을 이용한 제초 작업을 일 년 내내, 심지어 포도의 생장기에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양을 포도 생장기 내내 풀어놓습니다. 포도의 새순이 솟아나는 높이를 약 66~70인치 정도로 사람 가슴 높이까지 올려 V자로 벌어지게 고정시키는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이렇게 솟아난 새순을 위로 향하게 해 양이 절대 포도잎이나 포도는 따 먹지 못하도록 했지요.” 켈리가 말했다. “양들이 커버 크롭을 먹고 배변을 하며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나니 포도밭의 생태계가 점점 풍부해지고 있어요. 포도밭을 처음 조성했을 때 이 밭에 자라는 커버 크롭의 종류는 불과 11종이었지만, 현재는 100종이 넘어요.” 켈리가 말했다.

건강한 땅을 물려주기 위해
양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제초제를 쓰지 않고, 토양 미생물의 다양성과 토양 유기물의 양을 늘리는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지속 가능한 농법으로 땅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재생 유기농법과 관련해 가장 앞서 있는 기관 중 하나는 ‘리제너러티브 오가닉 파운데이션’으로 이들이 인증하는 재생 유기농법 인증 와이너리는 포도 재배와 포도 양조 전반에 걸쳐 지속가능성을 중점에 둔다. 파소로블레스의 로버트 홀 와이너리는 재생 유기농법이 포도밭과 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와이너리가 직접 경작 중인 전체 포도원의 3분의 1을 대상으로 재생 유기농법을 활용하며, 기존의 포도 재배 기술로 경작한 다른 포도밭 그리고 그 밭에서 난 포도와 비교 중이다.
재생 농업의 핵심은 살충제, 제초제, 살균제,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커버 크롭을 활용하며, 기계를 이용한 밭갈이를 최소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예를 들면 포도 농사에 가장 치명적인 밀리 벅(mealy bug)이라는 해충이 있는데, 우리말로는 깍지벌레라고 한다. 이 해충은 습하고 따듯할 때 활개를 치는데, 이를 제거하기 위해 밭에 모벤토라는 살충제를 뿌리는 대신 이 밀리 벅을 잡아먹는 깍지무당벌레 a.k.a ‘밀리 벅 디스트로이어’를 드론으로 살포했다. 밭갈이를 하지 않고 커버 크롭을 키웠으며 커버 크롭의 생장 통제에는 제초제가 아닌 제초기를 사용했다. 이들의 와이너리를 방문했을 때 나는 여러 빈티지의 실험군과 대조군 와인들, 즉 컨벤션 농법과 재생 유기농법으로 경작한 포도로 만든 와인들을 비교 테이스팅했는데, 재생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와인들이 탁월한 복합미를 보였다. 운 좋게도 테이스팅을 할 때 내 옆에는 와인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제작해 제임스 비어드 상과 애미 상을 수상한 와인 전문가 매리 올린이 앉아 있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재생 유기농법을 사용한 와인일수록 복합미가 뛰어난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지속 가능한 포도 재배를 위한 노력은 포도밭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파소로블레스의 타블라스 크릭은 재생 유기농 인증을 받은 캘리포니아 최초의 와이너리다. 실제로 타블라스 크릭의 포도원에 들어서 수십 종의 커버 크롭들이 섞인 아름다운 향을 맡는 순간 밭의 포도들이 얼마나 건강하게 생장 중인지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타블라스 크릭은 환경을 위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 있다. 이를테면 와인을 유리병에 넣지 않고 박스에 넣는 것이다. “아마 다들 아실 거예요. 이게 얼마나 큰 모험인지.” 타블라스 크릭의 어시스턴트 와인메이커 첼시 프랭키가 3L짜리 종이 박스에 든 파틀린 드 타블라스 로제를 들고 말했다. “유리병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열이 필요하고, 이 열을 만들기 위해 또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요. 와인을 박스에 포장하면 기존 유리병에 비해 탄소 배출량을 84% 줄일 수 있어요.” 첼시의 말이다. 미국 내에서는 박스에 포장된 와인은 대형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저가형 와인이 대부분이고, 이 와인들의 가격은 30달러 내외다. 그러나 타블라스 크릭은 저가 와이너리가 아니다. 프랑스 론 밸리의 슈퍼스타 샤토 드 보카스텔의 페랑 가문과 손잡고 론 버라이어티(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 등)를 일찌감치 미국에 들여온 ‘론 레인저스’(캘리포니아의 론 품종 생산자)이자 재생 유기농법의 선구자인 타블라스 크릭은 굳이 구분하자면 ‘럭셔리 와이너리’에 속한다. 그러나 와인을 3L들이 박스에 넣어 판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인 셈이다. “그뿐 아니라 테이스팅 룸에서 몇몇 종의 와인을 케그로 제공하고 있고, 대표 제품들의 유리병은 무거운 병 대신 가벼운 유리로 대체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탄소 배출 감소 효과가 있지요.” 첼시의 말이다.

지금 와인이 해야할 일
여기서 잠시 우리가 함께 떠난 ‘와인즈 온 어 미션’(Wines on a Mission) 트립의 본질을 되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캘리포니아 와인 협회(CWI)가 16명의 저널리스트들을 초대한 것은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들이 지속가능성을 위해 기울이는 ‘다양한’ 노력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다양한’에 방점이 찍힌다. 그리고 그 다양한 노력에는 위계가 없다. “캘리포니아에는 수많은 인증 시스템이 있어요. 지역적인 것으로는 ‘SIP’(Sustainable in Practice)가 있고, ‘CCSW’(Certified California Sustainable Winegrowing), ‘NAPA GREEN’, 비오디나믹 인증인 ‘Demeter’, 오가닉 인증인 ‘USDA Organic Certification’ 등 수많은 인증 시스템이 있지요. 한때는 뭐가 더 엄격하고 인증받기 힘든지, 어떤 시스템이 더 나은지를 두고 경쟁을 벌이듯이 싸우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 지나가고 각 빈야드와 와이너리의 상황에 따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 트립의 책임자인 케이트 베뉴고팔(Kate Venugopal)이 말했다.
그녀의 말은, 이를테면 캘리포니아의 지속가능 포도 재배를 처음으로 주장한 J.로어 와인 그룹의 공동 CEO인 스티브 로어의 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건 훨씬 더 크게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작업장의 공기 질, 와이너리에서의 물 사용, 토양 매니지먼트를 비롯해 커뮤니티와의 관계까지 모든 것에 대해서 지속가능성을 따져봐야 하는 거죠.” 스티브 로어의 말이다. 어쩌면 이런 문제들이 좋은 품질의 포도를 재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저기 있는 롤업 도어를 보세요.” 우리는 천장이 10m는 넘어 보이는, 수십 개의 발효조가 가득 찬 거대한 공장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저 자리에는 원래는 보통의 창고에 있는 육중한 철재로 된 셔터밖엔 없었습니다. 우리는 2012년 철제 셔터 안쪽에 가벼운 재질의 자동 롤업 도어를 만들었죠.” 그 문들 사이로는 3~4m 높이의 지게차들이 지나다녔는데, 지게차가 문 앞에 다가서자 롤업 도어는 순식간에 위로 말려 올라간 뒤 다시 내려와 내외부를 차단했다. “저렇게 빠르게 열리고 닫히는 롤업 도어는 한여름에 발효가 일어나는 이곳 발효창고의 냉기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죠. 우리가 저 롤업 도어들을 설치할 때 개당 1만2000달러였지만, 18개월 만에 냉방비를 절약하는 것으로 본전을 뽑았어요. 그러니까 지속가능성이란 현명한 경영 전략이기도 한 거죠.” 스티브가 손가락을 튕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체적인 지속가능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고고한 와이너리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부르고뉴라 불리는 산타루치아 하이랜드 AVA의 창조자 격인 피소니 빈야드(Pisoni Vineyard)다. 로마네 콩티에서 깊은 영감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개리 피소니가 채소 재배 업자였던 아버지의 말 농장이 있던 자리에 피노 누아를 심겠다고 달려든 게 산타루치아 하이랜드 포도 재배의 시작이다. 10여 년 동안 최고의 피노 누아로 여러 와인메이커들에게 사랑받던 개리 피소니의 포도밭은 이제 그의 아들 마크 피소니가 이어받아 경작하고 있다. 마크의 형인 제프 피소니는 동생이 키운 포도를 양조해 캘리포니아 최고의 피노 누아인 ‘피소니 에스테이트’를 비롯해 ‘루치아 바이 피소니’를 생산한다. 피소니 빈야드를 찾은 날 우리는 운 좋게도 마크 피소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는 비오디나믹 농법, 오가닉 농법, 컨벤셔널 농법을 모두 결합한 형태를 활용하는 것 같아요”라며 “우리는 커버 크롭을 기르고, 비료도 직접 만들어요. 제 형인 제프가 와이너리에서 남은 껍질을 보내준 것과 제 딸이 가끔 승마 레슨을 받는 바로 길 건너편 목장의 말똥을 퇴비로 주죠. 포도 재배의 모든 과정을 손으로 합니다”라고 말했다. 피소니 빈야드는 오가닉이나 비오디나믹을 비롯해 그 어떤 인증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땅에서 나는 것이라면 물로 씻지 않고 생으로 전부 먹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다시 잠시 파이시네스 랜치로 돌아가보자. 파이시네스 랜치의 포도 재배 팀원 중에는 리지 홀리먼이라는 이름의 스태프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듯 보였지만, 경력이 꽤나 길었다.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하고 해외 와인 농장에서도 일해봤다는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 포도를 기르는 곳은 처음이에요. 우린 정말 자연에 모든 걸 맡기고 있어요. 이쪽에 있는 포도나무들이 듬성듬성 사라진 게 보이죠?”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쪽에는 하나 걸러 하나씩 포도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들쥐가 한 짓이에요. 그 녀석들이 나무 그루터기를 전부 갉아먹어서 포도나무가 죽었죠. 그러나 들쥐를 죽이기 위해 약을 치거나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새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죠. 맹금류들이 이 쥐들을 잡아먹을 수 있게요. 이 농장의 모든 것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요.” 마치 뭔가에 취한 듯 열심히 설명하는 그녀에게 나는 파이시네스 농장에서 일하는 게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여기서 일하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녀의 대답이 지속 가능한 농법이 추구하는 모든 미래의 집약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것들이 동시대를 너머 미래 세대에게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하는 것. 우리의 모든 생산 활동이 자랑스럽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지속가능의 요체다.

글·사진 박세회
원문 출처 <에스콰이어> esquire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