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Written by: 강 은영

지난 6월 12일 지오반니 가야(Giovanni Gaja)의 방한을 기념해 롯데호텔 무궁화에서 프레스 런치가 있었다. 위대한 와인 명가를 만드는 건 무엇일까. 이런 스케일의 질문은 가야 같은 명가를 만날 때나 밀려오는데, 굳이 철학을 물을 것까지도 없었다. 농담 하나 에피소드 하나에도 가야는 가야. 어떤 것에 도전하고 무엇을 지키며 어디에 가치를 둬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날 행사에는 4종의 와인이 선보였다. 가야가 시칠리아에서 시작한 프로젝트 와인 이다(Idda)를 시작으로, 볼게리 지역에서 만드는 까마르깐다(Ca'marcanda), 그리고 가야를 상징하는 바르바레스코까지, ‘가야’다움이 가득했다.

지오반니 가야(Giovanni Gaja)

패밀리 비즈니스의 난제와 특권

지오반니는 가족 소개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이 집안 남자들은 ‘안젤로’ 아니면 ‘지오반니’로 이름을 물려받는다. 이날 참석한 지오반니는 일찍이 피에몬테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은 안젤로 가야의 아들이자 집안의 막내다. 아버지 안젤로 가야, 가야의 엔진이라는 어머니 루치아, 그와는 14살, 12살 터울의 누나 둘, 그리고 지오반니까지 다섯 식구 모두 와인이라는 가업에 몸담고 있고, 가야는 이 가족들에 의해 움직인다. 와인업계에서 ‘패밀리 비즈니스’란 흔한 자랑거리 중 하나이지만, 가야의 가족 이야기에는 ‘찐텐’이 있다. 지오반니는 가족과 함께 일하는 고됨을 ‘말 안 해도 알지?’하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같은 목적을 공유하며 가족들과 함께 일하는 건 특권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아티장(Artisan)’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도 “가족”이라고 말한다. “한 명 한 명이 세세하게 모든 일을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 한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와인 사업 전 분야의 일을 다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야 와인이 전 세계적으로 수출되지만, 가족들이 직접 발로 시장을 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야 패밀리

실험정신과 전통 사이

지오반니가 방한한 시기, 83세의 안젤로 가야도 일본 시장에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가장 일찍 와이너리에 나와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다. 지오반니는 “아버지가 여전히 열정적으로 일하는 비결은 매일 바르바레스코 한 잔을 마시기 때문”이라며 “가야 말고 다른 바르바레스코를 마셔도 같은 효과가 있을 진 모르겠다”고 했다. 이 말이 마냥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가야 바르바레스코의 특별함이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가야는 1859년 지오반니 가야가 설립했다. 1937년에는 또 다른 지오반니가 처음으로 와인병에 가야라는 이름을 새겼다. 안젤로 가야가 운이 좋았던 건, 할아버지 지오반니가 당시는 누구도 관심 보이지 않던 바르바레스코의 알짜배기 땅들을 매입했다는 것. 그들은 바르바레스코와 네비올로 품종이 최고라는 것을 믿었고,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안젤로 가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바르바레스코의 왕’이자 ‘이탈리아 와인을 모던 월드로 끌고 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7년 소리 산 로렌조(Sorí San Lorenzo)를 시작으로, 1970년 소리 틸딘(Sorí Tildin), 1978년 코스타 루씨(Costa Russi) 등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생소한 싱글 빈야드 개념을 도입했다. 오늘날 가야의 명성을 대변하는 바르바레스코 삼총사로, 가야 와인 중 가장 값비싼 와인들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는 피에몬테 지역 최초로 젖산 발효, 그린 하베스트, 프렌치 오크 배럴(Barrique)을 도입했고, 바르바레스코 땅에 프랑스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을 심기도 했다. 이 와인이 다르마지(Darmagi)다. 당시 안젤로는 아버지 지오반니 몰래 포도밭 귀퉁이에 까베르네 소비뇽을 심었는데, 후에 알게 된 아버지가 “애석하다(Darmagi)” 한탄하던 소리가 와인의 이름이 됐다. 안젤로 가야의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이야기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 전통주의자로 불리기도 한다. 뉴 오크 바리크를 사용하지만 이후 큰 보띠(Botti) 캐스크에서 숙성을 마친다든지, 최장 30일까지 발효를 진행하는 등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고수하기도 한다.

시칠리아에 있는 가야의 '이다' 와이너리 전경

가야가 시칠리아로 간 까닭

이날 프레스 런치에서 선보인 첫 와인은 북부의 피에몬테가 아닌 남부의 시칠리아에서 온 것들이었다. 가야가 시칠리아의 에트나를 기반으로 신규 프로젝트를 착수한 것은 2017년의 일이지만, 이곳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이다. 때는 1999년. 자코모 타키스(Giacomo Tachis 사시까이아를 탄생시키며 슈퍼 투스칸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설적인 와인 컨설턴트)의 초청으로 안젤로 가야는 시칠리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항공에서 에트나 화산섬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곳이 가야와는 운명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화산의 꼭대기와 검은 화산토는 블랙과 화이트로 이뤄진 가야 와인의 레이블처럼 보였단다. 하지만 자녀들도 어렸던 당시에는 새 프로젝트를 할 여력이 없었다. 이후 에트나의 실험적인 와인메이커 알베르토 그라치(Alberto Graci)를 만나면서 탄력을 받게 되는데, 가야가 맺은 첫 번째 파트너쉽이었다(이전에 안젤로 가야가 로버트 몬다비가 제안한 조인트 벤처사업을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프레스 런치에 나온 이다 비앙코

시칠리아인들은 에트나 화산섬을 그녀(Idda)라 부르곤 한다. 신규 프로젝트에는 가야의 이름 대신 이 이다(Idda)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접근법도 달리했다. 보통 에트나의 북동 지역에 포도밭들이 몰려 있지만, 남서쪽 고지대를 택했다. 에트나는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로 만든 레드 와인이 유명하지만 까리깐테(Carricante)로 만든 화이트 와인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했다. 까리깐테는 산출량이 높은 품종으로 그닥 캐릭터가 뚜렷한 와인을 생산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지대에서 재배하면 산출량이 줄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다는 해발고도 600~1000m의 포도밭에서 자란 까리깐테로 와인을 만든다. 이름은 이다 시칠리아 비앙코(Idda Sicilia Bianco). 에트나 DOC 지역과 DOC 지역을 살짝 빗겨 난 지역의 까리깐테를 블렌딩하여 에트나 비앙코 대신 시칠리아 비앙코라는 이름으로 출시된다. 앞서 이야기한 고지대 출신으로 에트나의 여느 까리깐테 와인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데, 열대과일 향이 풍부하고 뚜렷한 구조감에 파워가 느껴진다. 이다에서 네렐로 마스칼레제 와인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네렐로 마스칼레제는 가벼운 바디감과 옅은 색상으로 피노 누아에 종종 비교되는 품종. 하지만 지오반니는 “네렐로 마스칼레제는 네비올로와 더 비슷하다”고 했다. 네비올로야 말로 가야의 특기 아닌가. 가야가 와인 생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산도와 탄닌, 동시에 잡기 힘든 두 캐릭터를 잘 살리는 것이다. 가야 와인 특유의 섬세함과 우아함도 여기서 비롯된다. 네렐로 마스칼레제로 만든 이다 에트나 로쏘(Idda Etna Rosso)도 가야가 추구하는 섬세함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토스카나에 있는 가야의 '까마르깐다' 와이너리 전경

끝없는 협상, 까마르깐다

피에몬테 주 바르바레스코에 자리잡은 가야는 이후 토스카나로 내려 와 두 개의 와이너리를 인수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날 세 번째로 소개된 까마르깐다(Ca'marcanda)였다. 까마르깐다는 볼게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로 건물의 1/3이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야는 이곳을 인수하기 위해 수차례 주인을 찾아야 했다. 계속 거절하던 주인을 마침내 설득에 성공하면서, 2000년 까마르깐다의 첫 빈티지가 탄생했다. 까마르깐다는 ‘끝없는 협상의 집’을 뜻한다. 까마르깐따의 와인 레이블은 직사각형 안에 X자로 네 개의 삼각형이 나뉘어져 있는 모양인데, 볼게리의 유명한 사이프러스 나무 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도로 양쪽으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가득 들어서 있고 하늘과 땅이 한 프레임에 잡힌 모습. 이 길의 나무들이 오랜 시간 자라 토스카나를 상징하는 모습이 되었듯, “우리도 이런 유산을 남겨야겠다”는 다짐을 담았다고 한다. 까마르깐다 와인은 까베르네 소비뇽 80%에 까베르네 프랑 20%를 섞은 보르도 블렌드 스타일이다. 보통 토스카나에서 만드는 보르도 블렌드를 슈퍼 투스칸 와인이라 부르는데, “가야에서 이 와인을 슈퍼 투스칸이라고 부르나”는 질문에 지오반니는 “아니”라고 했다. 심플하게 있는 그대로 보르도 블렌드 와인이라 한다고.

프레스 런치에서 선보인 와인들

싱글 빈야드 바르바레스코를 희생해서라도

마지막은 가야의 상징 바르바레스코다. 1960년대부터 가야가 지켜오고 있는 한 가지 철학이 있다. “좋은 퀄리티의 와인만 병에 담는다”는 것. 초기에는 5~6년 빈티지를 건너뛴 적도 있었다. 이날 시음한 2019년 바르바레스코는 가야의 이런 철학을 잘 보여주는 예시다. 2018년 7월에 닥친 우박으로 포도나무에 피해가 갔는데 이듬해까지 그 영향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2019년에는 와인의 복합미와 구조감을 위해, 최상급인 3개의 싱글 빈야드 바르바레스코 생산을 포기하고 이 포도들을 바르바레스코 와인 하나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가야가 가야인 이유, 그 정점에 이 와인이 있다. 이날은 가야 와인과 한식 매칭을 주제로 페어링이 이뤄졌다. 이다 시칠리아 비앙코와 노랑 새조개 만두, 에트나 로쏘와 장어구이, 까마르깐다와 한우 안심구이 모두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마지막 바르바레스코에는 육회 백화반 또는 평양냉면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냉면을 선택한 결과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조합을 맛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완벽한 와인은 없다’ 하셨어

앞서 지오반니는 아티장이란 다른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트렌드를 따르려 하지 말고 달리 생각하고 새로운 방향을 구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완벽한 와인을 만들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완벽한 와인이란 없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것들에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불완전한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초점을 두는 것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땅”이라고 했다. 건강한 땅을 유지하기 위해 토양을 정화하는 꽃과 피복작물을 심고, 벌을 기르기도 한다. 벌이 꿀을 잘 생산하면 생태계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가야가 오랫동안 가야다운 와인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수입사 신동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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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강은영 / 사진 제공 신동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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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3년 0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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