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델 글라스 익스피리언스에서 경험한 ‘형태가 만든 흐름’

Written by박 지현

톰 홀랜드, 톰 히들스턴, 아델, 데이빗 보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영국인이다. 둘째, 길거리나 차 안에서도 애착 머그컵을 들고 다니며 따뜻한 차를 즐긴다. 평범한 영국인들 역시 머그컵을 갖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든 ‘제대로 된’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우아한 고집을 보며 신기해하다가, 문득 와인과 함께 뽁뽁이로 감싼 글라스를 이고 지고 다녔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누가 봐도 유난스럽게 보일 이 행동은 식당에서 잔을 꺼내는 순간 보상받는다. 맥주잔 대신 얇고 유려한 곡선의 글라스에서 와인이 비로소 제 숨을 쉬는 걸 볼 때, 머릿속에선 불꽃이 터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종이컵을 거부하고 자신의 머그컵을 고집하는 영국인들이 새삼 이해된다.

최근 그동안 감각적으로 알고 있던 글라스의 차이를 다시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올해로 270주년을 맞이한 글라스 명가, 리델(Riedel) 글라스 익스피리언스다. 같은 와인이 글라스의 형태에 따라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변주되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와인이 아닌 ‘글라스 테이스팅’을 통해 목격한 글라스의 과학과 미학을 차분히 풀어본다.

리델 글라스 익스피리언스 현장

와인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11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입니다.”

리델의 현 CEO, 맥시밀리언 J 리델(Maximilian J Riedel/이후 리델)이 직접 진행한 이 행사는 리델만의 테이스팅 프로그램으로, 그 역사도 상당하다.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열기가 뜨거웠고, 올해 출시된 파토마노 블랙 타이 컬렉션으로 구성된 테이스팅 세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만약 와인을 마시고 나쁜 기억이 남았다면, 그 원인 중 하나는 와인이 아니라 글라스의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글라스를 바꾸는 게 귀찮거나, 식당에 잔이 한 종류뿐이라는 이유로 화이트 와인부터 샴페인, 스위트 와인까지 레드 와인용 글라스에 마실 때가 많다. 좋은 와인이라는 설명을 들었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데, 막상 입안에서는 물음표가 떠오른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와인을 의심한다. 셜록 홈즈처럼 원인을 추적하다 결국 “아직 덜 열렸나” 혹은 “나와는 안 맞는다”며 밀쳐두곤 한다. 리델은 이런 ‘와인의 나쁜 기억’을 지우고 진면목을 복원하는 과정이 바로 ‘글라스의 과학’이라고 설명했다.

리델 글라스 익스피리언스를 진행한 리델의 CEO 맥시밀리언 J 리델(Maximilian J Riedel)

형태에 따른 흐름(flow), 리델 글라스의 열쇠

테이스팅은 그의 능수능란한 진행으로 이어졌다. 1번 리슬링(샴페인 겸용), 2번 샤르도네, 3번 피노 누아, 4번 카베르네 소비뇽 네 종류의 글라스와 와인이 준비됐다. 테이스팅 방법은 누구나 집에서도 시도해 볼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먼저 리슬링을 두 개의 화이트 글라스에 나눠 따랐다. 외견상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1번 리슬링 글라스에서는 상쾌한 과일 향과 미네랄, 신선한 산도가 조화를 이뤘다. 반면 2번 샤르도네 글라스에서는 향이 닫힌 듯 느껴졌고, 산미가 과도하게 부각됐다. 같은 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감각은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샤르도네를 두 화이트 와인 글라스와 피노 누아 글라스에 나눠 따랐다. 2번 글라스에서는 와인이 혀의 중앙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며 산도와 과일 풍미가 모두 부드럽게 정리됐다. 반면 1번 글라스에서는 와인이 혀 앞쪽으로 떨어지며 산도와 미네랄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피노 누아 글라스에서는 알코올의 존재감이 먼저 느껴졌다. 이때 인상 깊었던 것은 노트의 차이가 아니라, 와인이 입안에서 어디로 도착하느냐였다.

리델이 강조하는 ‘형태’와 ‘흐름’은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글라스의 형태는 와인이 입으로 들어오는 길을 정하고, 흐름은 그 길을 따라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이다. 입구가 좁은 리슬링 글라스는 고개를 더 뒤로 젖히게 만들어 와인이 혀 위를 빠르고 날카롭게 가로지른다. 반면 입구가 넓은 글라스는 와인이 넓게 퍼지며 보다 완만하게 도착한다. 이렇게 와인이 혀에 처음 닿는 면적과 속도는 우리 뇌가 맛을 인지하는 우선순위에 영향을 준다.

이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테이스팅 내내 반복된 우리의 반응 때문이었다. 어떤 글라스의 와인은 자연스럽게 한 모금 더 마시고 싶어졌고,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헹구기 위해 물을 집어 들었다. 글라스를 디자인이나 브랜드가 아닌 ‘기능’으로 선택해달라는 그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와인이 내게만 어려웠던 이유

세 번째 와인은 피노 누아였다. 와인을 마셔본 사람일수록 ‘좋아하지만 늘 조심스러운’ 품종이다. 피노 누아 글라스와 카베르네 소비뇽 글라스에 따랐을 때까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첫 모금에서 인상은 분명히 갈렸다.

전용 글라스에서는 딸기와 체리 같은 붉은 과일이 부드럽게 펼쳐졌고, 산도는 뒤에서 균형을 잡았다. 타닌은 구조를 만들되 질감을 해치지 않았다. 반면 카베르네 소비뇽 글라스에서는 시고 씁쓸한 맛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목 넘김조차 쉽지 않았다.

리델은 이 차이를 피노 누아 글라스의 미세하게 바깥으로 벌어진 립, 이른바 ‘산도 범퍼(acidity bumper)에서 찾았다. 작은 각도는 산도가 처음부터 튀어나오지 않도록 한 번 완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과일의 인상이 산도보다 먼저 자리 잡는다. 흔히 “피노 누아는 어렵다”, “입문자에겐 이르다”는 편견 역시, 어쩌면 와인 자체의 성격이 아니라 잘못 선택한 글라스에서 비롯된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리델 파토마노 블랙 타이 컬렉션

품종에 맞는 흐름

마지막 카베르네 소비뇽에 이르면 리델의 철학은 더욱 또렷해졌다. 피노 누아 글라스는 충분히 컸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의 구조를 담아내지 못했다. 열감과 알코올만 도드라졌다. 피노 누아 글라스는 섬세한 구조를 돋보이게 설계된 만큼, 타닌과 밀도가 강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담으면 오히려 ‘나쁜 기억’이 남기 쉬웠다. 날렵한 리슬링 글라스도 마찬가지다. 결국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와인(품종)의 성격에 맞게 입안에서 어디로 전달되도록 설계되느냐였다.

와인의 친한 스피커, 글라스

리델은 1950년대부터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원칙 아래 글라스를 만들어왔다. 형태가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이 와인의 인상을 결정한다는 발견은 설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번 글라스 테이스팅은 그 철학이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경험으로 확인되는 자리였다. 리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라스 자체가 와인을 바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와인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올바른 글라스를 선택하는 일은 와인을 오해하지 않고 본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태도에 가깝다.

문의 대유라이프
▶홈페이지 www.riedel.com
▶인스타그램 @riedelpartner_korea

박지현 사진 제공 대유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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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6년 0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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