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나 또한 올드 빈티지 와인을 경험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돌고래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만큼 올드 빈티지 와인은 귀하다. 게다가 전 세계 와인의 99%가 장기 숙성이 필요하지 않은 게 현실. 대부분 와인은 빈티지에서 2년 내에 출시되고 구매 후 6개월 안에 소비된다. 다시 말해 와인의 출시 시점이 “마시기 딱 좋은 때”라고 이해해도 좋다. 나머지 1% 와인은 장기 숙성을 통해 독특하거나 혹은 지금보다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11월 17일 수입사 국순당이 마련한 스페인 와인, 몬테 레알(Monte Real) 프레스 인터뷰에서 1% 와인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춘 와인과 조우했다(이런 행운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에두아르도 사이스 마로티아스(Eduardo Sáinz Marotias) 디렉터와 페데리코 바스케스(Federico Vazquez) 인터내셔날 디렉터 두 사람(위 사진)은 한국에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몬테 레알에 관해 많은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줬다.
장기숙성 와인의 장인, 리오하네스
몬테 레알 브랜드를 소유한 보데가스 리오하네스(Bodegas Riojanas, 이하 리오하네스)는 1890년에 설립된 리오하 알타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이다(리오하에서 첫 번째 상업적인 와이너리의 설립 연도는 1852년이다.). 세니세로(Cenicero)에서 뿌리 깊은 와인 양조 전통을 가진 프리아스 아타쵸(Frias Artacho)와 라파엘 카레라스(Rafael Carreras)가 협력하여 설립한 것. 현재 5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가며 “장기 숙성 와인”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몬테 레알은 1930년 로만 아타쵸(Roman Artacho)와 프랑스 와인메이커 가브리엘 로렌당(Gabriel Larrendant)이 손잡고 완성한 브랜드. ‘몬테 레알’이란 이름도 산 옆에 자리 잡은 ‘엘 몬테(El Monte)’라는 포도밭의 테루아가 와인메이커의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훌륭했기 때문에 로렌당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리오하네스의 포도밭은 총 800헥타르로 그 중 200헥타르는 직접 재배하는 사유지이며 나머지 600헥타르는 별도의 재배자들이 있다. 와인의 최종 품질은 포도 재배자의 작업에서 비롯됨을 강조하기 위해 포도 재배자를 위한 학교(위 사진)를 설립해 교육하고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손수확이 95%를 차지하고 소량 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와이너리의 연간 평균 생산량은 100만 병인데, 그 중 61%가 레세르바와 그랑 레세르바 와인이다. 기자들을 놀라게 했던 사실로 여기서 61%라는 비율은 리오하 와인의 숙성 규정을 안다면 상당히 놀랄만하다. 리오하에서 법으로 정하고 있는 와인의 숙성 기간은 다음과 같다(아래 표 참조).
생산량의 반 이상을 레세르바, 그랑 레세르바로 만든다는 건 최소 5~7년 동안 자본이 묶인다는 의미다. 보통 생산자라면 엄두조차 못 낼 일. 두 사람은 입 모아 “우리는 시간에 투자한다”며 바로 “스페인 내 판매되는 레세르바와 그랑 레세르바 와인의 8%가 바로 리오하네스 와인”이란 설명에서 열정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무모하게 보여도 고집과 철학 그리고 넉넉한 자본이 뒷받침되어야만 지속할 수 있다. 리오하네스는 확실히 ‘장기 숙성 와인의 장인’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올드바인에서 출발하는 장기 숙성용 와인
리오하네스는 세대를 거쳐 포도를 재배해 왔던 세니세로와 산 비센테 드 라 손시에라(San Vicente de la Sonsierra) 및 인근 마을의 포도원 200헥타르 이상을 직접 관리한다. 스페인은 매우 무더운 와인 생산지로 많은 포도밭이 지구 온난화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리오하네스의 포도밭들은 해발고도 400~600미터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다고. 리오하 알타 자체가 리오하의 와인 생산지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산과 가깝기 때문에 테루아의 혜택을 톡톡히 받는다. 주 토양은 점토질 석회암 토양이며 템프라니요, 마주엘로, 그라시아노 등을 재배하고 있다.
레세르바와 그랑 레세르바 와인은 포도밭에서 시작된다. 포도나무의 수령이 오래될수록 좋은 품질의 포도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그래서 많은 와이너리가 올드바인 포도밭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다. 리오하네스는 포도나무의 수령이 최소 25년이 되어야 크리안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등급별 수확하는 포도나무의 수령은 다음과 같다.
크리안자 : 25~35년 / 레세르바 : 35~50년 / 그랑 레세르바 : 50~120년
“진정한 장기 숙성형 와인은 올드바인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야만 한다. 물론 올드바인의 수확량은 적을 수밖에 없고 리스크도 있지만 이를 보충해 줄 포도밭들이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기다림 속에 피운 와인이란 꽃
“리오하 와인 품질의 핵심은 지리적 조건이나 양조가 아니고, 블렌딩과 숙성이다.”
- 월드 아틀라스 와인(8번째 에디션), 휴 존슨&잰시스 로빈슨 저
리오하네스 와인의 스타일을 완성한 주인공은 전 와인메이커, 펠리페 날다(Felipe Nalda)였다. 2013년 은퇴 전까지 그는 1964년부터 2004 빈티지를 통해 전통을 지향하며 만들었던 장기 숙성 와인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지난 2014년에 리오하 DOCa(D.O.Ca. Rioja) 관리위원회가 주최한 독특한 시음 행사에서 걸출한 와인메이커의 첫 데뷔작, 몬테 레알 그랑 레세르바 1964가 영국 언론들의 극찬을 받았다. 역사상 최고 빈티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1964 빈티지의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디캔터에서 평론가로 활동하는 스테판 브룩(Stephen Brook)은 총 7개 리오하 와인들을 시음한 후 “아직도 과일맛이 풍성하고 집중된 상위 와인은 몬테 레알 그란 레세르바와 놀랍도록 긴장감 있는 마르케스 데 리스칼 코세차였다"라고 평했다. 당시 펠리페는 “강력한 구조를 고려해 오크통에서 6년 동안 숙성”했다고 한다. 50년이 지났어도 생기 있고 복합성도 뛰어나 리오하 와인의 숙성 능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던 것.
2004년부터 리오하네스를 이끄는 와인메이커는 펠리페의 조카, 에밀리오(Emilio)로 영국의 주류 전문지, 더 드링크 비즈니스(The Drink Business)에서 2023 베스트 리오하 와인메이커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항상 과일 캐릭터가 먼저 나오는 과일 풍미 가득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뉴 오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뉴 오크가 너무 강해서 우리 와인에 맞지 않기 때문. 뉴 오크는 크리안자를 숙성할 때 사용하고 레세르바와 그랑 레세르바의 경우, 1~3년 사용한 중고 오크를 사용”한다고 숙성 노하우를 설명했다. 과일 풍미가 중요한 화이트 와인은 “오크통을 물에 넣어 오크 풍미를 어느 정도 뺀 후에 사용”한다고. 리오하네스가 미국산 새 오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유행을 전면 거부했던 와이너리였음이 확실해지는 대목이다.
자연 친화적인 와인, 미래를 위한 선택
포도밭의 날씨가 더워질수록 “문제는 높은 알코올보다 부족한 산도”라며 포도나무에 그늘을 만들어주는 캐노피 매니지먼트를 강조했다. 또한 리오하네스는 온실가스 감축, 수자원 관리, 폐기물 감축, 에너지 효율 및 재생 에너지의 생산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스페인 와인 연맹(Federación Española del Vino - FEV)에서 개발한 WfCP(Wineries for Climate Protection) 인증(위 사진)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좋은 빈티지일 때 더 많이 레세르바와 그랑 레세르바를 만들어 보관한다는 점. 앞서 언급했던 1964 빈티지를 비롯해 1970, 1978, 1998, 2001 그리고 2011 빈티지는 매우 뛰어나서 추천 빈티지이며 그랑 레세르바의 경우 1961 빈티지부터 보관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리오하네스의 셀러에 가보고 싶다. 주요 수출국은 영국, 독일, 아일랜드, 미국, 멕시코, 중국이다.
그랑 레세르바 1998에 압도 당하다
화이트 와인 한 개, 레드 와인 네 개를 시음했는데 하이라이트는 역시 그랑 레세르바 1998이었다. 열정적인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클래식 와인이었다. 국순당 측은 예상보다 이 와인의 반응이 좋아서 얼마 되지 않아 완판했다고 한다. 절로 나오려는 돌고래 소리를 삼키며 시음했던 와인들의 테이스팅 노트는 다음과 같다.
몬테 레알 블랑코 바리카 2022 Monte Real Blanco Barrica 2022
품종 비우라 80%, 말바시아 20%
몬테 레알의 베스트셀링 화이트 와인. 해발고도 450미터인 포도밭에서 핵타르당 3,000~4,000킬로그램을 수확하는데 포도나무의 수령은 40년 이상이다. 약하게 토스트한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발효 후 6개월 리(Lees) 숙성하는데 매일 가라앉은 침전물을 저어주는 바토나쥬(Bâttonage)를 해서 크리미한 질감을 만든다. 아로마틱한 말바시아가 향긋한 향을 더하면서 정말 심심하지 않은 매력적인 와인이 되었다. 파인애플, 바나나, 배의 향과 함께 스파이스, 바닐라의 향이 조화를 이루면서 입 안을 가득 채운다. 산도는 부담스럽지 않고 부드러운 질감에서 매일 바토나주를 했을 직원에게 진심 감사하고 싶었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신선하고 향기로웠다.
몬테 레알 크리안자 2020 Monte Real Crianza 2020
품종 템프라니요 100%
해발고도가 430~630미터인 ‘엘 몬테’ 포도원에서 평균 수령 20년 이상의 포도나무에서 수확한다. 12개월 동안 미국산 새오크에서 50%, 프랑스산 오크에서 50%를 숙성하고 최소 6개월 동안 병 숙성을 진행한다. 몬테 레알이 ‘장기 숙성 와인’을 지향해서 크리안자는 어떤지 궁금했는데 신선하고 붉은 과일의 향과 함께 스파이스와 스모키한 풍미의 조화가 완벽했다. 입 안을 코팅하는 타닌의 강도는 상당히 강하지만 데일리 와인으로 찰떡. 제임스 서클링 93점.
몬테 레알 레세르바 2019 Monte Real Reserva 2019
품종 템프라니요 100%
앞서 언급했듯이 레세르바, 그랑 레세르바를 만들기 위한 포도나무의 수령은 점점 올라간다. 포도나무의 수령은 40년 이상. 중간 정도로 토스트한 오크통(프랑스산 50%, 미국산 50%)에서 24개월 동안 숙성하고 최소 12개월 동안 병 숙성을 끝내야 출시할 수 있다. 가넷 테두리의 붉은 체리 색을 띠고 딸기, 자두, 리코리스의 향이 강하다. 신선한 과일 풍미와 함께 오크에서 온 바닐라, 커피 원두의 향이 은은하다. 확실히 크리안자보다 더 부드러운 타닌과 신선한 과일 산미의 밸런스가 훌륭하다. 제임스 서클링 92점, 각종 대회에서 수상 경력이 화려한 와인.
몬테 레알 그랑 레세르바 2016 Monte Real Gran Reserva 2016
품종 템프라니요 100%
다른 와인들과 마찬가지로 리오하네스가 직접 소유, 재배하는 ‘엘 몬테’ 포도밭의 포도로 만든다. 오크통(프랑스산 50%, 미국산 50%)에서 36개월 동안 숙성하고 최소 24개월 동안 병 숙성했다. 리오하 알타의 템프라니요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 와인으로 블랙베리, 체리 등 잘 익은 베리류의 향이 생생해서 좀 놀랄 정도다. 후추, 정향, 바닐라, 다크 초콜릿의 풍미가 따뜻하게 감싸는 듯하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타닌과 마지막까지 잃지 않는 산도, 마실수록 입에 착착 붙는 감칠맛이 나는 흔하지 않은 와인. 팀 앳킨 91점, 와인 인수지애스트 93점.
몬테 레알 그랑 레세르바 1998 Monte Real Gran Reserva 1998
품종 템프라니요 100%
시간의 위대한 힘을 경험하게 해준 와인. 당시 포도가 매우 건강해서 무려 30일 이상 침용을 했다. 1999년 2월 오크통에서 젖산 발효를 했고 40개월 미국산 오크(거칠고 공격적인 타닌을 없애기 위해 4년 동안 야외에서 보관했다)에서 숙성했다. 2003년 8월 병입한 후 계속 와이너리의 셀러에서 병 숙성했다.
만약 오렌지 테두리가 안 보였다면 올드 빈티지 와인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선 그 자체였다. ‘이러면 반칙이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잘 숙성된 와인에서 나오는 달콤하면서도 깔끔한 과일 풍미와 정향, 바닐라, 리코리스의 느낌 또한 잘 어우러진다. 부드러워 둥글둥글한 타닌과 생기 있는 산도, 우아하고 완벽한 밸런스까지 흠잡을 데 없다. 사실 이 와인은 음식과 페어링하기보단 오롯이 내 앞에 두고 그 시간을 헤아리며 음미하는 게 더 좋을 듯.
올드 빈티지 와인이 선사하는 경이로움 때문에 소비자들은 ‘와인 셀러를 사야 하나?’며 망설인다. 직접 와인을 장기 보관한다는 건 위험 부담을 어느 정도 떠안는 거다. 10~20년 건드리지 않고 보관할 수 있는지, 운 좋게 구매한 와인의 상태가 믿을 수 있는지 등 어찌 보면 벌집을 집안에 들이는 것일 수도.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맛보거나 구매할 기회는 꽤 있다. 비용은 많이 들 수도 있지만 여전히 새 와인을 사서 10~20년을 기다리는 것보단 저렴하다.
리오하네스가 목표 삼은 ‘장기 숙성 와인’은 전략적으로 잘 맞아떨어졌고 지금도 유효하다. “정체성을 잃지 않는 100년 넘는 와이너리의 일관성”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 우리가 몬테 레알 와인을 주의 깊게 봐야 할 이유다.
문의 국순당
▶인스타그램 @ksd_wines
글 박지현 자료 제공 국순당 사진 보데가스 리오하네스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