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고도 열정적인 사람들. 서그리스(Western Greece) 와인 산지를 탐험하는 동안 만난 그리스인들은 그랬다. 이 ‘균형’은 아마도 마음이 풍요롭기 때문이리라. 따뜻한 남쪽나라 특유의 여유로움은 그들의 DNA에 새겨져 있는 듯했고, 땀이 흘러내리는 무더위 속에서도 눈빛을 반짝이며 와인을 설명할 때에는 이 땅에 대한 자부심과 미래를 향한 도전 정신이 동시에 느껴졌다.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넘치는 투 두 리스트(To do list)를 도장깨기 하듯 하루를 보내는 현대 한국인도 단 3일이면 충분했다. 서그리스의 문화와 와인에 완전히 녹아들기까지. 유럽연합과 그리스가 공동 후원하는 ‘서그리스의 PDO / PGI 와인’ 홍보 캠페인의 일환으로 펠로폰네소스 땅을 밟았다. 고대 유물처럼 펠로폰네소스 땅이 고이 간직해온 아하이아(Achaia)와 일리아(Ilia)의 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하이아, 그리고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생산량 기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와인 생산지 중 하나인 아하이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최북단에 있으며,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파트라(Patra)를 수도로 한다. 펠로폰네소스에는 총 7개의 PDO(Protected Designations of Origin) 와인이 있는데, 이 중 4개가 아하이아 지역에서 나온다. 우선 PDO 파트라는 해안 지역부터 산악 지역까지 아우르는 드넓은 PDO다. 분홍빛 껍질을 가진 독특한 로디티스 품종으로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나머지 3개의 PDO는 모두 스위트 와인이다. PDO 마브로다프네 오브 파트라(Mavrodaphni of Patra)는 이 지역의 상징적인 레드 품종인 마브로다프네로 만든다. 이름에 ‘Mavro(검은)’가 들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 색과 향미가 진한 품종이다. PDO 마브로다프네 오브 파트라 와인은 주정강화방식으로 만들어 포트 와인처럼 달콤하고 진한 풍미가 특징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이자 작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햇볕에 말린 포도로 와인을 만들었다. 아하이아 지역에서 이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키고 있는 PDO가 바로 머스캇 오브 리오 파트라(Muscat of Rio Patra)와 머스캇 오브 파트라(Muscat of Patra)다. 원래 아로마틱한 머스캇 포도를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빛 아래에서 말려 당도, 산도, 아로마, 풍미가 농축된 와인을 생산한다. 두 PDO에서는 주정강화방식으로도 스위트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아하이아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가 있다. 1861년 독일 상인 구스타브 클라우스(Gustav Clauss)에 의해 시작된 아하이아 클라우스(Achaia Cluass)가 그 주인공이다. 1859년 파트라스를 방문한 구스타브 클라우스는 이 지역에 매료되어 와이너리 건물을 필두로 마을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 이태리, 그리스 등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열 여섯 가족을 데려와 가족으로 포용했다. 집과 직업이 생긴 이 다문화 커뮤니티는 와이너리의 발전에 초석을 쌓아 올렸다. 일면 로맨틱하기도 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어진다. 마브로다프네 품종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아하이아 클라우스에서라는 것. 오래전 와이너리에서 살았던 ‘다프네’라는 이름의 소녀가 이른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고, 커뮤니티의 모두가 슬퍼하여 소녀의 눈처럼 진하고 검은 포도에 ‘다프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PDO로 지정되기 훨씬 전부터 아하이아 클라우스에서는 마브로다프네 포도로 주정강화 스위트 와인을 만들었다. 와이너리의 셀러에는 100년이 훨씬 넘은 와인 배럴이 컬렉션처럼 줄지어 있다. 그리스의 왕 조지 1세(George I)나 여왕 올가(Olga)처럼 역사적인 인물들에게 헌정한 배럴들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1873년산 마브로다프네 와인이다. 구스타브가 만든 첫 마브로다프네 와인으로,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독일 인물인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에 헌정한 배럴이다. 배럴에 든 와인의 상태가 오늘날까지 괜찮을까? 답은 “Yes!” 웃으며 대답하는 와이너리 투어 담당자의 목소리에서 “그럼, 정말 맛있어!”라는 내면의 소리까지 느껴진다. 당도와 알코올이 높은 주정강화 와인이라 숙성력이 원래 좋기도 하지만, 배럴의 벽면을 당분이 코팅하여 산소가 통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같은 상태라는 것. 와이너리의 보물과도 같은 이 와인들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병입된다. 예를 들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열렸을 때 1896 빈티지 와인 108병을 병입했는데, 이는 1896년에 그리스에서 현대의 첫 올림픽이 열린지 108년만에 다시 올림픽이 열리는 것을 기념한 것이다.
유럽 최고의 서늘한 와인 생산지
일반적으로 PGI 와인은 생산 규정이 엄격한 PDO 와인보다 중요도가 낮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PGI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Slopes of Aigialia)라면 얘기가 다르다. 기후변화에 따라 최근 주목받고 있는 ‘서늘한 와인 생산지’에 속하기 때문이다. PGI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는 아하이아의 일부 산악지대들을 묶은 와인 생산지다. 포도밭은 모두 해발고도 500미터에서 1,100미터 사이의 가파른 경사지나 산 정상 고원에 조성되어 있다. 유럽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와인 산지라 정의되곤 한다. 보통의 와인 산지에서는 남향의 포도밭을 최고로 치지만 이곳에서는 북향의 포도밭이 많다. 북쪽의 코린트(Corinth) 만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다. 또한 남쪽에는 산맥이 있어 펠로폰네소스 남부 지역에서 오는 뜨거운 열기를 차단해준다. 버스를 타고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를 오르는 동안 고도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가파른 지형은 큰 기온차와 공기 순환, 즉 바람이 많이 부는 조건을 만든다. 덕분에 곰팡이나 병충해의 우려가 없어 포도를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부티크 와이너리 테트라미토스(Tetramythos)에서 8개 와이너리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와인에 신선한 산미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긴 했지만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하기엔 너무나 다채로웠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산악 지형에서 포도밭의 위치에 따라 개별적인 마이크로 떼루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PGI 와인이라 상대적으로 생산 규정이 느슨한 점도 한 몫한다. PGI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에서는 주품종인 로디티스(Roditis)를 포함하여 시데리티스(Sideritis), 머스캇, 마브로 칼라브리티노(Mavro Klavritino) 등의 토착 품종과 국제 품종을 아울러 19개의 품종이 허용된다. 내추럴 와인이나 오렌지 와인, 암포라 숙성 등의 새로운 물결에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와인 생산 규정 안에서 젊은 와인 생산자들이 다양한 품종으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슬로프스 오브 애기알리아의 시대가 열릴 것 같다.
고대 올림피아의 와인 향을 느끼며
아하이아에서 이오니아해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오면 일리아가 나온다.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올림피아가 있는 지역이다. 고대 올림픽 당시 와인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제공되거나, 올림픽 경기 중 관중들에 의해서 많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올림피아는 아직도 고고학 발굴이 진행 중인데,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압착하던 장소인 레노스(Lenos)의 발견은 이 지역의 오랜 와인 역사를 뒷받침한다. 오늘날 일리아에는 2개의 PGI 와인이 있다. 전 지역을 아우르는 PGI 일리아와 훨씬 좁은 지역인 PGI 레트리니(Letrini)가 그것이다.
일리아에는 그리스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와이너리 중 하나인 메르쿠리 이스테이트(Mercouri Estate)가 있다. 1864년 설립되어 19세기 후반에 이미 해외 수출까지 한 이력이 있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1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와이너리는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다. 1930-40년대에 신식 와인 양조 설비를 도입하고 와이너리 건물을 증축했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와인 양조를 포기해야 했다. 포도는 계속 재배했지만 큰 와인회사에 납품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 1980년대에 가문의 3-4세대의 노력으로 와인 생산 시스템을 복구하게 되었다. 이 굴곡진 세월은 민속 박물관같이 와인 양조 도구를 전시해 놓은 와이너리의 옛 건물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메르쿠리 이스테이트에서 주목할 점은 또 하나 있다. 와이너리 설립 당시 포도밭에 처음으로 심은 품종이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레포스코(Refosco) 품종이라는 점이다. 그리스 땅에 심어진 첫 외국 품종인 셈인데, 잘 적응하여 고품질의 와인으로 만들어지며 현재는 그리스 토착 품종이라 여기기도 한다.
일리아에는 약 10개의 와이너리가 3천 헥타르에 달하는 포도밭에서 와인을 생산한다. 그중 6개 와이너리가 와인을 선보이기 위해 메르쿠리 이스테이트에 모였다. 아하이아에 비하면 평지에 속하는 일리아는 확실히 기온이 높게 느껴졌다. 이는 곧, 보다 완숙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날 시음한 일리아 와인 중에는 잘 익은 적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들이 훌륭한 품질을 보였다. 화이트 와인은 대부분 풍성한 아로마와 섬세한 미감이 돋보였다.
서그리스의 문화와 와인에 완전히 녹아들다
서그리스의 와인 산지를 둘러보는 동안 만난 와인 생산자들과 프로젝트 관계자들은 모두 무엇이든 내어주려는 따뜻한 마음과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누구도 조급해하지 않았으며 사무적으로 방문객들을 대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와인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여유, 그리고 와인에 진심인 사람들의 열정. 와인을 배우러 갔지만 풍요로운 마음까지 가르쳐준 서그리스의 와인이 한국 시장에 잘 안착하기를 바란다.
글/사진 신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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