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 1922 바롤로를 마셨다. 80년이나 되었어도 와인이 살아있다는 것에 너무 놀랐다.”
지난 10월 4일(수) 방한한 피오 체사레(Pio Cesare)의 글로벌 세일즈 디렉터, 벤베누토 피오(Benvenuto Pio)가 경험한 이야기. 아마도 현재 특별한 날을 위해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보관 중인 애호가뿐만 아니라 장기 숙성용으로 두 와인을 염두에 둔 분이라면 ‘오호?!’하며 눈이 커질 희소식이 아닐는지. 인터뷰 중에 시음했던 2000 바르바레스코의 우아함과 신선한 매력에 온 감각들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142년 전통을 이어온 알바의 위대한 와이너리
피오 체사레는 1881년 체사레 피오(Cesare Pio)가 설립 이후 2021년에 창립 140주년을 맞이했다. 말이 140년이지, 한 가문이 5대째 경영하며 온전히 명성을 지키는 건 쉽지 않다. 특별한 비결이 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마디로 열정이다. 우리 유산과 전통을 지키고 이어 나가는 것, 긴 시간 동안 일할 수 있는 것도 열정이 없다면 할 수 없다.” 5대째 내려오는 와이너리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피오 체사레는 전통에 뿌리를 둔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1881년부터 피에몬테 오랜 전통에 따라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의 다양한 지역에서 나온 포도를 블렌딩해서 와인을 만들고 있다. “지금 2023년에도 여전히 앞선 세대와 똑같은 철학으로 와인을 만든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소문대로 고집쟁이들이 맞다.
피오 체사레는 알바(Alba) 시내의 역사적인 중심지에 위치하는데 특히 1700년대 말에 만들어진 지하 와인 셀러는 기원전 50년에 건축된 고대 로마제국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대 유적 위에 세워진 피오 체사레는 자연스레 알바 시를 상징하는 와이너리가 되었고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 레이블에 알바시의 문장을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 피오 체사레는 4대 피오 보파(Pio Boffa)의 딸, 페데리카 로지 보파(Federica Rosy Boffa)와 사촌이자 피오 보파와 오랫동안 일했던 벤베누토 피오, 두 사람이 함께 와이너리를 운영 중이다.
피에몬테의 전형이 바로 피오 체사레의 전형
피오 체사레는 앞서 언급했듯이 지역 내 여러 포도밭의 포도들을 블렌딩한다. 싱글 빈야드 혹은 크뤼 개념이 유행하면서 상대적으로 블렌딩 와인의 품질이 떨어진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 피에몬테 안팎에서 민감한 이슈로 피오 체사레의 입장은 단호했다.
“우리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만들 때 싱글 빈야드의 포도들을 함께 발효한다. 첫날부터 블렌딩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싱글 빈야드의 구획을 나눠서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도 있다. 우리와 정반대지만 어느 쪽이 옳다고 손 들어 줄 순 없다. 이건 소모적인 논쟁이다.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우린 건강하고 잘 익은 최상의 포도들을 블렌딩할 뿐이다.”
피오 체사레는 테루아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피에몬테의 전통을 따랐고 그들만의 '공식'으로 확고하게 만들었다.
“피에몬테의 전형이 바로 피오 체사레의 전형이다. 우리 가문은 오랫동안 지역과 얽혀있고 피오 체사레가 걸어온 길과 피에몬테 와인의 흐름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50~60년 전 균형과 우아한 풍미를 가진 새로운 바롤로, 바르바레스코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점은 가문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오 체사레는 이렇게 만든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클래식’이라 부른다. 와인 철학과 스타일의 기본이 되며 얼마나 중요하고 상징적인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클래식 네비올로의 새로운 변주
피오 체사레는 전통을 따르지만 스스로 성벽에 가두거나 진보적인 행보에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 1970년대부터 피오 체사레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에 포도밭을 매입하기 시작해서 현재 총 75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주요 포도원은 바롤로의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 몬포르테(Monforte), 노벨로(Novello), 라 모라(La Morra) 및 그린자네 카부르(Grinzane Cavour), 바르바레스코의 트레이조(Treiso) 및 산 로코 세노 델비오(San Rocco Seno d'Elvio)에 자리하고 있다. 테루아에 따라 토착 품종인 네비올로, 바르베라, 돌체토, 모스카토, 코르테제와 국제 품종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시라 등 골고루 재배한다. 와인의 균일한 품질을 지키기 위해 양보다 질을 우선시해 낮은 수확량을 유지하고 화학 제품은 물론 인간의 개입도 최소화한다.
1980년대 싱글 빈야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해 바롤로 오르나토(Barolo Ornato)를 선두로 2019년에 바롤로 모스코니(Barolo Mosconi), 바르바레스코 일 브리꼬(Barberesco Il Bricco), 피데스 바르베라 달바 슈페리오레 '비냐 모스코니'(Fides Barbera d'Alba Superiore 'Vigna Mosconi) 그리고 유일한 화이트 와인 샤르도네 피오 딜레이(Chardonnay Piodilei)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벤베누토 피오는 풀바디 로제 와인, 로지(Rosy)를 예를 들어 시장의 변화에 발맞춰 현대 감각으로 와인을 만든다고 한다.
“또 다른 버전인 일 네비올로(Il Nebbiolo)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과일 풍미가 가득하고 과즙 많은 신선한 와인으로 어릴 때 마셔도 좋다.”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네비올로 초보자에게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전 세대의 유산을 소중히 지키는 동시에 피오 체사레의 현세대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회를 발견하고 개발하며 과업을 해내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도전
이번 2023년 여름의 기억은 단 하나!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던 더위다. 피에몬테도 예외 없을 거라 궁금했던 2023 빈티지에 관해 물었다.
“2023년 여름은 2022년만큼 덥지 않았다. 네비올로는 무엇보다 산도가 중요한데 날씨가 너무 더워지면 산도가 떨어지고 매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렇다고 날씨가 서늘하면 포도 자체가 잘 익지 못해 중간을 맞춘다는 게 쉽지 않다. 다행히 올해 포도의 품질은 우수하고 양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되어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다만 지난 7월에 엄청난 폭풍우가 발생해 바르바레스코의 한 포도원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자연과 함께 일할 땐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안타까울 뿐이다.” 역시 자연이란 높은 벽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 혹은 새로운 와인의 생산 계획이 있는지 묻자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랑게 밖에 있는 티모라소(Timorasso)에 투자하고 있다. 2주 전에 처음 수확했는데 ‘화이트 바롤로’라 불리는 피에몬테 토착 품종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도전으로 신중하게 3-4년 두고 볼 예정이다.” 티모라소는 거의 잊혀 사라질 위기를 겪었던 품종. 바롤로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반 떨어진 토르토나(Tortona)에서 자라며 신선한 시트러스 향 덕분에 리슬링이나 슈냉 블랑에 비교되기도 한다. 피오 체사레의 티모라소, 벌써 궁금해진다.
이제 와인의 시간!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는 장기 숙성형 와인이란 걸 부정할 순 없는데 벤베누토 피오 또한 “솔직히 10~12년이 되었을 때”가 시음 적기라고 한다. 타닌과 산도 모두 강한 와인이라 시간이란 마법이 있어야 나뭇잎의 향, 관능적인 동물향, 장미향과 버섯이나 트러플 향으로 발전한다. 현재 수입사 CSR와인이 피오 체사레를 국내에 소개하는데, 시중에서 만날 수 있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의 빈티지는 2018년. 그는 “2018 빈티지는 너무나 우아한 스타일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빈티지”라며 엄지척했다.
테이스팅한 피오 체사레 와인들
피오 체사레 로지 2019 Pio Cesare Rosy 2019
네비올로와 시라로 만든 로제 와인. 트레조 마을 포도밭에서 재배한 네비올로와 시라를 블렌딩하는데 스킨 컨택하는 시간이 매우 짧아 와인의 색이 진하지 않고 은은한 호박색을 띤다. 부드럽게 압축 후 절반은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나머지 절반은 오크통에서 발효한다.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개월 동안 리(Lees, 앙금)와 함께 숙성한다. 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일 향과 신선한 허브의 향도 나며 상큼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스파이시하고 여운에서 살짝 타닌의 뉘앙스도 느껴지는 풀바디 로제 와인. 소량 생산된다.
피오 체사레 랑게 소비뇽 2021 Pio Cesare Langhe Sauvignon 2021
‘전통을 중시하는 와이너리’라는 지향점 때문에 막연하게나마 올드할 거란 인상을 단숨에 부숴버릴 정도로 감각 넘치고 패셔너블한 와인. 피에몬테에서 흔하지 않은 소비뇽 블랑이 지역의 테루아를 만나 남다른 개성을 드러낸다. 반짝이는 레몬색을 띠고 레몬, 라임, 구스베리, 허브의 향이 과하지 않고 조화롭다. 산뜻한 미네랄리티와 산미, 길고 은은하게 이어지는 여운이 매력이다. 매년 1,000병 안팎 생산되는 부티크 와인.
피오 체사레 바롤로 DOCG 2018 Pio Cesare Barolo DOCG 2018
Serralunga d'Alba(Ornato, La Serra, Briccolina), Grinzane Cavour(Gustava, Garretti), La Morra(Roncaglie), Novello(Ravera)에 있는 가족 소유 포도원과 마지막으로 인수한 Monforte(Mosconi)에서 수확한 포도들을 블렌딩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약 25-30일 동안 스킨 컨택과 발효를 거친 후 대형 프랑스산 오크통(botti)에서 약 30개월 숙성한다. 그야말로 클래식한 바롤로. 붉은 뉘앙스가 도는 가넷 색을 띠며 붉은 체리, 꽃, 마른 낙엽, 흙 내음이 난다. 체리, 호두, 아몬드의 풍미와 함께 섬세하고 타닌의 느낌은 매우 촘촘하고 견고하다. 우아하고 구조감이 뛰어난 와인.
James Suckling 94, Wine Advocate 93, Vinous 93, Wine Spectator 90
피오 체사레 바르바레스코 DOCG 2018 Pio Cesare Barbaresco DOCG 2018
Treiso(Il Bricco, San Stefanetto, Bongiovanni)와 San Rocco Seno d’Elvio(Rocche di Massalupo)에 있는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들을 블렌딩한다. 바롤로와 비슷하게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약 25-30일 동안 스킨 컨택과 발효를 거친 후 대형 프랑스산 오크통(botti)에서 약 30개월 숙성한다. 마치 흑백영화 속 고혹적인 여주인공이 떠오르는 바르바레스코. 루비색을 띠며 잘 익은 붉은 과일, 제비꽃, 커피, 시나몬의 향이 난다. 입 안에선 자두, 레드 커런트, 스파이스, 바닐라 풍미와 함께 섬세하고 부드러운 타닌의 느낌에서 우아함이 드러난다. 여운도 길게 이어지며 오래오래 향기가 남는다.
James Suckling 94, Wine Advocate 93, Wine Spectator 92
피오 체사레 바르바레스코 DOCG 2000 Pio Cesare Barbaresco DOCG 2020
네비올로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피에몬테 지역의 명주임을 확인할 수 있는 와인. 벽돌색의 테두리가 그리 두껍지 않고 붉은색이 아직 선명해 잘 보관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섯, 장미꽃, 말린 체리, 시가, 나뭇잎 향이 서서히 하나씩 피어나듯이 퍼졌다. 입 안에선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질감과 잘 익은 과일의 뉘앙스가 느껴져 올빈이 맞구나 싶다. 아직도 신선한 산도가 미각을 날카롭게 자극해 더 보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벤베누토 피오도 “산도뿐만 아니라 와인 자체가 생생하다”고 감탄했다. 피오 체사레의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가 “일반” 혹은 “기본급”이라 설명해선 안 될 훌륭한 와인임에 동의한다.
시간을 초월한 네비올로의 표현
피오 체사레에서 클래식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이렇게 설명한다. 네비올로는 세월의 흐름을 무력화하며 아주 오랜 세월 우아함과 복합성 그리고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피오 체사레는 피에몬테의 테루아, 전통과 문화 속에서만 네비올로 와인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도 묵묵히 수행해 왔으며 앞으로도 지키겠다는 약속을 읽었다.
수입사 CSR와인
▶홈페이지 thevincsr.com
▶인스타그램 @thevincsr_official
글·사진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CSR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