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13일(목), 리델 와인글라스 익스피어리언스(Riedel Wine glass Experience) 진행을 위해 방한한 CEO 맥시밀리언 리델(Maximilian Riedel)을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글라스 제조기업 리델가의 11대손이자 팔로워 57.2만 명의 업계 탑티어 파워 인플루언서. 짐작대로 그는 전통과 혁신이라는 극단의 키워드를 균형감 있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그 J. 리델(George J. Riedel)이 현직에서 활동하던 거의 마지막 시기에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 후 와인글라스 테이스팅에 홀린 듯 빠져들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날의 경험이 ‘와인글라스의 진화가 와인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시킨 결정적 계기였다면, 10여 년이 훌쩍 지난 뒤의 이 다음세대 리더와의 인터뷰는 ‘와인글라스의 진화가 와인 문화를 리드할 수도 있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켰다.

와인글라스의 모든 시작에는
1756년 요한 리델(Johann Riedel)이 설립한 리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글라스 제조업체이자, 모던 와인글라스의 시초가 된 회사다. 1950년대는 리델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는데, 맥시밀리언의 말마따나 “제2차 세계대전과 정치적 상황에 밀려 1945년 고향을 떠나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했던 시기였다. “할아버지 클라우스 J. 리델(Claus J. Riedel)은 유리 제조업자였지만, 와인에 열정이 깊은 분이었고 현대적인 와인글라스를 디자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와인글라스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할아버지가 디자인한 형태를 그릴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모든 현대적인 와인글라스의 디자인은 리델에서 나왔다.” 와인 잔이라면 고블렛(Goblet) 형태에 화려한 장식과 컬러가 들어간 것들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클라우스 J. 리델이 개발한 와인 전용 글라스는 일대의 혁신이었다. 일례로 리델의 ‘소믈리에 버건디 그랑 크뤼(Sommeliers Burgundy Grand Cru)’는 현대 와인글라스의 시초로 인정받으며 1973년부터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1970년대 이후 리델은 소믈리에, 와인 평론가 등 업계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와인글라스 브랜드로 자리 잡으며 글로벌 인지도를 높여갔는데, 특히 10대손 게오르그 J. 리델은 와인메이커들과 협업하여 각 와인품종에 적합한 글라스를 개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

리델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맥시밀리언은 말했다. “리델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고. 아무렴, 신제품 출시 타임라인만 봐도 그렇다. 1986년엔 첫 번째 머신메이드(기계 생산) 제품인 리델 비늄(Vinum)을 출시했고, 2004년에는 와인잔에서 다리(스템)를 제거하는 혁신을 시도하며 리델 ‘O스템리스(Stemless) 시리즈’를 선보였다. 새로운 시리즈는 계속된다. 2008년과 2015년엔 각각 시그니처 핸드메이드 컬렉션인 레드 타이(Red Tie)와 블랙 타이(Black Tie), 2017년에는 핸드메이드를 재해석한 리델 파토마노(Fatto a Mano) 컬렉션, 그 이듬해에는 머신메이드의 혁신이라고 불리는 옵틱 리델 퍼포먼스(Optic Riedel Performance), 2022년에는 머신메이드 제품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덧입힌 벨로체(Veloce)를 선보였다. 벨로체 시리즈는 이날 와인글라스 익스피어리언스에 사용된 아이템이기도 하다.

더 얇고 더 가벼운 글라스, 누구에게나
이토록 많은 글라스 컬렉션이라니. 그럼 비교적 최근 출시한 벨로체 시리즈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묻고 싶은 건 이미 수많은 아이템이 있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시리즈를 개발하는 배경이었다. 그는 “3가지 이유가 있다”고 운을 뗐다. “첫째, 시장은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한다. 와인이 매해 새로운 빈티지를 출시하는 것처럼, 또 아이폰이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으면 페이스를 잃게 될 테니까. 두 번째는 우리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트렌드와 관련이 있다.” 그는 ‘더 얇고 더 가벼운 것이 더 좋다’는 것이 요즘 와인글라스 트렌드라며 글라스 산업의 유행도 돌고 돈다고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굉장히 얇고 가벼운 글라스를 디자인했던 것이 1960년대였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다시 이런 글라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60년대와 다른 점은 지금은 핸드메이드로 제작한 고가의 글라스뿐만 아니라 기계 생산으로도 이런 제품을 만들어 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리델이 만든 와인을 마시기에 적합한 글라스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미 더 얇고 더 가벼운 글라스들을 다양한 컬렉션으로 생산해왔다. 하지만 당시 벨로체만큼 가볍고 얇은 글라스는 없었다. 다른 회사들도 아주 얇고 가벼운 글라스를 만들지만, 핸드메이드로만 제작 가능하다. 우리는 기계생산으로도 심지어 더 가볍고 더 얇은 글라스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회사다. 또 벨로체의 경우 리델의 클래식한 디자인인 계란형에서 다이아몬드 형태로 바꾸었다.” 그럼 벨로체가 리델이 머신메이드로 만든 가장 가볍고 얇은 글라스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계생산에 초정밀 기술을 도입한 리델 수퍼리제로(Riedel Superleggero)가 또 나왔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글라스
리델의 수많은 와인글라스 중 베스트셀링 아이템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정확한 답변을 내놓기는 어렵다며 대신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나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모든 글라스 컬렉션에서 품종별로 가장 많이 팔리는 잔이 항상 똑같다는 것, 바로 카베르네 소비뇽 잔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가진 대표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바. 그럼에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 답변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가장 널리 재배되는 품종이자 가장 잘 알려진 혹은 인기 있는 와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볼이 크고 넓은 카베르네 소비뇽 잔이 소비자들에게는 가장 일반적인 와인글라스 디자인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그는 한편으론 이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했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이 잔에 마시는 것은 좋은 선택이지만, 다른 품종의 와인도 이 잔을 사용한다면 와인의 퍼포먼스를 최대치로 살리기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샴페인을 마실 때 종종 리델 버건디 잔을 즐겨 쓴다”는 필자의 말엔 “그건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버건디 잔은 산도가 높은 와인을 마시기에 좋은 디자인이기 때문에 샴페인 잔으로 활용하기도 좋다”고 피드백을 주었다. 와인에 맞는 적절한 와인글라스를 선택하는 것, 리델이 와인글라스 익스피어리언스 행사를 세계 곳곳에서 지속으로 이어가며 전달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여기에 있다. 그가 와인글라스 테이스팅 행사를 진행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있다.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와인을 추천한 소믈리에나 지인, 와인의 빈티지를 탓하기 전에 사용하고 있는 글라스를 의심해보라”고.

맥시밀리언의 와인 라이프
리델가의 11대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진로가 명확했다. “전통적인 환경의 가족계획에 따라” 그에겐 “할 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음 세대가 오랜 전통의 가업을 이어가는 일, 실은 이 과정이 원활하지 않는 가족 기업들을 많이 봐왔는데, 우리 부모님은 이 일을 제대로 해내셨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어릴 때부터 학교 일정이 허락하는 한 유럽 곳곳에서 열리는 리델 행사에 동행했고, 아버지는 적절한 양의 와인을 따르는 법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단계적으로 보여주셨다. 물론 그는 와인 애호가이기도 하다. 약간의 특이점은 와인만큼 글라스를 신중하게 고른다는 것. 당연하지만 말이다. “종종 아무 계획 없이 셀러로 내려간다. 완벽한 온도에 맞춰져 있는 조용한 그곳으로 내려가 그날의 느낌대로 와인을 한 병 집어 든 다음 품종을 확인하고 글라스를 고른다. 요즘 느끼는 가장 최고의 순간은 아내와 함께 와인을 마실 때이다. 아내에게는 다른 컬렉션의 글라스를 준비해준다. 같은 와인을 다른 컬렉션의 글라스에 따르곤 서로 글라스를 바꿔가며 와인을 마셔보는 것이다. 종종 이런 장면들을 인스타그램에 동영상으로 올리는데, 여기서 영상을 찍는 건 우리 아이들이다. 이것이 진정한 패밀리 비즈니스 아닌가.” 그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파워 인플루언서, 소통하는 CEO
그는 누구보다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CEO다. 팔로워수가 엄청난 인스타그램도 별도의 관리팀을 두지 않고 DM도 본인이 일일이 확인하고 답한다. “한 기업의 CEO가 소비자들과 이렇게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경우를 본 적 있느냐?”고 그가 반문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단순히 CEO가 아니라 와인 업계에서 가장 큰 인플루언서 중 한 명”이라고 말한다. 종종 사람들은 ‘왜 특별한 와인만 올리는지’ 묻는다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특별한 와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이라고. 그는 자신을 “백미러 달린 총알 기차에 올라타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뒤를 돌아보며 지난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는 있겠지만, 총알처럼 빠른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누구보다 트렌드 변화에 예민하게 촉수를 세워야 하는 사람. “지금 와인시장에서 주목해야 할 건 무엇인가, 무알코올 와인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럼 이 무알코올 트렌드를 바라보고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주류 시장에서는 칵테일이 인기다. 곧 우리는 칵테일 컬렉션도 런칭할 예정이다.” 막간의 팁을 하나 전하자면, 그는 “벨로체 컬렉션의 샤르도네 글라스는 칵테일 잔으로 활용하기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절대적인 목표
리델의 11대손이자 현 CEO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과 비전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리델 가문의 후계자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회사를 준비해야 한다. 누가 사업을 이어갈 것인가? 언제 그들은 준비될 것인가?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하는가? 나는 아버지처럼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싶다. 리델 가문 11대손이 회사를 맡고 있다는 것은 내가 마지막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가족 역사에서 가장 큰 실패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시장에서 리델은
이날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있었던 소비자 대상의 리델 와인글라스 익스피어리언스 행사에는 15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행사 1시간 전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행사의 열기는 뜨거웠고, 젊은 소비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리델 글라스는 1996년부터 대유라이프(주)를 통해 국내 수입되고 있으니, 한국 시장에 소개된 지도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코로나 팬데믹은 와인 시장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 시기 소비자들의 와인글라스에 대한 접근법도 보다 다양해졌다. 기존에는 핸드메이드 제품이나 디자인에 집중했다면 요즘은 와인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실용적인 선택을 하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컬러풀한 테이블 세팅을 위해 리델 파토마노를 선택하는 젊은 부부부터 품종별로 글라스를 갖추고 있는 애호가, 고가 와인을 컬렉팅하며 핸드메이드 그랑 크뤼 잔을 선호하는 이들까지 소비층이 다변화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 리델 와인글라스 익스피어리언스 행사도 이제 꽤 역사가 깊다. 맥시밀리안 리델은 이날 행사에서 “와인은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와인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리델의 와인글라스 행사만큼 와인의 즐거움을 감각적으로 경험시키는 것도 드물 것이다. 경험의 가치를 높이 사는 요즘 소비 트렌드을 생각하면 더욱, 리델이 리드하는 와인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글 강은영 사진 제공 (주)대유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