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말에 시작된 캘리포니아 아티장 무브먼트(Californian Artisan Movement)를 무시할 수 없어요. 사시 무어만(Sashi Moorman)도, 저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았거든요.”
지난 11월 18일(화)에 열린 와인 & 치즈 토크쇼에서 치즈 아티장이자 안단테 데이어리의 김소영 대표는 새롭게 수입하게 된 사시 무어만의 와인들을 소개했다. 김 대표가 언급한 ‘아티장 무브먼트’는 당시 캘리포니아 미식 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킨 흐름이었다. 와인과 치즈 분야에서 소규모 생산자들이 등장하며 기존의 대형 브랜드 중심 구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할란 에스테이트(Harlan Estate),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등 나파 밸리 스타 와이너리의 부상은 캘리포니아 와인에 대한 관심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김 대표는 “안단테 데어리도 1999년에 시작했어요. 좋은 와인과 치즈는 프랑스나 유럽에서 온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시기였어요”라고 회상했다.
사시 무어만은 이 아티장 시대를 상징하는 와인메이커다. 그의 와인은 높은 알코올, 과숙한 과일, 과한 오크라는 미국 와인의 고정관념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미국 테루아에서 부르고뉴 와인의 우아함과 신선미를 끌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준 생산자 중 한 명이다.
김 대표 역시 오랫동안 비슷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처음 아티장 메이커의 와인을 마신 순간 “내가 알고 있는 미국와인이 맞나?”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섬세하면서도 균형 잡힌 스타일에 충격을 받은 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미국 와인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사시 무어만의 와인을 직접 들여오기로 한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건 살아 있는 와인이에요. 치즈처럼요. 살아 있는 음식은 책임있게 다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수입하기로 했어요.” 결이 닮은 두 장인의 만남은 사시 무어만이 추구하는 와인의 섬세한 철학이 국내 시장에 가장 온전하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와인, 기술 아닌 재료의 문제
사시 무어만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와인메이커 중 한 사람’으로 회자된다. 특히 산타 리타 힐즈의 잠재력을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요리를 향해 있던 그는 셰프의 길을 걷다,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은 늘 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양조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무어만은 “양조도 요리와 마찬가지로 재료가 모든 걸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에게 와인 양조는 기술의 조합이 아니라, 포도와 테루아가 전하는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해마다 달라지는 자연의 흐름을 피하지 않는다. 지역의 개성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 모든 포도밭에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도입했다.
그의 와인은 부르고뉴를 떠올리게 한다. 우아함, 미네랄리티, 균형을 중심에 두고 테루아의 정체성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무어만은 포도의 과숙을 피해 알코올 도수를 12~13% 선으로 유지한다. 그가 말하는 ‘완벽한 수확 시점’을 포착하는 일은 경험과 노하우의 축적이 요구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페놀 성숙은 충분하되 당도는 과하지 않은 시점을 정확히 포착해 수확함으로써, 풍부한 구조감과 아로마, 낮은 알코올, 높은 산도를 갖춘 와인을 만든다. 그의 철학대로, 모든 결정은 결국 ‘재료’에서 출발한다.

순수한 디테일을 위한 선택
무어만은 복잡한 기술보다 시간과 인내, 최소한의 개입이 만들어내는 변화에 기대는 쪽이다. 발효는 야생 효모에 맡기고, 화이트 와인을 만들 땐 가볍게 눌러 흘러나오는 프리 런 주스만 사용한다. 수율이 낮아지지만, 샤르도네의 섬세함과 생기가 또렷해진다.
오크 사용 역시 목적이 명확하다. 그는 “과거에는 타닌이 많은 포도를 다뤘기 때문에 장기 숙성이 필수였다. 지금은 포도밭 관리와 양조 기술이 발전해서 발효 후에도 균형잡힌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숙성은 향을 덧입히는 과정이 아니라 와인의 구조를 다듬는 단계로 본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른 병입을 선호한다. 과일 풍미와 신선함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다.
오크의 선택도 같은 맥락이다. “새 오크를 쓴다면 그건 와인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 오크는 오래된 오크보다 산소 투과도가 훨씬 높다. 필요에 따라 새 오크나 오래된 오크를 사용한다.” 그에게 오크란 미세한 산소 공급을 조율하는 장치에 가깝다. 정제나 여과를 하지 않고 이산화황 사용도 최소화한다. 이는 과일과 테루아의 특성을 해치지 않고 음식 친화력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다.
쿨 클라이밋 테루아의 정점
오늘날 무어만은 오리건과 캘리포니아에서 4개 와이너리의 운영과 와인 양조를 책임지고 있다. 라인업을 본다면 오리건의 이브닝 랜드 빈야드(Evening Land Vineyards), 캘리포니아의 산디 와인즈(Sandhi Wines), 도멘 드 라 코트(Domaine de la Côte), 피에드라사시(Piedrasassi)이다.

오리건 에올라-아미티 힐스(Eola–Amity Hills)
부르고뉴에서 바다를 건너온 피노 누아가 오리건에 자리 잡은 지도 오래다. 에올라–아미티 힐스(Eola–Amity Hills) 산등성이에 자리한 세븐 스프링스(위 사진)는 1980년대 초 조성된, 오리건에서 가장 역사 깊은 포도원 중 하나다. 이 포도밭을 기반으로 세워진 와이너리가 이브닝 랜드. 무어만과 라자트 파(Rajat Parr)는 2014년에 완전히 인수해 2016년 빈티지부터 세븐 스프링스 에스테이트 단일 재배 포도만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다. 이브닝 랜드의 규모는 약 34헥타르.
부르고뉴보다 따뜻해도 오리건은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후를 유지한다. 발아 시기는 부르고뉴와 산타 리타 힐스에 비해 가장 늦지만 수확 시기는 비슷하다. 무어만은 “와인의 스타일은 포도가 나무에 달려 있는 생육 기간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오리건의 생육 기간이 짧아 산도와 아로마가 신선하게 잘 보존된다. 반대로 캘리포니아의 생육 기간은 더 길어서, 풍미가 더욱 무르익고 여운이 길어진다. 여기 화산성 토양은 철분이 풍부해 붉은빛을 띠며, 피노 누아의 텍스처와 타닌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무어만은 주변 환경의 역할도 강조한다. “포도밭 주변의 오래된 숲은 심각해지는 기후변화 속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포도밭을 서늘하게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 작은 개울과 폭포는 이 천연 쿨링 시스템을 보강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풍경도 선사해준다. 또한 여기 지형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포도밭의 방향이 동·서향으로 나눠지는 게 흥미롭다. 그는 “동향 포도밭 덕분에 오후의 강한 햇빛을 피할 수 있어, 포도의 신선도를 지키는 데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기후변화의 압력이 커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만큼 안정적인 조건도 드물다.
캘리포니아 산타 리타 힐스(Santa Rita Hills)
산타 리타 힐스와 그 주변 AVA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해양 공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특한 지형 덕분에 미국에서도 가장 서늘한 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동서로 길게 열린 산맥 구조가 냉기와 안개를 깊숙이 끌어들이고, 이로 인해 포도는 천천히 익어 높은 산도와 선명한 풍미를 갖게 된다. 발아 시기가 부르고뉴와 오리건보다 가장 빨라 “포도가 달려 있는 생육 기간”이 길어진 것도 한몫한다. 무어만이 추구하는 낮은 알코올과 신선한 에너지는 바로 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고대 해양 생물의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백색 혈암은 특유의 짭짤한 미네랄 풍미와 섬세한 질감을 와인에 부여한다. 김 대표가 “이 미네랄리티가 와인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설명한 것도 이해된다.
산디 와인즈는 포도를 구매해 생산하는 네고시앙이지만, 주요 포도밭 관리에 깊이 관여한다. 주로 샌포드 앤 베네딕트(Sanford & Benedict)와 리타스 크라운(Rita’s Crown) 등 산타 리타 힐스의 대표 포도밭이 주된 원천. 산타 리타 힐스의 다양한 미세 테루아를 탐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균형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국내외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레이블이다.

도멘 드 라 코트는 무어만과 라자트 파가 설립한 와이너리. 경작된 적 없는 남동향 언덕에 조성한 포도밭과 척박한 토양이 특징이다. 무어만은 “2007년부터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거친 환경 때문에 뿌리가 나무보다 더 커졌다. 이럴 땐 포도에 농축미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알코올 도수 12.8%를 넘지 않음에도 아로마의 집중도와 밀도가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에서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에 등장 이후,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피에드라사시는 무어만의 개인 브랜드로 롬폭(Lompoc)에서 서늘한 기후의 시라(Cool-climate Syrah)를 집중 탐구한다. 거의 100%에 가까운 석회암 토양 덕분에 와인은 밝고 신선하다. 림 락 시라(Rim Rock Syrah)의 경우, 캘리포니아에서 구현하기 힘든 ‘우아한 특성’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단테 데이어리가 공식 수입원이 되면서 국내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산타 리타 힐스의 다양한 프로젝트는 그가 쿨 클라이밋의 장점을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해석하는 생산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테이스팅한 와인들

이브닝 랜드 샤르도네, 세븐 스프링스 에스테이트 2021
Evening Land Chardonnay, Seven Springs Estate 2021
2021 빈티지는 무어만이 추구하는 ‘밸런스와 우아함’이 잘 드러난 해로 평가받았다. 과도한 오크나 버터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레몬, 오렌지 제스트 같은 시트러스의 향이 생생하다. 입안에서 미네랄리티와 산도가 조화롭고, 맑고 정교한 오리건 샤르도네의 전형을 보여준다. Wine & Spirits 93, Wine Advocate 92, James Suckling 91

산디 샤르도네, 산타 리타 힐스 2021
Sandhi Chardonnay, Sta. Rita Hills 2021
전에도 이 와인을 마셔봤지만 이번처럼 “맛있다”라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기본급이지만 산타 리타 힐스의 핵심 포도밭에서 온 포도를 블렌딩해 품질의 안정성이 뛰어나다. 레몬 제스트와 백도, 미네랄이 주도하며, 구운 헤이즐넛의 향이 은은하다. 부드러운 질감과 날카로운 산도가 조화를 이루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풍부한 레이어를 드러낸다. Wine Advocate 93, Vinous(Antonio Galloni) 93

도멘 드 라 코트 피노 누아, 에스테이트 2020
Domaine de la Cote Pinot Noir, Estate 2020
2020년은 캘리포니아 산불 피해가 컸지만 다행히도 이 도멘은 영향이 적었다. 다섯 개의 싱글 빈야드 포도를 블렌딩해 ‘테루아 중심’ 철학이 잘 반영된 와인이다. 크랜베리, 라즈베리 같은 붉은 베리류의 향이 밝은 느낌이다. 뒤이어 흙 내음과 정향, 허브의 향이 이어진다. 산도는 또렷하고 구조는 단정하다. 농축된 맛이 강한 전형적 캘리포니아 피노와 달리 맑고 섬세한 인상을 남긴다. Wine Enthusiast 96, Wine-Searcher 94

피에드라사시 무르베드르, 발라드 캐년 2017
Piedrasassi Mourvèdre, Ballard Canyon 2017
검은 자두, 말린 허브, 가죽, 후추, 육향이 복합적으로 느껴진다. 견고한 타닌과 구조, 산도가 딱 버티고 있어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풍미는 강렬하지만 질감이 무겁지 않아 식사와 함께 길게 즐기기에 적당하다. 지금도 좋지만 추가 숙성을 기대해볼 만하며, 프랑스 남부 론이나 방돌의 클래식 무르베드르를 떠올리게 한다. Wine Advocate 94, Vinous(Antonio Galloni) 92
시장의 빈칸을 채울 수 있을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방대한 와인 리스트를 자랑하던 바에서도 나파 밸리 이외의 미국 와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단일한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다른 산지의 가능성은 자연히 가려졌다. 오리건과 산타 리타 힐스에서 온 사시 무어만의 와인들은 이 오래된 인식을 조용히 비껴가며, 미국 와인을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 화산토와 고대해양 퇴적층과 서늘한 기후에서 장인의 손끝으로 조율한 산도와 낮은 알코올, 우아함은 오늘의 와인 트렌드가 향하는 방향과 겹쳐진다.
우리는 때때로 전혀 다른 지역, 스타일의 와인을 만날 때 미각의 폭이 한순간에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바로 이런 와인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 취향과 기준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줄 다음 선택지, 빈칸을 채우는 와인은 이미 눈앞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문의 안단테 데이어리
▶인스타그램 andantedairykorea
글 박지현 사진 제공 안단테 데이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