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포트 와인의 인기가 계속해서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다. 소주를 통해 비교적 높은 도수의 주류에 익숙하고, 은은한 단맛이 있는 술이나 음식에 대한 선호가 강한 소비자층의 특성이 포트 와인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체 와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니치 마켓에 속하지만, 포트 와인은 한국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는 카테고리다.
포트 와인은 숙성 방식과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하위 카테고리로 나뉘는데, 그중 토니 포트는 위스키나 브랜디와 같은 스피릿을 즐기는 소비자들에게도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스타일이다. 투명한 병에 담아 숙성 연수를 표기하는 방식은 스피릿 시장에서 익숙한 요소이며, 여기에 상대적으로 낮은 알코올 도수는 토니 포트를 보다 접근하기 쉬운 주류로 만든다.
지난해 그라함(Graham’s)은 50년 토니 포트를 한국 시장에 소개했다. 올해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담은 80년 토니 포트를 선보이기 위해, 시밍턴 가문(Symington Family)의 5세대이자 마케팅을 담당하는 샬롯 시밍턴(Charlotte Symington)과 아시아 총괄 디렉터 조르제 누네스(Jorge Nunes)가 한국을 찾았다. 이번 겨울, 한국 시장에 소개되는 80년 토니 포트는 그라함과 시밍턴 패밀리가 함께 축적해 온 시간을 상징하는 와인으로, 전 세계적으로 단 600병만 생산된 극히 희귀한 작품이다. 이러한 와인을 한국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세대를 거쳐 보존되는 포트 와인
그라함은 오늘날 시밍턴 가문이 5세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포트 하우스다. 그 시작은 1820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섬유 무역 상인이었던 윌리엄(William)과 존(John) 그라함 형제가 포르투에서 회사를 설립하며 포트 와인 사업에 뛰어든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역 과정에서 미회수 채권을 대신해 포르투갈 와인을 받게 된 것이 계기였고, 이후 그라함은 품질 중심의 포트로 빠르게 명성을 쌓아갔다.
1970년 인수 이후, 그라함의 양조와 블렌딩은 시밍턴 가문이 책임져 왔으며, 그 중심에는 피터 시밍턴(Peter Symington)이 있다. 이에 대해 샬롯 시밍턴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할아버지 피터 시밍턴은 평소에는 말수가 적지만, 와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멈추질 않으신다. 아직도 열정이 엄청나다. 그의 업적을 지금은 찰스 시밍턴(Charles Symington)이 이어가고 있고, 나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처럼 포트는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세대 간에 축적되고 전승되며 완성되는 와인이다. 80년 포트는 그 구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다. 이는 그라함만의 특성이 아니라, 포트 산업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경쟁하지만, 동시에 포트 전체의 목소리를 키우는 일을 함께한다”라는 샬롯의 말처럼, 포트 산업은 개별 브랜드의 성장을 넘어, 함께 시간을 쌓아온 산업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포트 업계는 여러 차례 인수합병을 겪었지만, 최근 20여 년간은 대규모 M&A가 드물었다. 자본 회전이 느리고 숙성에 수십 년이 걸리는 구조는 단기 수익을 중시하는 대기업 모델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족 경영을 통해 리저브 운용과 캐스크 관리, 블렌딩 철학이 세대를 거쳐 축적된다는 점 역시 산업의 기반을 이룬다. 포트에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그 기반에는 세대 간 신뢰와 장기적 관점이 있다.
피터 시밍턴의 80세를 기리는 헌정 포트
그라함의 수석 와인메이커이자 마스터 블렌더인 찰스 시밍턴은 2024년 여름, 은퇴한 아버지 피터 시밍턴의 80세를 기념해 평균 숙성 연수 80년에 이르는 토니 포트를 구상했다. 그러나 당시 IVDP 규정상 숙성 연수를 공식적으로 표기할 수 있는 최고 기준은 50년에 한정돼 있었다. 블렌딩 자체는 가능했지만, ‘80년’이라는 명칭으로의 출시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 블렌드는 우선 가족을 위한 헌정 와인으로 완성되었고, 2025년 1월 IVDP가 ‘80 Year Old Tawny’ 카테고리를 공식 승인하면서 비로소 정식 출시가 가능해졌다. 프라이빗 헌정 와인이 제도적 변화와 함께 공식 명칭을 획득한 셈이다. 그라함 80년 토니 포트는 1942년과 1947년 등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여러 빈티지를 블렌딩해 완성됐다. 당시 포르투갈은 중립국이었지만, 해운 불안과 수출 위축으로 출하가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잦았고, 일부 포트 하우스는 즉각적인 판매 대신 빌라 노바 드 가이아의 로지(lodge)에서 장기 숙성과 보관을 선택했다. 포트 와인은 발효 과정에서 증류주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가 높고 미생물학적으로 안정적이며, 구조적으로 장기 숙성에 유리하다. 여기에 대서양의 영향을 받는 가이아 로지의 안정적인 해양성 기후는 수십 년에 걸친 숙성을 가능하게 한 핵심 조건이었다. 결국 80년 토니 포트의 존재는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도 장기적 관점을 유지한 생산자들의 판단, 그리고 세대에 걸쳐 축적된 리저브 관리와 캐스크 운용 경험이 만들어낸 시간의 결과다.

그라함 80년 토니 포트는 단발성 출시가 아닌 단계적 공개를 전제로 한다. 보유한 리저브의 양이 극히 제한적인 만큼, 몇 년에 걸쳐 소량씩 시장에 출시될 예정이다. 이 방식은 포트 산업의 핵심 가치인 ‘시간의 관리’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병은 한 사람이 만든 결과가 아닙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넘겨준 시간과 기술의 총합입니다.”
-샬롯 시밍턴
와인 애호가에게 새로운 기대감을 주는 카테고리, 80 Year Old Tawny
장기 숙성 토니 포트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공식 숙성 연수 체계는 오랫동안 10·20·30·40년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와인들은 비공식적 표현에 의존해 왔고, 숙성 연수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IVDP는 2024년 50년 토니를 공식화한 데 이어, 2025년 1월 80 Year Old Tawny를 신설했다. 이는 숫자의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초장기 숙성 토니 포트의 가치를 제도적으로 인정한 변화다. 생산자에게는 세대에 걸쳐 관리해 온 숙성 자산을 공식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길을 열었고, 80년 토니 포트는 그 결과를 상징한다.
80년 포트의 섬세함
잔을 기울이면 가장자리에서 아주 연한 초록빛이 드러난다. 이는 대체로 40년 이상 숙성된 토니 포트에서 나타나는 색으로, 수십 년에 걸친 산화 숙성이 남긴 화학적 변화의 흔적이다. 향에서는 말린 오렌지 껍질과 레몬 제스트, 밤나무 꿀, 아몬드와 헤이즐넛, 홍차의 노트가 층층이 겹쳐지며, 테이스팅을 이어갈수록 새로운 향과 맛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팔레트에서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이 혀를 감싸고, 높은 산도가 와인에 생기를 더한다. 여운은 매우 길며, 피니쉬는 코냑을 연상시키되 훨씬 부드럽고 산과 당의 균형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빠르게 마시기보다 천천히 음미하게 만드는 와인으로, 독주가 부담스러운 소비자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색과 향, 질감은 80년 토니 포트의 성격이 장기 산화 숙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라함은 550리터 오크 캐스크만을 사용해 산소와의 접촉을 완만하게 조절하며 미세 산화 환경을 만든다. 여기에 1940년대에 사용된 브랜디 기반 스피릿의 영향도 더해진다. 오늘날에는 투명한 포도 증류주(아구아 아르덴테, 약 77%)가 사용되지만, 당시에는 정부가 해외에서 수입한 브랜디를 생산자들에게 배분했고, 상당 부분이 프랑스, 즉 코냑 베이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르쥬는 “지금 마시는 이 와인의 약 20%에는 80년간 숙성된 코냑의 시간도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이 와인은 개봉 후 약 8주 이내에 마시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에서는 매우 차가운 온도(약 2℃)로 즐기기도 하고, 보다 높은 온도에서 섬세한 향의 결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음용되기도 한다.
도우로를 담은 패키지
그라함 80년 토니 포트의 패키지는 ‘80년이라는 시간’을 시각적·구조적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무게감 있는 우드 박스는 80년 토니 포트의 상징성을 강조하며, 16~17세기 영국식 인테리어에서 영감을 받은 박스 구조와 벽지 패턴은 오래된 포트가 머무는 로지의 분위기와도 이어진다.
내부 일러스트는 도우루 지역에서 세대를 거쳐 자라온 오크나무와 올리브나무, 장미 덤불, 밤나무를 모티브로 삼았다. 샬롯 시밍턴의 설명처럼 이는 ‘세대를 넘어 존재하는 것들’을 의미하며, 장기간 산화 숙성을 거친 토니 포트의 시간성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컬러 팔레트는 세대를 아우르는 중립성을 고려해 블랙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포르투 도심에 문을 연 와인 클럽 ‘메이트리아카’
지난 몇 년간 포르투는 한국인 여행자에게 특히 사랑받는 유럽 도시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포르투를 찾는 여행객과 그라함 로지를 방문하는 관광객 가운데 한국인은 상위 5위에 들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현지에서 경험한 포트 와인의 기억을 귀국 후에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포트는 여행의 기억과 일상을 잇는 매개체다. 시밍턴 가문은 포트를 사랑하는 로컬과 여행자들을 위해 2024년 6월, 포르투 도심에 와인을 경험할 수 있는 ‘메이트리아카(Matriarcha)’를 열었다. 올드타운 중심부의 3층짜리 전통 건물로, 1층은 와인바와 와인숍, 2층은 다이닝룸, 3층은 칵테일 바와 멤버스 클럽으로 구성돼 있다. 멤버십 회원에게는 매년 세 차례 혼합 와인 세트가 배송되며, 전용 이벤트 참여 기회가 제공된다. ‘메이트리아카’라는 이름은 시밍턴 가문의 첫 세대인 앤드루 제임스(Andrew James)가 포르투갈 여성 베아트리스(Beatrice)와 결혼하며 시작된 모계의 계보에서 유래했다. 샬럿 시밍턴은 그녀를 “사람들을 모으고 환대하는 데 탁월했던 인물”로 회상하며, 포트 산업 속에서 가문에 의미 있는 영향을 남긴 여성에게 헌사를 바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포르투를 여행한다면, 이 공간은 여행의 기억을 한층 깊게 만들 장소 중 하나다. 여러 시대의 포르투 역사가 담긴 포트 와인을 한 잔 경험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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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천혜림 사진·자료 제공 까브드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