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70주년을 맞이한 하디스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로, 이 세계에선 필모그래피 확실한 천만배우 포지션이다. 호주 와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넉넉잡아도 다섯 순번 안에는 튀어나올 확률이 현저히 높은 이름. 이름만 들어도 몇 가지 주요 정보가 자동 재생되면서 이미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착각마저 드는 그런 와인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다시 하디스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늘의 ‘확신의 하디스’가 있기까지, 이들에게도 불확실한 시대 미지의 영역을 두드리고 헤쳐 나가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토마스 하디 시점
2001년, 1867년산 틴타라 클라렛 한 병이 하디스로 돌아왔다. 영국의 어둡고 눅눅한 셀러에서 백 년간 잠들어 있던 이 와인은 1977년 경매에 부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주 와인으로 추정된다), 빅토리아 주에 있는 와인패밀리의 손에 들어갔던 것을 하디스의 5대손 빌 하디(Bill Hardy)가 매입한 것이었다. 1867년이면 하디스의 첫 빈티지가 나오고 딱 10년이 되던 해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9년 뒤에 하디스에서 틴타라 빈야드를 매입한다. 와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마실 수 없는 상태였지만, 와인이 살아남은 시간은 마음을 기우뚱하게 하고도 남음이었다. 하디스의 170년을 투과하는 어떤 연결고리가 그 안에 있다. 빌 하디는 병을 보고 만져보기만 해도 와인이 만들어진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때로부터 좀 더 거슬러 가보자.
19세기 초 영국은 혼란의 시대였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경기는 침체하고 산업혁명은 전례 없는 부를 가져온 동시에 빈곤을 낳았다.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새로운 땅으로 향했다. 1850년 4월 영국 남서부 플리머스 항구의 인파 속에는 사촌 요한나와 함께 짐을 꾸린 스무살 청년 토마스 하디(Thomas Hardy)가 있다. 호주행 선박에 오른 이들은 12주의 지난한 여정 끝에 애들레이드 항구에 당도했다. 토마스는 지체 없이 일을 구하는데, 첫 직장은 남호주 와인 생산의 선구자였던 존 레이넬(John Reynell)의 농장이었다. 그는 소를 키우는 틈틈이 포도밭에서 일했다. 포도밭 일을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봉급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빅토리아 주로 떠나야 했다. 당시 빅토리아 주는 금광이 발견되면서 기회의 땅으로 부상했다. 골드러시를 맞아 그는 고기를 썰었다. 금광을 캐러 온 이들에게 신선한 고기를 제공하는 쪽으로 사업 가닥을 잡은 것이다. 좋은 수완 덕에 2년 만에 상당한 목돈을 손에 쥔 그는 남호주로 돌아가 토렌스(Torrens) 강가의 땅을 매입하곤, 뱅크사이드(Bankside)라는 이름을 붙였다. 애들레이드 하류에서 3마일쯤 떨어진 곳이었다.
선구자의 확신과 철학
1853년은 토마스 하디의 인생에도 전환점이지만 장차 호주 와인 업계의 커다란 방점으로 남을 해가 된다. 그해 그는 사촌 요한나와 결혼하고 하디스 와인을 설립했다. 19세기 중반은 호주 와인 업계의 눈부신 미래를 그리기엔 다소 이른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보는 혜안과 긍정의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이 선구자가 되는 걸까. 확실한 건 토마스 하디는 그런 쪽이었다는 것. 그는 이 땅에서 “세계 곳곳에서 존경받고, 모두가 이해하고 즐기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최고의 와인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과 전략도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난 서로 다른 캐릭터의 포도를 블렌딩하여 와인의 퀄리티와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단일 포도원이 퀄리티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이 와인 세계의 흔한 통념이지만, 그는 다른 접근법을 밀었다. 오늘날 호주 특유의 퀄리티 와인을 생산하는 방식이 된 이 지역 블렌딩을 토마스 하디는 1865년 처음 시도했다. 그 후 지역별 최고의 포도를 엄선해 블렌딩의 예술을 보여주는 것이 하디스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하디스의 홈 틴타라
하디스의 첫 빈티지는 1857년이었다. 포도밭은 차츰 넓어졌다. 와인생산량은 1862년 1,500갤런에서 1870년대에 이르면 53,000갤런으로 증가한다. 뱅크사이드의 수용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지속되는 확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터전이 불가피했다. 바야흐로 ‘하디스의 홈’으로 널려 알려진 틴타라(Tintara)가 등장할 때다. 1876년 애들레이드 남쪽 맥라렌 베일에 있는 틴타라 빈야드를 매입하며 하디스의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된다. 사실 틴타라 빈야드는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셀러에서 와인을 이동시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구조였다. 문제점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던 토마스 하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을 멈춘 제분소를 사들여 와이너리로 전환시킨다. 3층짜리 구 제분소는 4만 갤런의 와인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1884년에는 틴타라 빈야드 옆에 480에이커의 땅을 매입하는데, 이때 중요한 두 사람이 하디스에 합류했다. 그중 한 명은 존 조지 켈리(John George Kelly). 틴타라 빈야드의 설립자이자 하디스 이전 소유주인 알렉산더 캘리 박사(Dr Alexander Kelly)의 아들이다. 또 한 사람은 토마스의 조카인 토마스 노타지 하디(Thomas Nottage Hardy).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합류해 1941년 은퇴할 때까지 66년간 거의 평생이라 할 만한 시간을 하디스와 함께했다. 훗날 하디스 컴퍼니는 틴타라의 프리미엄 밭에 ‘노타지 힐(Nottage Hill)’이란 이름을 붙여 그의 공로를 기렸다.
아일린 숙모와 버킹엄 궁의 훈장
하디스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 하디스 와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아일린 하디(Eileen Hardy). 토마스 하디의 조카인 톰 메이필드(Tom Mayfield)의 아내다. 해군 장교였던 톰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가문의 와인 사업에 합류하는데, 와인 업계 미팅차 오른 비행기가 추락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만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었지만, 그녀는 낙심으로 인생을 흘려보내는 대신 가문을 굳건히 세우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와인애호가들에게 ‘아일린 숙모(Auntie Eileen)’라 불릴 만큼 사랑받았고, 1976년에는 호주 와인 업계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버킹엄 궁에서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1973년 아일린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여든 번째 생일을 와이너리 최고의 와인으로 기념하기로 하는데, 바로 아일린 하디스 쉬라즈(Eileen Hardy Shiraz)가 처음 출시되는 날이었다.
다이나믹 20세기, 글로벌 와인 컴퍼니로
하디스는 끊임없이 성장 가도를 달리지만, 20세기 후반은 특히 다이나믹하다. 1980년이 되면 5대째인 윌리엄 하디(흔히 빌 하디라 부른다)가 와이너리를 물려받는다. 그보다 조금 전인 1976년 첫 인수합병 이후 점점 영토를 확장하며 자신들의 제국을 완성하는데, 1982년 샤또 레이넬라(Chateau Reynella) 매입은 상징적이다. 수중에 30파운드가 전부였던 스무살 토마스 하디가 호주에서 구한 첫 직장이 130여 년 후 이들 가문의 본사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1992년에는 베리 렌마노(Berri Renmano Limited)와 합병하여 BRL 하디(BRL Hardy Limited)가 탄생한다. 이후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과의 합병을 거쳐, 지금의 아콜레이드 와인즈(Accolade Wines)의 초석이 되었다.
지구 곳곳에 하디스
글로벌 비즈니스로 성장하는 동안, 하디스는 수많은 기록을 써 내려갔다. 하디스의 170년을 요약하면, “세계 곳곳에서 존경받고, 모두가 이해하고 즐기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확실한 것으로 못 박는 여정이었다고 할까. 토마스 하디의 포부는 생각보다 빨리 성과를 냈다. 1857년 첫 빈티지를 수확하고 불과 2년 뒤에 영국으로 와인을 수출했으니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하디스는 호주 최초로 영국으로 수출된 와인이며 지금까지 영국 시장 부동의 No.1 호주 와인 브랜드다. 설립 41년째인 1894년이 되면 토마스 하디는 남호주에서 가장 큰 와인생산자가 된다. 언론에서는 그를 ‘남호주 와인 업계의 아버지’라 불렀다. 지구의 더 많은 사람이 하디스를 알게 되고, 1911년에는 남극대륙에서도 하디스를 마셨다. 6월 21일, 남반구의 동짓날. 호주에서 남극 탐험을 나선 원정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하루, 앞으로 더 밝아질 내일을 기대하며 연회를 마련했다. 손수 만든 선물을 나누고, 레드 와인으로 몸을 데우면서. 그날의 리스트에는 하디스의 틴타라 클라렛(Tintara Claret)이 있었다.
역사만큼 수상 기록도 차곡차곡 쌓였다. 이미 1889년에 파리 국제 와인 품평회에서 여러 상을 받은 바 있고, 그 이후로 꾸준히 성실하게 상을 휩쓸어 대략 1,000여 개가 넘는 수상 기록이 있다. 2003년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며 하디스는 “세계 130여 곳으로 수출되며, 매일 세계 곳곳에서 2백만 글라스가 팔리는 와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바 있다. 역사나 규모만큼 와인 레인지도 다양하다. 하디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틴타라와 하디스의 지역 블렌딩 전통을 살린 HRB 시리즈, 아이콘 와인인 토마스 하디나 아일린 시리즈 등 들어보면 하나하나 익히 알려진 이름들이다. 2020년, 하디스는 ‘확실성(Certainty)’이라는 구호를 걸고 브랜드 캠페인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이들의 170년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확연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글 강은영 사진 제공 아콜레이드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