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습니까? 테루아
수많은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을 설명할 때마다 하나같이 기승전 테루아다. 무슨 신흥종교도 아닐 텐데, 왜 그토록 테루아를 주장하는 걸까? 같은 품종이라도 자갈 토양과 진흙 토양에서 나는 와인의 맛 차이가 확연한다고 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테루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테루아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휴 존슨(Hugh Johnson)과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이 공저한 <월드 아틀라스 와인(8번째 개정판)>은 테루아에 관해 "토양 그 자체, 토양과 연결된 포도나무의 뿌리, 하부토와 그 밑에 있는 암석, 토양의 물리적·화학적 성분, 지형의 영향을 받아 토양 속 살고 있는 생물 그리고 기후와 날씨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테루아는 복잡하고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기후변화가 심화됨에 따라 테루아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나파 밸리 러더포드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퀸테사(Quintessa)는 1989년 설립 이래로 꾸준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테루아를 탐구해왔다. 지난 8월 15일, 퀸테사 2021과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2023의 9월 출시를 앞두고 열린 글로벌 온라인 와인 테이스팅을 통해 퀸테사가 테루아에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한 걸음만 옮겨도 확연히 다른 나파 밸리의 다양한 테루아를 알게 되었다.
Only One, 퀸테사
테이스팅을 진행한 와인메이커, 레베카 와인버그(Rebekah Wineburg)는 퀸테사 2021을 "퀸테사가 30년 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담아낸, 퀸테사의 철학과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와인"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보르도 블렌딩의 레드 와인, 단 하나만 생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겠다는 이상적인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접근법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퀸테사는 첫 와인(1994년)부터 매년 변화하는 빈티지에 따라 달라지는 테루아를 투명하게 표현하며 거대한 테루아의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중이다.
칠레 와인산업에 몸담았던 어거스틴 후니우스(Augustin Huneeus)와 발레리아 후니우스(Valeria Huneeus)는 러더포드('보르도의 포이약'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와인 산지)의 동쪽 끝에 위치한 땅을 구입했다. 비티컬처리스트인 발레리아는 바카 산맥과 나파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자연 특히 호수와 자생 참나무 숲 등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실제로 110헥타르에 달하는 이 땅은 그때까지 한 번도 경작된 적이 없었다.
포도밭을 조성하면서도 원형 그대로 보존해 온 야생 나무들은 퀸테사 와인의 독특한 개성을 완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야생 숲이 이 땅의 야생효모를 보존하고 촉진하는 것으로 밝혀져, 다시 한번 고유한 풍토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퀸테사는 자연을 보호하고자 설립 초기부터 유기농법을 도입했으며, 1996년에 바이오다이나믹 농업으로 전환하여 토양 보호와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 유지에도 힘쓰고 있다.
테루아의 미스터리를 풀다
퀸테사의 테루아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지도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눠지는데 바카 산맥 근처의 이스턴 힐스, 중앙 호수(드래곤 레이크)를 둘러싼 센트럴 힐스 그리고 나파 강에 가까운 벤치 블록이다. 이 지역은 다시 26개의 구획으로 세분화되었다. 30년이 넘었지만, 퀸테사의 테루아 탐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결과에 따라 구획이 더욱 세분화될 가능성도 있다.
레베카는 퀸테사 와인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토양 샘플을 화면을 통해 보여주며 토양과 와인의 연관성에 관해 설명했다.
1) 나파 강 근처 벤치 블록의 토양은 비옥한 점토성 양토, 모래, 자갈이 섞여 있으며 어두운 색을 띤다. 와인에 밀도와 파워를 부여하며, 특히 붉은 과일 풍미가 잘 나타난다.
2) 센트럴 힐스의 토양, 코로나(Corona)는 붉은 색을 띠며 암석, 자갈, 큰 둥근 자갈(cobbles)들이 섞여 있다. 이 붉은색은 화산재와 철의 영향을 받은 것. 와인에 타이트한 타닌, 미네랄과 철의 느낌을 준다.
3) 와이너리 빌딩이 있는 구획, 드래곤 테라스(Dragon’s Terrace). 여기 토양은 암석, 자갈, 둥근 자갈이 많은 화산토지만, 점토의 비율이 높아 갈색을 띤다. 검은 과일과 부드러운 타닌으로 표현된다.
4) 바카 산맥 쪽 칼리스(Calisse) 산 구획의 토양은 순수한 화산재로 형성된 백색의 석회질 토양. 우아함과 섬세함, 긴 여운을 더해주는데 레베카는 이 토양이 “퀸테사를 특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자연과 빛의 향기로운 조화, 일루미네이션 2023
소비뇽 블랑 58%, 소비뇽 블랑 뮈스케 32%, 세미용 10%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세 미술에서 본 듯한 화려한 레이블이다. 레이블과 와인의 이름은 9세기 중세 아일랜드의 장식 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 에서 영감을 받았다. 정교한 장식의 레이블에서 와인의 깊이와 복합성을 시각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했다.
2023 빈티지는 "세기의 빈티지"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해였다. 겨울동안 내린 비는 지난 3년간의 가뭄을 해소할 정도로 넉넉했다. 온화한 여름 동안 큰 변화 없이 안정된 날씨가 이어지면서, 포도알은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익어 깊은 색과 풍부한 맛을 갖추게 되었다. 숙성 기간이 길었던 만큼 포도는 밝고 높은 산도를 얻을 수 있었다.
소비뇽 블랑 뮈스케는 와이너리에서 가장 시원한 토양을 가진 드래곤 레이크의 라 카사스(La Casas) 구획에서 나온다. 나머지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은 오랜 파트너십을 맺어 온 외부 포도밭에서 공급받는다. 일루미네이션은 복합성과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서로 다른 통에서 발효 과정을 거친다. 깊이감과 오크 풍미를 위해 프랑스산 새 오크통과 중고 오크통을 사용하고, 복합미와 꽃 향을 더하기 위해 프랑스산 새 아카시아통을, 순수한 과일향을 담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통을, 신선함과 미네랄리티를 위해 달걀 모양의 콘크리트 발효조를 활용한다.
먼저 자몽, 레몬 커드, 그리고 작은 꽃향기가 스트레스를 날려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시원한 기후에서 자란 포도에서 느껴지는, 생기발랄한 산미가 잠자고 있던 미뢰들을 깨운다. 입안에선 금귤, 구아바, 패션 프룻의 풍미가 어우러지며, 약간의 유질감 덕분에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이다. 마치 아침 이슬 같은 와인. 최근 이 와인을 세비체와 매칭했을 때 참 좋았다는 레베카의 말에 나도 따라서 민어회와 민어전과 함께 먹어보니, 그야말로 ‘맛있음’이 대폭발했다.
모든 것들이 완벽한 퀸테사 2021
카베르네 소비뇽 91%, 카베르네 프랑 4%, 카르미네르 3%, 메를로 1%, 쁘띠 베르도 1%
2021 빈티지는 극심한 가뭄의 영향을 받았다. 퀸테사는 토양 상태를 면밀히 분석한 후, 포도가 고르게 익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가지치기를 마쳤다. 봄은 시원했고 여름도 극심한 더위 없이 온화해서 포도는 천천히, 골고루 익으며 풍부한 색과 산도를 갖추게 되었다. 비록 가뭄의 영향으로 포도알은 작아지고 껍질은 두꺼워졌지만 와인은 강한 타닌과 풍부한 맛을 갖게 되었다. 레베카는 “2021 빈티지는 특별하다. 퀸테사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빈티지라고 느꼈다”라고 덧붙였다.
이 와인은 총 13개 구획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지며 놀라울 정도의 복합미와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숙성 과정에서 새 프랑스산 오크통, 중고 오크통, 그리고 테라코타 암포라 총 세 가지 통을 사용했다. 2021 빈티지부터 새롭게 도입한 테라코타 암포라에 관한 질문에 레베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매년 더워지는 상황에서 와인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했다. 테라코타는 숨을 쉬는 소재라 신선함을 유지하면서도, 나무처럼 풍미를 더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번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워 앞으로 테라코타의 비중을 조금씩 높일 예정이다. 물론 어느 구획의 포도를 암포라에서 숙성할지는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다.”
퀸테사의 시그니처인 붉은 과일과 까시스 같은 검은 과일, 꽃, 말린 허브(세이지)와 정향의 향이 풍부하다. 매우 촘촘한 타닌이지만 입안에서 부드럽게 느껴진다. 마치 깊은 숲속 오솔길을 떠올리게 하는 신선함이 계속 이어지며 구조감은 탄탄하게 잘 잡혀있다. 삼킨 후에도 붉은 과일의 향이 은은하게 지속되어 저절로 미소짓게 된다. 14.5%의 높은 알코올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으며 풀 바디 와인이지만 압도하지 않는 우아함이 돋보인다. 숙성 잠재력 또한 뛰어나 15년 후엔 더욱 근사한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Wine Enthusiast 100, James Suckling 99, Wine Advocate 96, Wine Spectator 94
‘퀸테사’라는 이름은 '다섯 개의 에센스'를 의미하는데 이는 곧 흙, 공기, 불, 물, 그리고 영혼에 대한 경외심을 담고 있다. 와인 생산에 필요한 본질적인 요소, 즉 테루아에 대한 설립자의 깊은 애정을 잠작할 수 있다. 만약 가까운 미래에 테루아의 조각들을 모두 이어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면, 퀸테사야말로 나파 밸리 그랑 크뤼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글 박지현 자료 제공 퀸테사 와이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