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딱 한 가지 와인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와인을 가져가야 할까? 와인에 진심인 애호가라면 거침없이 “부르고뉴 와인”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르고뉴 피노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렵게 진해진 와인이면 선뜻 답하기 어려울지도. “섬세하고 우아한 맛”은 피노 누아를 정의하고 다른 품종들과 구별 짓는 차이점이지만 요즘 부르고뉴 와인에선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양조 스타일의 변화, 급속도로 진행 중인 기후변화 등 원인은 다양하다. 일각에선 걱정해야 할 정도로 부르고뉴 와인(특히 피노 누아)의 스타일이 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지난 7월 17일(월) 피카르 패밀리(Picard Family)의 프란신 피카르(Francine Picard)가 방한하여 롯데호텔 무궁화에서 프레스 런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앞선 고민을 해결해 줄 “순수를 잃지 않은 부르고뉴 와인의 원형”에 가까운 와인을 만났다.
와인에서 증류주까지, 고집과 열정으로 완성된 피카르 패밀리
1951년 프란신 피카르의 할아버지, 루이 펠릭스 피카르(Louis Félix Picard)는 도멘을 설립하고 아들 미셸 피카르(Michel Picard)와 함께 와인뿐만 아니라 브랜디까지 생산하는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미셸이 주도하여 1986년에 코트 샬로네즈의 남쪽 몽타니(Montagny)에 위치한 도멘, 샤또 드 다브네(Château de Davenay)를 인수하면서 와인 생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97년 메르퀴레(Mercurey)에 위치한 도멘 르베르-바로(Domaine Levert-Barault), 1998년에 11세기 웅장한 건물이 눈에 띄는 샤토 드 샤샤뉴-몽라쉐(Château de Chassagne-Montrachet)를 차례로 인수했다.
불타는 전차는 멈추지 않는다고. 상세르(루아르)와 샤토네프 뒤 파프, 꽁드리유의 와이너리도 소유하며 세력을 넓혔다. 아버지처럼 미셸은 1993년 남부 프로방스에서 아니스 생산 회사를 인수, 증류주 사업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스코틀랜드 싱글 몰트 위스키, 럼, 코냑까지 증류주 분야도 개척해 ‘피카르 와인 앤 스피릿(Picard Vins & Spirits)’이란 종합주류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현재 직원 600여 명, 연간 평균 매출액은 2억 5천만 유로이며 매출에서 증류주가 65%, 와인이 35%를 차지한다.
아버지의 딸에서 와인의 개척자로
프란신 피카르는 고향을 떠나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에서 일하며 포도나무의 부름에 저항했으나 마침내 가업을 잇기 위해 귀향했다. ‘피카르’란 이름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와인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았던 그였지만 90년대 말에 합류한 뒤 2004년부터 부르고뉴 도멘들을 도맡아 진두지휘하며 와인에 열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를 힘들게 한 건 ‘아버지’라는 벽. 구세대였던 아버지의 눈에 그는 미덥지 않게만 보였고, 특히 포도밭에 유기농과 비오디나믹 농법을 적용하는 문제엔 확연한 인식의 차이를 보였다. 아버지는 유기농에 관심조차 없었고 오히려 생산량 감소를 걱정했다. 프란신은 “지금까지 완벽한 와인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만큼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며 유기농 라인의 경우 아버지의 우려와 달리 와인의 품질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감과 함께 유기농에 관해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고. 스스로의 힘을 믿고 변하자 아버지의 시선도 달라졌다.
부르고뉴 도멘으로서 기후변화를 준비하는 자세
이제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는 지구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유기농과 비오디나믹 농법을 적극 수용하면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체감한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보호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레이블과 종이 박스 등 각종 부자재를 생산하는 업체 또한 친환경 기업인지 사전에 확인한다. 피카르에선 매일 포도밭에서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해 다각도로 매뉴얼을 준비해서 어떤 변화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140헥타르의 포도밭 중 30헥타르에서 새로운 품종을 재배 중이란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최근 부르고뉴에선 기후변화가 부르고뉴 와인 스타일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의 다른 클론(당분이 적고 늦게 익는)을 찾거나 오래전에 버려진 품종들을 대상으로 실험 중이다. 피카르에선 가메, 알리고떼, 사바냥(쥐라), 말벡을 재배하며 관찰하고, 기존 와인과 블렌딩할 수 있는지 실험하며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심각한 기후변화의 해답을 품종의 다양화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인다.
강약의 조화 속 밸런스의 극치
피카르 패밀리는 부르고뉴에서 총 140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꼬뜨 샬로네즈와 꼬뜨 드 본에 위치하고 있다. 모든 밭과 도멘은 프란신 피카르의 관리하에 있고 직접 소유한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만 가지고 와인을 생산한다. 신동와인을 통해 소개되는 와인은 두 종류로 샤또 드 다브네(Château de Davenay)와 도멘 르베르-바로(Domaine Levert-Barault)이다. 얼음과 불이 노래하듯이 피카르의 와인들은 훌륭한 밸런스를 보여주며 감각을 일깨웠다.
피카르 패밀리의 첫 번째 도멘, 샤또 드 다브네
꼬뜨 샬로네즈 남쪽 몽타니와 북쪽 륄리(Rully)에 프르미에 크뤼 포도밭을 포함해 총 15헥타르를 가지고 있다. 주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아펠라시옹. 기본 유기농과 비오디나믹으로 관리되며 40~70년 된 올드바인들이 건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버터 풍미보다 크리스피한 산도가 살아 있는 신선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70-80%는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나머지 15~20%는 2-4년 된 중고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몽타니 프르미에 크뤼 라 그란데 피스 2020 Montagny 1er Cru La Grande Piece 2020
향부터 ‘Crispy, Fresh’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신선한 시트러스 과일향이 맞이해 준다. 허니서클, 꽃향이 은은하고 산미는 중간 정도로 부담 없다. 깨끗하고 세련된 느낌이며 함께 매칭한 우엉 강정과 잘 어울려 다른 채소 튀김이나 찜 요리와 매칭해도 무리 없을 듯하다.
륄리 프르미에 크뤼 레 라부르스 2020 Rully 1er Cru Les Rabources 2020
보통 륄리 와인은 몽타니에 비해 가볍고 상쾌한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이 와인은 오히려 몽타니보다 깊은 맛과 과일 향미가 풍부했다. 프란신은 몽타니의 샤르도네 클론과 다르고 포도밭의 고도도 달라 “몽타니보다 노란색 과일과 꽃향이 진하고 라운드하다”라고 설명했다. 전적으로 동감. 천도복숭아와 살구의 향과 맛이 나고 깔끔하지만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살짝 헤이즐넛의 향도 느껴졌다. 새조개 만두와 매칭도 좋았고 제철 맞은 민어전이나 육전도 괜찮은 조합으로 예상할 수 있다.
메르퀴레의 유서깊은 도멘 르베르-바로
무려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멘으로 프르미에 크뤼 포도밭을 포함해 총 9.5헥타르 규모다. 6개의 프르미에 크뤼와 2개의 마을 단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유기농과 비오디나믹으로 관리하고 과숙성을 피하고자 수확기 전부터 포도의 숙성 단계를 일일이 체크한 뒤 적당한 수확 시기를 정한다. 양조할 때 포도알만 사용하지만, 빈티지나 포도의 상태에 따라 구조감을 보강하기 위해 포도 줄기까지 넣기도 한다. 샤또 드 다브네처럼 스테인리스 스틸과 배럴을 사이즈별로 세심하게 사용한다. 메르퀴레는 꼬뜨 샬로네즈 레드 와인의 40%를 생산하는 가장 유명한 아펠라시옹이다. 프란신은 “100년 전 메르퀴레 와인은 꼬뜨 드 뉘 와인과 비슷한 가격이었는데 꼬뜨 드 뉘, 꼬뜨 드 본, 꼬뜨 샬로네즈로 행정 구역상 이름이 바뀌고 나눠지면서 메르퀴레 와인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다"고 저평가받는 메르퀴레 와인의 현실을 토로했다.
메르퀴레 프리미에 크뤼 끌로 데 바로 2019 Mercurey 1er Cru Clos des Barraults 2019
산딸기같이 붉은색 베리류의 향미가 많이 나며 감각을 집중시키는 힘이 느껴진다. 이 와인의 경우, 흔치 않게 구조감을 보강하기 위해 줄기까지 넣었다고 한다. 깔끔한 산도와 함께 부드럽게 넘어가는 탄닌이 인상적인 와인. 밸런스가 잘 잡혀 있고 섬세한 피노 누아의 특징이 드러나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다. 기름기 있는 생선, 장어구이나 연어구이와 잘 어울린다.
메르퀴레 프리미에 크뤼 라 샤시에르 2019 Mercurey 1er Cru La Chassiere 2019
로즈워터, 따뜻한 향신료, 붉은 베리들의 향이 한꺼번에 퍼져 나오며 놀래킨다. 앞의 와인보다 좀 더 목 넘김이 부드럽고 실크처럼 매끄러운 감촉이다. 산도 또한 튀지 않고 잘 정돈된 느낌이며 섬세하고 우아함이 느껴져 피노 누아 애호가라면 반할 수밖에 없는 와인. 양념이 강하지 않은 불고기, 떡갈비의 감칠맛과 잘 맞을 것 같다.
메르퀴레 프리미에 크뤼 라 바세 2019 Mercurey 1er Cru La Vasse 2019
로즈페탈, 붉은 베리, 검은 과일, 향신료, 에스프레소의 향이 어우러져 후각을 자극한다. 약간 미네랄 느낌과 함께 부드럽지만, 탄닌의 힘이 느껴지고 액센트가 있다. 메르퀴레의 클래식한 스타일로 앞서 두 와인보다 힘 있고 진한 느낌. 어울리는 음식은 소고기 안심구이, 돼지고기 목살구이처럼 구워 먹는 고기를 추천한다.
와인에 진심이건 아니건 우리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섬세하고 우아한 맛”에 길들었고 코르크를 딸 땐 그 맛을 기대하고 상상한다. 게다가 메르퀴레 피노 누아는 “단단하며 거칠지만 숙성이 잘 된다”고 하지만 피카르 패밀리의 와인은 시냇물처럼 맑고 보다 순수하다. 외유내강 와인으로 우리가 기대하고 좋아하는 피노 누아의 맛을 간직하고 있다. 무인도에 가져갈 와인? 당분간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수입사 신동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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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지현 사진/자료 제공 신동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