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아시아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고, 특히 일본에서 많은 이들이 수상을 기대하며 TV 앞에서 발표를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그 주인공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나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근거 있는 수상이었기에 더욱 값진 선물이었다. 이후 한국에서 문학의 인기가 고공행진 중인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 문학 작품 4선과 함께, 소설을 찢고 나온 듯 분위기에 딱 맞는 와인 4종을 소개한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황소의 피 '비카베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화제작 『채식주의자』는 2010년부터 일본, 중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꾸준히 번역 및 출간되어 왔으며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2018년 산클레멘테 문학상 수상작에 오르는 등 세계에서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채식주의자』는 총 3부작으로 1부 '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 3부 '나무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부마다 시점은 다르지만, 사회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억압과 폭력에 주인공인 영혜가 저항하는 과정을 무자비하면서도 아름답게 다루고 있다. 영혜가 과거의 기억과 꿈을 통해 그녀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면서, 육식에 대한 거부를 시작으로 폭력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과 자기 파괴적인 행위가 이어진다.
소설은 개인을 둘러싼, 사회 전반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좌절감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개인이 마주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폭력을 깨달았을 때, 자멸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혜의 몸부림을 지켜보면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독자들에게 응원과 위로가 될 만한 와인을 추천하고 싶다. 바로 헝가리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일명 '황소의 피' 비카베르(Bikavér)'다.
보이키 에그리 비카베르 2020
Bolyki Egri Bikaver 2020
지역 헝가리 에게르(Eger)
품종 케크프랑코스(Kékfrankos),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쯔바이겔트(Zweigelt), 블라우브루거(Blauburger), 포르투기즈(Portugiese)
수상 디캔터 월드 와인 어워즈 2022 브론즈
황소의 피라는 뜻의 에그리 비카베르(Egri Bikavér) 와인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략했을 때, 1552년 3만 이상의 오스만 대군이 에게르(Eger)성을 포위했다. 2천 명 남짓의 에게르 군대로서는 승리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게르의 성주는 군사들이 사기를 북돋울 수 있도록 적포도주를 나눠주었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전투는 무려 한 달간 이어졌고, 오스만 군 사이에서 헝가리인들이 ‘황소의 피’를 마시기 때문에 용맹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끝내 에게르성은 함락당했으나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에그리 비카베르’라는 와인명이 탄생했다.
보이키(Bolyki) 와이너리의 에그리 비카베르는 매년 작황과 포도 품질에 따라 최고의 비율로 블렌딩되어, 매 빈티지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디캔터 월드 와인 어워즈(Decanter World Wine Awards)에서 브론즈상을 받은 2020 빈티지는 고전적인 에그리 비카베르의 면모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사워 체리와 함께 자두 쨈, 블루베리의 농익은 검은 과실 향이 풍기고 스파이시한 향신료, 약간의 초콜릿 향이 뒤따른다. 입안에서는 적당한 타닌과 함께 짙은 체리와 블랙 커런트, 부드러운 오크 피니쉬가 이어진다.
출판사 창비
와인 수입사 칠락와인 @csillag.bor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예스터데이’와 '까스텔라레 키안티 클라시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속 두 번째 단편 '예스터데이'는 무모했던 20대 대학생 시절의 향수를 문장으로 옮긴 듯한 작품이다. 더 정확히는 자다가도 이불을 차며 일어날 그때의 자신을 떠오르게 한다. 다소 어설프지만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고, 또 어린 이의 무심함과 겉멋 때문에 상대에게 상처 주기도 했던 그 시절을.
소설의 주인공 '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친구 기타루에게서 자신의 오랜 애인 에리카와 사귀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세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기타루는 '문화 교류'라는 명목으로 두 사람의 데이트를 강권하고, 에리카는 화가 났지만 자존심을 세워 이를 수락해 버린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데이트. 시부야에서 그녀의 취향일 듯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피자와 키안티 와인을 마시면서 그녀와 진솔하게 대화한다. 그녀는 기타루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불안함과 사실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기타루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다음날 만난 기타루는 그녀가 '피자와 키안티 와인'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후 기타루는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나'는 십육 년 후 '나파 밸리 테이스팅'에서 그녀와 마주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와인이 많이 등장한다.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내에서 많은 장면에 와인이 등장하지만, 가장 원픽을 꼽자면 '피자와 키안티 와인' 씬이다. 방황하는 청춘의 사랑,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는 듯한 막연함을 공감할 수 있는 말들로 표현했다. 신선한 과실 향이 젊은 날의 화사함을 연상시키면서도 부드러운 타닌과 여운이 입안에 남아 마치 추억을 상기시키는 듯한 와인이 어울릴 것이다. 소설과 함께 까스텔라레(Castellare)의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를 곁들여 보길 추천한다.
까스텔라레 키안티 클라시코 2021
Castellare Chianti Classico 2021
지역 이탈리아 키안티 클라시코 DOCG
품종 산지오베제 95%, 카나이올로(Canaiolo) 5%
수상 바이너스 92점, 와인 스펙테이터 92점
이탈리아 와인의 명가이자, 품질 좋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생산자, 까스텔라레 디 까스텔리나(Castellare di Castellina)의 와인이다. 레이블에 그려진 ‘새’는 자연을 존중하고 친환경 포도 재배를 추구하는 이들의 신념을 상징하며, 매 빈티지마다 다른 새의 디자인을 그려낸다.
장미 꽃잎과 레드 체리, 방금 딴 듯한 신선한 자두 향이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하고 은은한 오크 향, 삼나무 향 등이 복합미를 더한다. 좋은 산미와 부드럽고 촘촘한 타닌, 스파이스 터치가 조화를 이룬다. 와이너리의 기본급 키안티 클라시코임에도 탄탄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접근성이 훌륭한 와인이다.
출판사 ㈜문학동네
와인 수입사 신동와인 @shindongwine
소설 '퀸스 갬빗'과 부르고뉴 스타일의 ‘데로쉐 이스테이트 피노 누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원작은 동명 소설 '퀸스 갬빗'이다. 고아였던 천재 소녀 베스가 체스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나가는 성장 소설이다. 드라마의 미장센도 훌륭했지만 소설에서는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어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남들보다 배로 예리한 직관과 집중력으로 차례차례 강력한 상대를 쓰러트리는 장르적 쾌감이 좋은데, 가장 큰 매력은 베스의 퇴폐미이다. '술과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는 천재'라는 설정. 어딘가 익숙하지만, 알고 보는 클리셰가 맛깔나게 차려졌을 때 더 끌리는 것이 바로 사람 아닌가. 체스에 대한 승부욕, 이기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잃을 듯한 절박함이 독자의 신경을 자극하고, 상실감과 트라우마를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달래려는 그녀의 나약함에 공감하게 된다. 자신의 긴장감조차 내버려두지 못하는, 지독한 통제 욕구가 바탕에 깔려 인물상에 입체감을 더한다.
그녀는 '리플(Ripple)', '폴 마송 버건디(Paul Masson Brandy)' 등 이제는 사라진 당대 미국의 가성비 버건디 와인을 즐긴다. 부르고뉴 스타일을 선호하는 그녀의 취향에 맞게 캘리포니아 데로쉐 빈야드(DeLoach Vineyards)의 이스테이트 피노 누아(Estate Pinot Noir)를 마셔보면 어떨까? 첫 장을 열며 와인을 오픈하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한다면, 클라이맥스의 그녀에게 완전히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데로쉐 이스테이트 피노 누아
DeLoach Estate Pinot Noir
지역 캘리포니아 러시안 리버 밸리
품종 피노 누아 100%
수상 와인 애드보케이트 92+점(2016), 와인 스펙테이터 93점(2015)
데로쉐 이스테이트(DeLoach Estate)는 1970년 세실 데로쉐와 크리스틴 데로쉐가 24에이커의 올드바인 진판델 밭을 사면서 시작된 곳으로, 1975년 ‘러시안 리버 밸리(Russian River Valley)’라는 명칭을 최초로 레이블에 사용한 기념비적인 와이너리이다. 2003년 부르고뉴의 와인 명가 장 끌로드 부아셰(Jean Claude Boisset) 가문이 데로쉐 이스테이트를 인수하면서, 부르고뉴의 양조 기술이 반영된 캘리포니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코에서는 라즈베리 향과 달달한 오렌지 껍질 그리고 약간의 아니스 향이 지배적이고, 입안에서는 딸기와 자두 그리고 푹 익은 체리 풍미가 강렬하게 느껴지며, 약간의 홍차 풍미도 느껴진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풍미가 벨벳처럼 부드러운 타닌과 어우러져 잔잔하지만 긴 여운을 준다.
출판사 어느날갑자기
와인 수입사 국순당 @ksd_wines
세련된 '모스크바의 신사'와 '바타시올로 바롤로'
1922년 모스크바가 볼셰비키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러시아 귀족 계층은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주인공인 로스토프 백작은 목숨을 건지는 대신 호텔 메트로폴에 강제로 종신 연금된다.
이 책에서 와인은 그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정확히 인식시키는 장치로 이용된다. 레스토랑에서 '산 로렌초 바롤로 1912 빈티지'를 주문하던 백작은 웨이터에게서 "레드 와인을 드시겠습니까? 화이트 와인을 드시겠습니까?"라는 엉뚱한 반문을 받는다. 와인을 아무리 설명해도 '레드 와인'을 드시겠냐고 되묻는 웨이터. 답답함을 느낀 백작은 호텔의 비숍에게 항의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 지하 셀러를 방문한다. 거기엔 유럽대륙을 건너온 최고급 와인들이 10만 병 이상 있었고, 모든 병에는 라벨이 없었다. 공산주의 혁명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라벨을 제거하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으로만 구분해 판매했던 것이다.
소설은 두 번의 혁명을 겪은 러시아를 배경으로, 구시대를 상징하는 로스토프 백작의 시선을 따라 격변에 적응하고 활약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잔혹한 시대상과는 별개로 그는 보란 듯이 품격 있는 신사로서 새로운 삶을 이끌어간다. 사라져 버린 이전 삶의 리마인더이자, 백작의 변함없는 기품을 나타내는 매개로서 바타시올로 바롤로(Batasiolo Barolo)를 곁들여 보면 어떨까?
바타시올로 바롤로
Batasiolo Barolo
지역 이탈리아 피에몬테 바롤로 DOCG
품종 네비올로 100%
수상 제임스 서클링 92점(2016/2015) & 91점(2013), 와인 스펙테이터 91점(2013) & 92점(2011)
이탈리아 피에몬테 랑게(Langhe) 지역에서 가장 큰 와인 생산자이자, 바롤로 와인의 명가 바타시올로. 이들의 바롤로는 네비올로 포도 본연의 잠재력을 대담하고 강렬하게 표현한다. 와이너리가 소유한 5개의 크뤼(Cru) 빈야드에서 손수확한 포도를 사용하며, 껍질과 함께 10~12일간 침용 및 발효 과정을 거친다. 이후 슬라보니안 오크통에서 24개월간 숙성되며,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12개월 이상 추가 숙성 후 출시된다.
말린 과일, 향신료 풍미와 함께, 버섯 향과 섬세한 허브향이 네비올로 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높은 알코올에서 우아하고 기품 있는 맛과 집중도가 느껴지며, 신선한 산도와 고운 타닌이 입안을 채우면서 긴 피니쉬로 이어진다.
출판사 현대문학
와인 수입사 와이넬 @winell.co.kr
글·정리 이새미 사진·자료 제공 각 와인 수입사·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