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김치찌개는 물론 라면을 끓일 때도 습관처럼 주문을 외운다. 요리솜씨는 쥣뿔도 없으면서 의욕만 앞서기에 지푸라기를 잡는 마음으로 늘 그렇게 중얼거린다. 낯선 와인을 딸 때도 다르지 않다. 막연하게 “맛있어야 해!”라고 바라지만, 정작 맛을 결정짓는 건 다른 요소다. 와인은, 잘 어울리는 음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낸다. 그순간 자연스레 ‘오호’하고 감탄하며, 조금 전까지 평범해보였던 한 병의 와인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유럽에서 ‘넘버 원 호주 와인 브랜드’로 불리는 하디스(Hardys) 와인과 유유안(포시즌스 호텔)의 중식 페어링을 최근 경험하고 나니, 음식없이 와인을 마시는 건 비싼 돈 주고 산 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아마 와인도 상처받을 듯.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은 식사 전체의 질을 끌어올리는 미식의 완성 단계다. 맛과 향이 분명한 와인과 음식이 만나면, 서로의 단점을 가리고 장점을 돋보이게 한다. 타닌이 풍부한 레드 와인은 기름진 육류의 지방을 부드럽게 씻어내며 타닌의 떫은맛을 줄인다. 이런 페어링의 개념은 수백 년에 걸쳐 발전해 온 유럽의 와인 문화에서 비롯됐다. 지역마다 특유의 기후와 토양, 식재료, 와인이 함께하며 최적의 조화를 이루어왔다. 피에몬테의 송로버섯 리조또와 바롤로, 보르도의 양고기 요리와 메독 레드는 서로의 풍미를 상호 보완하는 대표적인 조합. ‘지역성’은 페어링의 대원칙이다.
아무리 오랜 전통의 검증된 공식이 있다고 해도, 와인은 여전히 소비자에게 ‘어렵고 복잡한 주류’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페어링 경험은 와인을 배우는 가장 흥미롭고 안전한 방법이 되고 있다. 실패를 경험한다 해도 맛을 통해 와인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취향’과 ‘경험’을 중시하는 요즘의 소비 흐름 속에서 페어링은 단순한 음주를 넘어 개인의 미적감각과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 문화는 오랜 지역성에 얽매이지 않는 신대륙 와인과 전 세계 다양한 음식의 조합을 통해서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하디스 역시 이런 흐름을 선도해왔다. 인도 커리나 한식 등 비(非)유럽 요리와의 페어링을 통해 와인과 거리감을 좁히고,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미식 경험을 제안해왔다. 이번 중식 페어링 또한 하디스 와인의 놀라운 음식 친화력과 무궁무진한 조합 가능성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이날의 라인업은 하디스의 대표 프리미엄 시리즈로 구성됐다. 각 품종의 최고 테루아에서 수확한 포도를 블렌딩해 만든 프리미엄 와인, HRB(Heritage Reserve Bin)과 창업자 토마스 하디의 며느리이자 와이너리를 위해 헌신한 여성에게 헌정한 아일린 하디(Eileen Hardy) 그리고 하디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아이콘 와인 토마스 하디 카베르네 소비뇽(Thomas Hardy Cabernet Sauvignon)이 함께했다.

하디스 HRB 샤르도네(Hardys HRB Chardonnay) 2021
첫 모금을 마시자마자, 지금이라도 이 와인을 알게 된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리아주 야라 밸리(Yara Valley)를 중심으로 서호주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와 펨버턴(Pemberton)의 포도를 블렌딩했다. 라임, 레몬, 천도복숭아의 향이 풍부하고 선명한 산미가 와인의 인상을 또렷하게 만든다. 입안에선 아몬드 페이스트리의 고소한 향이 이어지며, 새콤달콤한 체리토마토 냉채와 합을 이뤘다. 마른 입안을 깨우며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와인, 그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하디스 아일린 하디 샤르도네(Hardys Eileen Hardy Chardonnay) 2021
와인을 마실 때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 있다. 이 와인이 그랬다. 부르고뉴의 마을 단위 샤르도네를 떠올리게 하는 정제된 구조감.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라면 호주 와인임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화이트 와인에 일가견이 있는 세계적인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이 ‘호주의 퓔리니 몽라셰’라 평한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흰꽃, 백도, 배, 브리오슈, 구운 견과류와 오크 향이 은은하게 어우러진다. 상쾌한 산미와 단단한 구조감 덕분에 온도가 올라가도 흐트러짐이 없다. 허니소스 돼지고기 바비큐와 머스타드 소스를 곁들인 구운 삼겹살이 페어링으로 제시됐는데, 둘 다 훌륭했지만 와인의 우아한 멋과 조화를 이룬 것은 단연 허니소스 쪽.

하디스 HRB 쉬라즈(Hardys HRB Shiraz) 2019
호주 쉬라즈라면 홍삼 스틱처럼 찐득한 인상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와인은 달랐다. 요즘 호주 쉬라즈의 추구미 - 찐득함보다 가벼운 과일 풍미, 생동감 넘치는 산도 - 를 정확히 보여준다. 올드바인이 식재된 맥라렌 베일을 중심으로 블렌딩된 이 와인은 자두, 블랙베리, 아니스, 후추의 향이 조화롭고 타닌은 부드러워 목넘김이 편안하다. 신선한 산도 덕분에 기름에 볶거나 튀긴 중식과 궁합이 좋은 편. 칠리 소스를 곁들인 랍스타의 매콤한 소스가 와인의 향신료 뉘앙스를 끌어올렸다. 소스 하나에도 페어링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사실, 와인 애호가라면 꼭 기억해 둘 만하다.

하디스 아일린 하디 피노 누아(Hardys Eileen Hardy Pinot Noir) 2022
호주의 최남단, 서늘한 태즈메이니아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 라즈베리, 체리, 로즈 페탈, 바닐라의 향이 맑고 고르게 피어난다. 정돈된 타닌과 실키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중식 메뉴 중 북경오리는 자타공인 피노 누아의 단짝이다. 닭, 오리, 거위, 메추라기 같은 가금류 요리는 모두 피노 누아의 절친들! 북경오리와의 궁합을 의심한다면? 애초에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밀전병에 싸 먹기보다 소스만 올린 오리고기가 휠씬 더 좋았는데, 아무래도 소스가 한몫한 듯했다.

하디스 아일린 하디 쉬라즈(Hardys Eileen Hardy Shiraz) 2021
아일린 시리즈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 쉬라즈 세 종류로 구성된다. 이 쉬라즈 역시 맥라렌 베일의 50~110년 수령의 올드바인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블루베리와 자두의 농축된 향, 다크 초콜릿, 오크, 검은 후추의 풍미가 겹겹이 쌓여 부드럽게 퍼진다. 복합성과 조화. 아일린 하디 시리즈를 관통하는 핵심이라 할 만하다. 검은 후추 소스를 곁들인 한우볶음은 ‘페어링의 정석’을 보여줬다. 후추가 두 존재를 이어주는 강력한 접착제가 되었기 때문.

하디스 토마스 하디 카베르네 소비뇽(Hardys Thomas Hardy Cabernet Sauvignon) 2017
1865년, 창업자 토마스 하디는 여러 지역의 포도를 블렌딩하면 와인에 다양한 개성을 부여하고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선견지명은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하디스의 철학이자 유산으로 남았다. 이 와인은 그를 오마주한 하디스의 최상급 아이콘 와인이다. 남호주 쿠나와라(Coonawarra)와 서호주 마가렛 리버의 포도를 블렌딩했다.
카시스, 블루베리, 블랙베리, 검은 자두, 바닐라, 삼나무 향이 풍부하다. 산미는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타닌은 유연하다. 단단한 구조감 덕분에 15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도 충분하다. 마라 우화육 대파 볶음과의 페어링은 의외로 훌륭했다. 마라의 강한 향을 섬세하게 조정한 덕분이었다. 잘 익은 과일에서 오는 풍만한 단맛이 매운 향신료와 어우러지며, 입안 가득 관능적인 조화를 선사했다. 모든 감각이 호강하는 순간이었다.
“산미가 살아있는 상큼한 와인은 거의 모든 아시아 음식과 잘 어울린다.”
<아시아의 맛(Asian Palate)>의 저자 지니 조 리(Jeannie Cho Lee)MW의 이 말은 한마디 보탬없이 중식과 하디스 와인의 페어링에서 그대로 증명되었다. 페어링의 정석을 따르면서도 개성적인 요소로 차별화를 이뤄낸 점이, 코스의 기승전결을 완성한 일등공신이 아닐었을까 싶다.
오늘의 와인들은 부드럽고 우아했다.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루려는 미덕이 있다. 하디스는 그동안 너무 익숙한 이름이라, 오히려 새로움을 잃은 브랜드처럼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페어링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항상 곁에 있어 그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존재’가 있었고 바로 하디스였다는 것을. 와인 페어링은 미식의 기술이 아니라, 서로의 조화를 이해하려는 가장 인간적인 시도다.
글·사진 박지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