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할란 에스테이트(Harlan Estate), 달라 발레(Dalla Valle), 스태글린(Staglin) 등 캘리포니아의 유명 컬트 와인을 만들어 온 와인메이커 앤디 에릭슨(Andy Erickson). 로버트 파커 100점 와인을 여럿 탄생시키며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던 그가 지난 2017년 후니우스 패밀리(Huneeus Family)에 합류했다. 그의 와이프이자 포도 재배 전문가 애니 파비아(Annie Favia)와 함께. 1960년대에 칠레 콘차이토로(Concha y Toro)의 CEO였다 캘리포니아 드림을 이룬 신화적 존재 어거스틴 후니우스(Augustin Huneeus)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이들은 새로운 꿈을 펼쳐가는 중이다. 얼마 전 앤디 에릭슨과 애니 파비아와 함께 두 사람의 와인을 테이스팅할 기회를 가졌다. 부부가 와인을 만들어 온 시간만큼 이들의 와인과 이야기에는 자연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 여자 재배 그 남자 양조
먼저 그 남자 앤디 에릭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1994년부터 나파 밸리에 거주하며 여러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와인메이커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UC 데이비스 포도 재배 및 양조학 석사 학위를 받은 2000년부터. 할란 에스테이트를 시작으로 굵직한 와인 브랜드들의 와인메이커로 활약하던 중, 그는 와이프인 애니 파비아와 함께 2003년 파비아 와인(Favia Wines)을 설립했다. 그의 유일한 레드 블렌드 와인인 레비아탄(Leviathan)을 처음 만든 것은 이듬해. 앤디 에릭슨을 수식하는 대표 와인인 스크리밍 이글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다섯 개 빈티지를 만들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는 본인 소유의 두 브랜드인 파비아와 레비아탄에 더욱 집중하면서 여러 와이너리의 컨설턴트로 활약해 왔다. 현재 컨설팅을 맡고 있는 와이너리는 약 열 곳, 캘리포니아는 여전히 이 미다스의 손을 필요로 한다.
그 여자 애니 파비아가 나파 밸리에 온 것은 앤디보다 한 해 이른 1993년이었다. 대학 시절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자연스레 와인의 매력을 알게 된 그녀지만, 프랑스 인문학 전공자가 와인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데는 필연 같은 우연이 존재한다. 통번역 일을 하며 취재하게 된 존 콩스가르드(John Kongsgaard)와의 만남이 바로 그것. 존 콩스가르드의 지도 아래 뉴튼 빈야드(Newton Vineyards)에서 와인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포도가 싹을 틔우고 자라는 과정에 완전히 매료되어 포도 재배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여성이 적은 와인 업계에서 애니는 존경받는 여성 와인 생산자인 캐시 코리슨(Cathy Corison)을 롤모델 삼아 함께 일하며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포도 재배 전문가로서의 핵심 이력은 데이비드 아브루 빈야드 매니지먼트(David Abreu Vineyard Management)라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10년 이상 일하며 나파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여러 포도원을 직접 관리·감독했기 때문이다. 남편인 앤디 에릭슨과 함께 캘리포니아 슈퍼스타 커플로 불리는 이유가 단지 부부여서만은 아님을, 그녀가 걸어온 길에서 알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멘토가 되기도 하고 영감을 주기도 하며 함께 와인을 만드는 앤디 에릭슨과 애니 파비아. 퀸테사(Quintessa), 플라워스(Folowers), 파우스트(Faust) 등 지역성과 탁월함을 담은 프리미엄 와인 브랜드를 보유하고 관리해 온 후니우스 패밀리에 2017년 합류함으로써, 이들은 와인 생산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그 여자가 재배하고 그 남자가 양조한 와인을 만나러 가볼까?
파비아 : 쿰스빌 AVA의 근원
파비아는 포도 재배 전문가 애니 파비아와 와인메이커 앤디 에릭슨의 협업으로 2003년 탄생한 와이너리다. 1872년 나파 쿰스빌(Coombsville) 지역에 조성된 포도밭을 애니가 복원했고, 여기서 생산된 포도로 ‘포도밭의 진정한 본질과 영혼이 담긴 와인’을 앤디가 양조하는 방식으로 이 콜라보는 완성된다. 쿰스빌이 AVA로 지정된 것이 2011년의 일이니, 이 지역의 특별함을 앤디 부부가 먼저 알아봤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게다가 파비아의 포도밭은 쿰스빌 지역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쿰스빌 지역의 첫 번째 이탈리아 이민자 가문인 카르보네(Carbone) 가문이 조성한, 이 지역 최초의 포도밭이라 여겨지는 곳이기 때문. 이 가문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부부는 와이너리 건물과 셀러, 농장 등을 10년 전 구입할 당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포도나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식물과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애니 파비아답게, 포도밭은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 방식으로 관리된다.
파비아 와이너리에 대한 소개에 이어, 파비아 세로 수르(Favia Cerro Sur)를 2014 빈티지로 함께 테이스팅했다. 카베르네 프랑 85%에 카베르네 소비뇽 15%가 블렌딩된 이 와인은 카베르네 프랑에 대한 애니 파비아의 애정이 듬뿍 담긴 와인이다. 파비아 와인을 처음 시작할 당시, 캘리포니아 전체 포도 생산량의 단 3%만 차지할 정도로 마이너한 품종이었던 카베르네 프랑에 이들이 주목한 이유가 무엇일까. 애니는 “과일 향이 지배적이지 않고 향신료 노트가 깔려 있어 음식에 잘 어울린다”는 점을 첫 번째로 꼽았다. 또 와이너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부부가 젊었던 점도 한몫했다는데,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카베르네 프랑이 높은 비율로 블렌딩되는 경우가 없었다. 실험적인 것을 좋아하여 카베르네 프랑을 주품종으로 사용했는데 그게 잘 작용했다”라고. 다른 와인 생산지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캘리포니아에서 카베르네 프랑은 손이 많이 가는 품종이다. 그걸 감수하고 만들 만큼 루아르 밸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고, “We love the challenge”라 말하며 웃는 애니에게서 찐 카베르네 프랑 러버의 미소를 보았다. 거의 10년이 지났음에도 신선한 베리류 과일과 꽃, 허브의 아로마가 초콜릿, 버터, 커피, 홍차의 노트와 조화를 이루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입 안에서 번지는 이 와인. 애니 파비아의 거울과 같은 와인 아닐까.
반면 파비아 쿰스빌 카베르네 소비뇽(Favia Coombsville Cabernet Sauvignon) 2020에서는 쿰스빌의 테루아가 잘 드러난다. 나파 밸리에서도 샌프란시스코만에 근접한 편이라 쿰스빌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다. 덕분에 동일하게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든 다른 나파 밸리 와인에 비해 레드 계열 과일과 드라이 허브 등의 가벼운 향이 많다. 시원한 기후를 선호하는 것은 쿰스빌의 테루아뿐만 아니라 빈티지에서도 마찬가지. 애니는 "비평가들이 따뜻한 빈티지를 좋아하는 것과 반대로 시원한 빈티지를 더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직접 재배한 유기농 허브 티를 론칭할 정도로 자연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녀가 재배한 포도로, 앤디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와인을 만든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로우테크(Low-Tech)"한 편이라고. 최첨단 양조 시설이 즐비한 캘리포니아에서, 그것도 스타 와인메이커라 불리는 앤디 에릭슨이 말이다. 포도가 수확되어 들어올 때부터 어떻게 양조할지가 그려진다는 그는 포도 본연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와인을 만든다. 2020 빈티지로 만나본 와인은 블랙 커런트, 블랙베리, 흑연, 카카오, 드라이 허브가 차분하게 펼쳐지고, 결이 촘촘한 타닌이 구조감을 완성하는 와인이었다. 클래식한 고급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이지만 아직은 수즙음을 간직한 와인. 곧 멋지게 익어갈 것 같다.
레비아탄 : 앤디 에릭슨이 편안함을 추구하면
레비아탄의 시작점에는 파비아가 있다. 2004년, 파비아 와인을 만들고 남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베르네 프랑에 메를로와 시라를 블렌딩하여 만든 와인이 레비아탄이었던 것.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컬트 와인과 하이엔드 와인을 만들며 유명세를 탄 앤디 에릭슨의 이 유일한 레드 블렌드 와인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처음엔 400케이스로 소량 생산했지만 수요에 따라 와인은 변화해 갔다. “파비아의 세컨 격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프로젝트”라는 게 앤디의 설명. 미쉘 롤랑과 협업하며 블렌딩을 배우고 경계가 없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앤디는 “빈티지마다 다양한 지역과 품종, 테루아를 활용하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레비아탄의 진화 과정을 설명했다. 이번 2021 빈티지의 경우에도 소노마 카운티의 문 마운틴(Moon Mountain) AVA, 나파 밸리의 쿰스빌 AVA, 레이크 카운티의 레드 힐(Red Hills) AVA의 포도를 블렌딩했다.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63%, 메를로 12%, 프티 시라 10%, 시라 6%, 프티 베르도 6%, 카베르네 프랑 3%. 다음 빈티지는 어느 지역의 포도를 어떤 비율로 블렌딩할지 벌써 궁금해진다.
레비아탄의 레이블은 앤디의 친구가 와인이 탄생하기 전부터 먼저 만들어 둔 것이다. 강렬한 블랙-골드 조합의 레이블엔 고대 해양 괴물로 알려진 ‘레비아탄’이 형상화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거대한’이란 의미도 있는 레비아탄이지만, 그에 맞춰 볼드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 건 아니다. 대신 앤디는 “밸런스 좋고 직관적으로 맛있는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레이블의 레비아탄처럼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독창적인 와인을 만들어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게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2021 빈티지로 만나본 레비아탄에서는 검붉은 베리류 아로마와 함께 독특한 드라이 허브, 향신료의 향이 겹쳐졌다. 그리고 앤디가 그동안 선보인 수많은 컬트 와인과는 다르게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100점짜리 고가 와인이야 늘 선망의 대상이지만,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건 이런 친근하고 접근성 좋은 와인일 테다. 거기에 미다스의 손 앤디 에릭슨이 매년 다른 개성을 부여해 만드는 와인이라니, 이 편안함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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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동원와인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