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은 언제나 와인 애호가들을 설레게 한다. 때로는 영혼의 단짝을 만난 듯 완벽한 합을 이루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상상도 못 할 놀라운 조합들로 재미를 주는 영역이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이다. K-팝·영화·드라마·문학 등 대중문화와 함께 K-문화강국의 서막 한편에 자리 잡은 한식의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다이닝 레스토랑이 한식을 재해석한 독창적인 요리에 와인 혹은 전통주와 다양한 페어링을 시도하며 국내 다이닝 신을 이끌고 있다. 우리 땅에서 자란 재료로 만든 한식이 수입된 다이닝 문화에 접목하여 꽃을 피웠다고 할까. 그렇다면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도 완전한 신토불이가 가능할까? ‘우리 땅에서 자란 농작물이 우리 몸에 잘 맞다’는 의미를 지닌 이 사자성어를 한식 다이닝에 대입하자면, 페어링 되는 와인도 우리 땅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져야 맞을 테다. 지난 5월,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준 팝업 이벤트가 열렸다. 산막와이너리의 전 라인업을 한식 다이닝 ‘주052’의 음식에 곁들이는 디너가 열린 것이다. 미식가들에게 국뽕 혹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자부심이 차오르게 하기에 모자람 없었던 디너에서, 처음으로 산막와이너리를 만났다.

웰컴 투 산막골
충북 영동의 한 산자락, 산막골이라 불리는 청정 골짜기에 산막와이너리가 있다. 국내 최대 포도 산지이자 국내 유일의 포도·와인산업 특구인 영동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와이너리이다. IWC(International Wine Challenge), 파리와인컵(Paris Wine Cup), 런던와인컴피티션(London Wine Competition) 등 국제 와인 품평회에서 수상뿐 아니라, 한국 와인 최초로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 점수를 획득하며 화제를 모은 곳. 그 시작은 10여 년 전이었다. 가족 중 가장 먼저 귀농한 안성분 대표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지역 내에서 와인 교육과 실습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2015년 산막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이어서 남편인 김정환 대표와 딸 김영 매니저, 사위 윤영준 부장이 합류하며 가족 경영 와이너리가 완성되었다. 역할 분담에는 각자의 장기가 반영된 듯하다. 오랜 애주가이자 와이너리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김정환 대표가 농사·경영·양조 전반을 맡고, 자동차 공학도 출신으로 홍대 직장인 밴드에서 김영 매니저를 만나 결혼한 윤영준 부장이 농사와 양조 전반을 책임진다. 르 코르동 블루 파리 본교의 와인 인텐시브 코스를 밟은 김영 매니저는 와인 인플루언서답게 최근까지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해 왔다. 회화 작가인 안성분 대표의 손길은 와이너리뿐만 아니라 와인의 아름다운 레이블들을 탄생시켰다.

주052에서 열린 디너를 진행한 김영 매니저는 “식용으로 팔고 남은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오직 와인을 위해 키운 포도로 와인을 만드다”는 점을 강조했다. 와인 양조가 잉여 농산물을 활용할 방안이 아닌, 처음부터 와인 양조를 목표로 포도를 재배한다는 뜻. 영동군에서도 더욱 뛰어난 와인이 만들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테다. 농가형 와이너리인 산막와이너리에는 4천 평 규모의 포도밭과 독립적인 신식 양조 시설이 있다. 위치는 해발고도 200미터의 일교차가 큰 영동 산자락, 청정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 산골바람이 경사진 포도밭을 통과하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이라 건조함이 유지되는 땅이다. 이는 산막와이너리가 화학 비료와 제초제, 농약을 배제하고 친환경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052 팝업에서 선보인 와인들 역시 포도 본연의 건강함이 물씬 느껴졌다. 청수와 캠벨얼리, 산머루로 만든 7종의 와인과 증류주가 등장한 디너에서 만난 와인을 소개한다.

흥겨운 삶을 위해 건배!
이름부터 경쾌한 화이트 와인 라라(Lara)는 순우리말로 ‘즐겁고 흥겨운 삶’을 뜻한다. 양조용으로 직접 재배한 청수 포도를 엄선하여 매년 한정 생산되는 와인이다. 와인병 외관만 보면 부르고뉴 블랑처럼 볼이 넓은 와인잔을 사용해야 할 것 같지만, 디너를 진행한 심재현 소믈리에는 “청수의 과실향에 집중하기 위해 샴페인잔에 서빙한다”라며 와인을 따랐다. 한 모금 머금어 본 와인은 천도복숭아와 같은 핵과류와 사과, 배, 레몬 등의 과일 아로마에 아스파라거스와 그린 허브 노트가 더해지며 싱그럽게 다가왔다. 얼핏 샤인머스캣이 비치기도. 향긋한 아로마에 높은 산도가 포인트가 되고, 생기 있고 단정한 인상이 남는다. 이 와인만 놓고 보면 일본 코슈보다 훨씬 매력적인 아시아 화이트 와인 품종이 청수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라라에 페어링 된 음식은 염장 건조해서 살짝 찐 농어요리. 촉촉한 농어의 질감과 청간장에 담근 두릅장아찌의 봄기운 가득한 향을 와인이 아주 잘 받아, 입 안 가득 즐거움을 남겼다.

라라의 색다른 변주도 있다. 효모나 가당, 보존제 없이 포도로만 만든 라라 내추럴(Lara Natural) 와인. 김영 매니저에 의하면 “원래 팔 생각으로 만든 건 아닌데 반응이 좋다”라고 한다. 디너의 스타트를 끊은 와인이기도 했는데, 앞서 소개한 일반 라라 와인보다 청포도의 상큼함과 쥬시함이 업그레이드되어 입맛을 돋우기에 그만이었다. 곁들여진 음식은 식사의 시작을 알린 한입거리들. 특히 주052에서 직접 만든 천연 감식초와 고추장 등 전통 발효 문화를 활용한 채소 요리와 라라 내추럴 와인의 조합은 강렬한 힘과 신선한 풍미를 주고받으며 흥미로운 한 쌍을 이루었다.

산막와이너리의 두 청수 와인은 각기의 매력으로 디너를 빛냈다. 일반 라라 와인이 선이 고운 전통무용수라면 라라 내추럴 와인은 힙한 K-팝 댄서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이름대로 ‘즐겁고 흥겨운 삶’에 어울리는 와인들이니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건배를 외쳐 보길!
포도가 입 안에서 알알이 터지는 것처럼
레이블에 그려진 강렬한 붉은 꽃이 인상적인 화몽은 캠밸얼리로 만든 드라이 레드 와인이다. 그렇다. 마트에서 가장 흔한 식용 포도인 캠벨을 얘기하는 게 맞다. 두 라라 화이트 와인의 사이에, 약간 차가운 온도로 서빙된 화몽을 한 모금 머금으니 과수원에서 막 딴 캠벨 포도가 입안에서 알알이 터지는 듯했다. 스페인 품종인 멘시아(Mencia) 같은 꽃 향과 풍선껌, 블루베리, 딸기의 아로마가 향기롭게 올라오고 흙, 드라이 허브 노트가 더해진 경쾌한 와인. 김영 매니저는 “갸메(Gamay)와 비슷한 면이 있는 포도”로 캠벨얼리를 소개했다. “보통 품질이 안 좋은 캠벨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서 이를 감추려고 스위트하게 만들곤 한다. 화몽은 노지에서 재배하여 알맹이는 작고 당도와 산도는 높은 포도를 엄선하여 만든 드라이 와인이다.” 부연 설명에서 와인의 품질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날 만난 화몽은 캠벨 와인에 대한 선입견을 뿌리 뽑는 동시에 어쩐지 추억 한 켠을 건드리는 듯했다. 어려서부터 먹어 온 캠벨의 달콤한 향과 과즙은 한국인에게 비할 데 없이 친숙한 ‘포도맛’이므로.

고려 토착 품종, 산머루 와인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라는 후렴구가 입에 맴도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에도 등장하는 포도가 있으니, 바로 산머루다. 산막와이너리는 이 한반도 토종 포도를 베이스로 레드 와인 비원을 만든다. 레이블에는 역시 안성분 대표의 작품이 사용되었다. 그 뒷이야기를 김영 매니저가 소개했다.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어머니의 작품을 찾아보니 <Secret Garden:비원>의 이미지와 느낌이 가장 비슷했다. 그래서 와인의 이름을 비원(Secret Garden)이라 짓고 레이블에도 해당 작품을 넣었다.” 로맨틱함이 감도는 이 비밀의 정원에는 산머루 80%와 캠벨얼리 20%가 담겨 있다. 블렌딩을 통해 복합미를 높인 것. 프렌치 오크 숙성까지 거친 2023 빈티지의 비원은 자두, 체리, 블루베리, 딸기잼 등의 베리류 아로마에 시나몬, 훈연, 흙, 초콜릿의 향이 더해져 볼륨감 있고 약간의 무게감도 느껴지는 와인이었다. 곁들여진 음식은 돼지고기 들기름 국수. 돼지고기의 갈비 양념과 들기름 국수의 고소함이 잔잔한 즐거움을 주는 가운데, 비원의 산미와 과실미가 포인트가 되었다. 국수 중간에 먹는 물김치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까.

디너의 마지막 레드 와인은 비원 퓨어였다. 산머루에 캠벨얼리를 블렌딩한 비원과 달리 산머루만으로 만든 와인이 비원 퓨어이다. 한 잔 받아 든 와인에서는 블랙베리, 프룬, 건포도의 달콤함에 초콜릿, 꽃, 향신료 노트가 더해진 향이 풍성하게 올라왔고, 기분 좋은 산미와 옅은 타닌이 느껴졌다. 함께 준비된 음식은 나물 솥밥과 직접 담가 2년 숙성한 네 종류의 김치. 누가 알았을까. 무심코 뜬 솥밥 한술에 김치 한 입, 와인 한 모금이 이날의 베스트 페어링일 줄이야. 비원 퓨어의 높은 산미와 약간의 숙성향, 프루티함이 묵은지의 톡 쏘는 깊은 맛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신토불이 페어링의 완결판이 있다면 꼭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조합!

첫사랑 같은 스위트 와인 & 환희에 찬 브랜디
초련은 한국판 포트 와인이다. 산머루 와인인 비원 퓨어를 발효하던 중 와이너리에서 직접 증류한 브랜디 환희를 첨가하여 만든 주정 강화 와인.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오크 숙성 기간을 합쳐 최소 24개월의 숙성을 거쳤다. 김영 매니저에 의하면 양조가들이 첫사랑 같은 와인이었으면 해서 초련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다채로운 검붉은 베리류 과일잼과 말린 과일들, 초콜릿, 캬라멜, 오크의 향이 층층이 겹치는 가운데, 너무 무겁지 않게 흘러가는 당도와 타닌. 첫사랑 같은 새콤달콤함과 쌉싸름함이 입안에 함께 맴돌던.
디너의 마지막은 환희가 함께했다. 대부분의 꼬냑 증류에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알람빅(Alambic) 증류기로 오랜 시간 천천히 한 방울씩 받아낸 브랜디이다. 조심스레 맛본 환희는 부드러운 캬라멜과 바닐라, 초콜릿, 각종 말린 과일, 토스트의 향이 차분하게 퍼져 나와 입안에서 증폭되며 완벽한 하루의 끝을 선물했다.

한국의 특별한 테루아와 품종이 유럽 정통 양조 방식과 결합하고, 자연친화적인 철학까지 얹어낸 산막와이너리. 팝업에서 경험한 산막와이너리의 와인들은 주052의 우리 장을 기반으로 한 한식 요리들을 만나 K-미식을 완성했다. 합리적인 가격은 덤, 국산주라 클릭 한 번에 산지직송으로 배송받을 수 있으니 이제 집에서도 신토불이 와인 페어링을 한번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문의 산막와이너리
▶인스타그램 sanmacwinery
▶홈페이지 sanmacwine.com
글·사진 신윤정 자료·사진 제공 산막와이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