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업계에는 ‘괴짜’라는 별명을 가진 와인메이커가 몇 있다. 보통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방식을 곧은 의지로 고수하는 와인메이커들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와인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느껴져 ‘괴짜’ 보다는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비비 그라츠(Bibi Graetz)가 딱 그러하다. 지난 10월 5일(목), 비비 그라츠의 와인을 소개하기 위해 마케팅 디렉터 빈센조 단드레아(Vincenzo d'Andrea)가 방한했다. 그 역시 비비를 처음 봤을 때 책에서 배운 양조법과는 정반대로 하는 모습에 “크레이지(Crazy)”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럼에도 그가 오랜 기간 비비 그라츠와 함께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이들의 와인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빈센조 단드레아와의 테이스팅을 통해 알아본다.
예술가 집안이 산지오베제를 다루는 색다른 법
익히 알려져 있듯 비비 그라츠의 백그라운드는 예술가 집안이다. 이름난 조각가인 아버지와 화가인 할아버지, 역시 예술가 가문의 어머니와 ‘아카데미아 델레 벨레 아르띠(Academia delle Belle Arti)’에서 예술을 전공한 비비 그라츠 자신까지. 어머니로부터 4헥타르의 포도밭을 받으며 와인 비즈니스에 뛰어 든 그는 예술가적 재능과 영감을 와인 메이킹에도 아낌없이 접목했다. 초창기 그를 향한 “크레이지”라는 시선은 와인 양조에 있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에서 말미암았을 거다. 와인 레이블도 대부분 비비 그라츠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제작되는데, 로제 스파클링 와인인 볼라마타(Bollamatta)는 다르다. 딸 로자(Rosa)가 9살 때 그린 그림을 레이블로 사용한 것. 흰 바탕에 알록달록 경쾌한 색체가 와인의 산뜻함과 닮았다.
연간 1만 병 정도 한정 생산되는 볼라마타는 비비 그라츠 유일의 스파클링 와인이다. 품종은 산지오베제인데, 그것도 그냥 산지오베제가 아니라 상급 와인인 테스타마타(Testamatta)와 동일한 밭의 올드바인 포도를 사용했다. 침용하지 않고 가볍게 압착하여 얻은 즙을 발효하여, 옅은 연어 빛의 와인이 나왔다. 하지만 맛까지 가볍거나 옅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도 높은 과일 풍미에서 생동감을 가득 전해 받을 수 있다. 올드바인 포도에서 온 힘과 연하게 추출하여 얻은 우아한 미감, 리(Lie) 숙성을 통해 깊이 있는 풍미까지 가지게 된 볼라마타. 비비 그라츠는 이 와인에 자신에게 향하곤 하던 단어 ‘크레이지’를 넣어 ‘크레이지 버블(볼라마타)’이라 이름 붙였다.
안소니카 품종을 아시나요?
와인메이커로서 비비 그라츠의 역사는 2000년에 시작된다. 레드 와인인 테스타마타와 꼴로레를 2000 빈티지로 세상에 내놓은 후, 비비 그라츠는 토스카나 남부의 한 섬으로 눈을 돌렸다. 질리오(Giglio)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50명 남짓 거주하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목적은 단 하나, “이탈리아 최고의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것.” 토스카나 본토의 많은 후보지를 두고 차로 2시간, 배로 1시간, 장장 3시간을 와야 닿을 수 있는 질리오 섬을 주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고대 테라스형 포도밭에 안소니카(Ansonica)라는 토착 품종의 올드바인들이 거의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비 그라츠가 포도밭을 선정할 때 중점을 두는 요건인 ‘토착품종’, ‘높은 고도’, ‘올드바인’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곳이었다. 안소니카는 시칠리아 섬에선 인솔라(Insola)라고 불리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아씨리티코 품종을 조상으로 하는 품종이다. 최고의 안소니카 포도밭을 찾기 위해 비비 그라츠는 2002년 질리오 섬을 탐험하고 품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흐른 15년, 꼴로레 비앙코는 2017 빈티지로 마침내 세상에 첫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날 빈센조와 함께한 테이스팅은 마침 꼴로레 비앙코를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자리였다. 포도밭을 고르는 데 장장 15년이 걸린 꼴로레 비앙코는 질리오 섬 남서쪽에 있는 계단식 포도밭 피에트라보나(Pietrabona)에서 재배된 포도를 사용한다. 해발고도 200-500m에 바다를 마주보고 있으며, 포도나무의 수령은 100년에 육박한다. 2022 빈티지로 만나본 꼴로레 비앙코는 유칼립투스와 같은 허브와 허니서클의 아로마, 잘 익은 복숭아, 살구, 오렌지 등의 과일 풍미, 효모, 허브 노트가 실키한 텍스쳐와 짭조름한 미네랄리티와 함께 긴 여운을 남겼다. 중독성 있는 독특한 아로마는 비비 그라츠가 염원했던 “‘꼴로레’라는 이름에 걸맞는 독특하면서 최고의 품질을 가진 안소니카 와인”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듯했다. 시음 와인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빈센조는 테스타마타 비앙코와 꼴로레 비앙코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테스타마타 비앙코 포도밭은 질리오 섬 언덕 꼭대기 북향에 있다.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부는 곳이라 섬세한 스타일의 안소니카 와인이 만들어진다. 반면 꼴로레 비앙코의 포도밭은 남동향이며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다. 그래서 안소니카 품종으로 강렬하고 풍부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꼴로레 비앙코를 위한 포도밭을 찾아 다니는 동안 비비 그라츠는 안소니카를 주품종으로 하는 프리퀄 격의 화이트 와인, 스코페토(Scopeto)를 만들었다. 토스카나 본토에서 재배된 베르멘티노를 30% 블렌딩하여 좀 더 마시기 편안한 스타일로 만들었다는 게 빈센조의 설명. 2020 빈티지로 만나본 스코페토는 안소니카의 미네랄리티와 허브 아로마가 베르멘티노의 프루티함과 신선함을 만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숙성력 좋기로 유명한 아씨리티코 품종이 조상이라면 장기 숙성을 기대해봐도 좋을까. 빈센조는 “확실히 그렇다. 특히 꼴로레 비앙코는 숙성이 정말 멋있게 될 와인”이라고 응답했다.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것은
미니 테스타마타 혹은 베이비 슈퍼 투스칸으로 불리는 소포코네(Soffocone)의 레이블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소포코네 와인을 위한 포도는 2000년 비비 그라츠의 역사가 시작된 빈칠리아타(Vincigliata) 포도밭에서 생산되는데, 이곳은 로맨스에 빠진 젊은 커플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비비 그라츠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이뤄지는 이 은밀한 데이트에서 착안하여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사랑’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고, 소포코네 와인의 레이블로 사용했다. 하지만 예술을 보는 시각은 언제나 다각도인 법. 일부 국가에서는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수출에 제동을 걸어 레이블을 달리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 문제적인 에로틱한 레이블의 와인병에는 의외로 산지오베제의 생명력이 가득 담겨 있다. 체리, 자두, 크랜베리 등의 신선한 과일 아로마와 사랑스럽고 경쾌한 산미, 붉은 과일류의 풍미가 역동적인 와인. 늘 테스타마타나 꼴로레를 마실 순 없는 우리의 일상에 활력을 주는 것은 이렇게 가격 부담 낮으면서 좋은 기운을 주는 와인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준비할 한 가지 더. 소포코네의 에로틱한 레이블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약간의 여유, 그거면 된다.
투명하고도 농축된 2021
테이스팅의 마지막 잔은 테스타마타 2021과 꼴로레 2021으로 채워졌다. 비비 그라츠는 토스카나의 2021 빈티지에 대해 “포도는 작지만 비교적 높은 농축도를 보여주는 빈티지”로 요약한 바 있다. 밸런스와 우아한 기교가 돋보였던 2015 빈티지와 응축미가 돋보였던 2020 빈티지가 혼합된 모습으로 보면 된다고. 빈센조 역시 “순수하고 우아한 빈티지인데, 매우 농축된 파워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잔을 받아 든 테스타마타 2021 빈티지는 레드 베리류 과일의 깨끗하고 부드러운 풍미에 파마산 치즈, 허브, 꽃, 시가 박스 등의 복합적인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마실 때마다 코 끝과 입 안 가득, 보기 드물게 결이 고운 산지오베제 와인임을 느끼게 하는 와인이 바로 테스타마타라 할 수 있다. 한편 꼴로레는 이번 2021 빈티지로 와인 평론가 제인 앤슨(Jane Anson)으로부터 처음으로 100점을 받았다. 이에 더불어 빈센조는 디캔터, 제임스 서클링, 와인 애드보케이트 등 주요 평가 기관으로부터 100점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획득한 점도 강조했다. 각종 고득점을 증명하듯, 꼴로레 2021에서는 블랙베리와 자두, 꽃, 허브, 토스트, 마른 흙의 향이 강렬하게 번져 나왔고, 좋은 밸런스와 복합적이고 집중도 있는 풍미가 입안 가득 내려 앉으며 앞으로 다이나믹하게 숙성해 갈 것을 예고했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듯 테스타마타는 이탈리아어로 ‘Crazy Head’를 의미한다. 규칙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사람을 일컫는 ‘테스타마타’는 어찌보면 와인메이커 비비 그라츠가 걸어온 길을 설명하는 강력한 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교과서적인 양조 기법보다는 자신만의 양조법을 관철시키고, 예술을 와인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와인 레이블에 예술적 디자인을 적용하고, 남들이 다루지 않는 품중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는 등 독자적인 행보로 성공가도에 올라선 비비 그라츠. 과거 그를 향했던 ‘크레이지’라는 시선은 최고의 칭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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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자료·사진 제공 와이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