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다이닝의 와인글라스들

Written by강 은영

‘파인다이닝이나 와인바에선 어떤 와인글라스를 쓸까?’란 질문이 떠오른 건, 최근 새로운 와인글라스들이 눈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와인글라스 수입 담당자들의 이야기는 비슷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홈술 붐을 타며 국내 와인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할 때 좋은 와인글라스 같은 관련 아이템들의 수요도 크게 늘었다”고. 와인글라스 지허(Zieher)를 수입하는 금양인터내셔날의 한미란 대리는 “와인별로 글라스를 바꾸면서 시음하는 소비 경향”을 짚으며 “얇은 크리스탈 글라스 매출이 이커머스와 와인샵을 중심으로 성장했다”고 했다. 시도니오스(Sydonios) 글라스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2년 하반기 국내 들어오기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수입량이 증가하는 추세다. 오래전부터 국내 수입되며 탄탄한 인지도를 쌓아온 리델(Riedel)은 근래 위스키 붐도 호재로 다가왔다. 대유라이프 리델 마케팅팀은 “홈바 개념이 확대되면서 위스키, 코냑, 칵테일과 같은 바웨어 글라스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했다”며 “특히 고품질 위스키를 즐기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위스키에 적합한 글라스를 선보이는 리델은 위스키 애호가들의 관심도 받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테이블 위의 글라스들은 한층 다양해졌다. 리델, 잘토, 마크 토마스(Mark Thomas), 시도니오스, 자페라노(Zafferano), 지허 등(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브랜드들이 있다). 파인 레스토랑과 와인바를 노크해서 물어봤다. 그곳에선 어떤 와인 글라스를 사용하는지. 그 글라스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지도.

시도니오스의 뤼니베셀

주은의 마크 토마스

주은을 처음 방문했을 때 “소믈리에님 이 글라스 어디꺼에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전국 곳곳 제철 재료로 한식 파인다이닝을 선보이는 주은은 전통주 컬렉션과 더불어 1,000여 종의 와인이 리스트업 돼있는 곳이며 청자, 분청, 유기, 옹기, 목기, 칠기 등 내어놓는 식기에서도 우리네 전통을 되새겨보게 만드는 곳인데, 그 사려 깊은 한식 플레이팅 사이 오롯한 와인글라스가 눈길을 끌더란 말이다. 와인리스트에도 스토리를 중시하는 김주용 소믈리에(그는 와인 산지를 방문해 맛본 와인들과 직접 만나 영감을 받았던 생산자들의 와인들로 섬세하게 리스트를 짜곤 한다)는 어떤 글라스를 고를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마크 토마스라는 글라슨데요”로 입을 연 그는 그날 꽤 오래 글라스에 대해 이야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마크 토마스는 전 공정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오스트리아 글라스 브랜드로 마크와 토마스 두 공동 설립자의 이름을 땄다. 이번 참에 다시 물어 본 김주용 소믈리에의 와인글라스 사용법을 공유하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 마크 토마스 더블 벤드 올라운드(Double Bend All-round) 잔이다. 화이트, 로제, 레드 구분 없이 무난히 각 와인의 개성과 특징을 잘 표현해서 두루두루 사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잔에서 적절하게 공기와의 접촉 시간을 이어줘서 잘 숙성된 와인에도 유용하고, 그립감이나 사이즈의 밸런스가 좋아서 테이블 세팅의 품격을 높여준다고. 더블 벤드 화이트 잔은 샴페인 포함 스파클링 와인에도 유용하게 사용한다. 잘 숙성된 그리고 특정 빈티지 또는 떼루아나 포도 품종을 잘 보여주어야 하는 와인들, 또 화이트 와인 중에는 가볍고 신선한 와인, 리슬링이나 소비뇽 블랑 같은 특유의 또렷한 향을 잘 보여주어야 하는 와인, 미네랄이 풍부한 와인도 잘 맞다. 마지막으로 더블 벤드 레드 익스프레션 글라스에 대해서는 “공기와의 접촉을 더 필요로 하거나 풀바디 와인, 아로마가 화려하면서 풍부한 와인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크 토마스 더블 벤드 올라운드 잔

그는 마크 토마스 글라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글라스를 만드는 장인정신이 파인다이닝의 방향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독특한 디자인. “누구나 처음 보면 각인될 수밖에 없는 유니크함이 있지만 과하지 않다. 두 번 꺾어지는 지점이 투박하거나 거칠게 느껴지기보다 편안하고 안정감을 준다. 실제 와인이 담긴 잔을 돌려보면 편안함이 느껴진다. 입술에 닿는 림(Rim)부분이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어 와인이 미끄러지듯이 입속으로 들어오고 목을 많이 꺾어야 할 정도로 글라스의 각도가 크지 않아서 여러 잔을 마시더라도 피로감을 덜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소믈리에 입장에서 다루기 편하다. 세척하거나 광을 낼 때 손에 편안하게 닿고, 100% 크리스탈의 좋은 재질로 만든 글라스라 어느 재질의 린넨과도 잘 맞다. 파손 부분도 크게 걱정이 없어서 주은에서 2년 동안 잘 사용해 왔다.”

마크 토마스 와인잔 제작 모습

라망 시크레의 리델

이번엔 레스케이프 호텔의 라망 시크레로 가보자. ‘현대 한국의 양식’을 추구하는 파인다이닝으로 4년간 미쉐린 1스타를 받아온 이곳에서는 리델 잔에 와인을 서브한다. 와인글라스계에서 언제나 1순위로 소환될 이름 리델은 11대에 걸쳐 268년간 글라스를 만들어 왔고, 최초로 포도 품종별 맞춤 글라스를 개발했다. 특히 이들의 ‘글라스 익스피리언스’ 프로그램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10여 년 전 게오르그 리델(Georg J. Riedel)이 진행할 때 참여한 적이 있는데, 글라스가 바뀔 때 와인의 맛과 향이 어떻게 변하는지 긴한 깨달음을 얻은 바 있다.

리델 레드 타이

최은혜 소믈리에는 “라망 시크레는 주로 음식과 와인 페어링이 많이 나가는 편이라 동시에 다양한 글라스를 눈으로 즐길 수 있게 소개한다”며 “대략 7종류의 리델 잔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페어링에는 주로 결이 좋은 샤르도네를 서브하면서 슈페리제로(Superleggero) 화이트 글라스를 사용한다. 다양한 샴페인을 선택해서 즐기는 샴페인 카트도 손님들이 많이 찾는데 이때는 리델 퍼포먼스 샴페인 글라스를 많이 사용한다고. 그녀가 리델 글라스를 사용하는 이유는 “고객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세련된 라인을 보여주는 글라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글라스에 비해 튼튼한 편이여서 레스토랑에서도 부담 없이 핸들링하기 좋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그녀는 “최근에 슈페리제로 라인들을 몇 가지 더 사용하면서 와인 품종 타입에 따라 용도와 임팩트가 더 확연해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서 더 신뢰하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리델의 다양한 바웨어들

레 끌레 드 크리스탈의 잘토

청담동 최대 규모의 와인리스트를 자랑하는 레 끌레 드 크리스탈은 오직 잘토 글라스만 사용한다. 잘토는 소믈리에들에게 인기가 많은 글라스 중 하나다. 베니스 지역에 뿌리를 둔 이 유리 제조 가문은 6세기 전 오스트리아에 정착하며 글라스웨어 장인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명성을 얻어 왔다. 2009년 12월, 독일 스턴(Stern) 잡지사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와인 잔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10개의 와인 잔에 담긴 동일한 3개의 와인을 테이스팅 했는데 잘토에 담긴 세 가지 와인 모두 시음한 최고의 잔으로 선정한 바 있다.

레 끌레 드 크리스탈은 800여 종의 방대한 와인리스트 중에서도 특히 다양한 샴페인과 부르고뉴 와인 라인업을 자랑하는데, 장운경 헤드 소믈리에는 “잘토 글라스 중에서도 특히 버건디 글라스는 향의 표출이 탁월해 여느 글라스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잘토를 사용하는 이유를 들었다. 잘토 브랜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상품도 버건디 글라스다. 샴페인의 경우 잘토는 일반 샴페인과 올드 빈티지용 샴페인 글라스가 있지만, 그녀는 “좀 더 큰 유니버셜 글라스에 샴페인을 서브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고 이야기했다. “요즘 샴페인은 기포에 중점을 두기보다 향의 표현이나 스타일에 따라 선택하는 게 더 많기 때문”이라고. 그녀의 말대로 유니버셜 잔은 잘토의 여러 글라스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가장 좋은 잔으로 꼽힌다.

레 끌레 드 크리스탈에 진열된 잘토 와인글라스

오프닝의 자페라노

와인바 오프닝은 심미안이 남다른 곳이다. 컬렉터의 프라이빗 아트 컬렉션으로 주기적으로 작품을 교체하는 와인바. 코스 메뉴도 분기별로 바뀐다. 400종 이상의 두터운 와인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는 이곳은 웬만한 프리미엄 와인글라스들은 다 볼 수 있다. 자페라노를 비롯 잘토, 리델, 시도니오스, 마크 토마스, 가브리엘 등 20종의 와인글라스를 구비하고 있다. 김단비 수석 소믈리에의 와인글라스론을 들어보자. “같은 품종의 와인도 생산자, 지역, 빈티지에 따라 무수히 많은 스타일이 발현된다. 영 빈티지인지 올빈인지, 혹은 와인의 베리에이션 컨디션에 맞추어 오프닝에선 소믈리에들의 판단으로 글라스를 결정하고 같은 와인도 상황에 맞추어 서비스하고 있다. 글라스에 따라 맛이 변하는 과정 또한 와인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샴페인 글라스만 해도 잘토의 샤프한 셰잎, 자페라노 울트라 라이트 시리즈의 꽃잎 같은 우아함, 쿠페 글라스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각기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 중 자페라노 글라스는 특히 손님들의 반응이 좋은 아이템이라고 한다. 또 오프닝은 프랑스 와인, 그중에서도 부르고뉴 와인이 가장 많아 자페라노 울트라라이트 시리즈의 버건디 글라스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자페라노 울트라라이트 시리즈

자페라노는 이탈리아 무라노섬 출신 디자이너 페데리코 데 마요(Federico de Majo)가 만든 와인글라스로 와인 전시회 비니탈리 공식 와인잔이기도 하다. 특히 울트라라이트(Ultralight) 콜렉션은 최고급 핸드메이드 크리스탈 와인글라스로 테이스팅을 위한 이상적인 모양과 아름다운 곡선, 초경량(95-105g)의 무게를 자랑한다. 김단비 소믈리에도 자페라노의 장점으로 가벼운 무게와 얇은 글라스 림의 감촉을 우선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자페라노는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와인의 아로마와 풍미를 최대한 끌어내 주고 와인을 마시는 경험을 향상시킨다”며 “소믈리에가 와인을 더욱 우아하게 서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덧붙였다.

조우의 시도니오스

압구정에 위치한 조우는 1++ No.9 한우만 취급하는 한우 오마카세로 유명하다. 대중적인 것부터 하이엔드 와인까지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지만, 높은 한우 값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와인은 콜키지 프리 정책을 유지하고, “손님들이 고급 와인을 들고 오는 경우가 많아서 와인잔도 그에 합당한 수준으로 구비하고” 있는 곳이다. 조우의 조수용 대표에 따르면 시도니오스를 비롯 잘토, 리델 글라스를 구비하고 있고 시도니오스는 브랜드의 모든 와인글라스를 사용한다. 특히 피노 누아 와인을 서빙할 때는 시도니오스 르 썹띨(le Subtil)잔을 애용하고 있다고. “피노 누아의 매력적인 향을 담아낼 수 있는 와인잔 중에 하나가 이 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도니오스 르 썹띨(le Subtil)

시도니오스는 100인의 프랑스 와인 전문가와 보르도 양조 대학 전문가의 연구 끝에 탄생했다. 현존하는 와인글라스가 프랑스 와인의 특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전문가들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프랑스 최고의 와인메이커로 구성된 패널들과 논의하고 시음에 적합한 잔을 찾기 위해 과학적인 연구를 거쳐 정교하게 제작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이름 알파벳 순서를 살짝 변경하여 시도니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샴페인 하우스 자크 셀로스나 보르도 유명 샤또들도 시음용 잔으로 시도니오스를 사용하곤 한다. ‘섬세함’을 뜻하는 ‘르 썹띨’ 글라스는 올드빈티지 샴페인, 오크 숙성 화이트, 피노 누아 등 섬세한 와인에 많이 사용되는 시오니오스의 대표 아이템 중 하나다.

와인소셜의 지허

와인문화공간 와인소셜에서는 어떤 글라스를 쓸까? 오픈 당시 블라인드 테이스팅과 카드 매칭이라는 이색적인 접근으로 단숨에 핫플에 등극한 와인소셜은 최근 좀 더 다양한 이벤트를 여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올 2월에는 ‘향수와 와인 페어링’이라는 주제로 와인 애호가와 향수 애호가의 세계관을 합치시킨 바 있다. 테이스팅 공간인 와인소셜에서는 지허 와인글라스 2가지를 사용한다. 지허는 20여 년 소믈리에로 살아오며 독일 최고의 소믈리에 10인 중 한 명으로 꼽힌 실비오 니체(Silvio Nitzsche)가 만든 와인글라스다. 그의 전략은 와인 잔 선택의 복잡함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VISION 콜렉션 4개의 잔으로 세상의 모든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일전에 조성곤 소믈리에는 “와인 비기너들이 와인을 잘 모른다는 생각에 움츠러드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모르더라도 즐길 수 있는 게 와인이고, 와인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아카데믹한 공간이 아니라 와인을 통해서 경험과 감각을 늘리는 곳, 와인으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곳이 와인소셜”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런 와인소셜의 지향점은 소비자들이 잘못된 와인 잔을 고를까 봐 걱정하지 않도록 단순한 테마나 캐릭터에 기반했다는 지허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지허 발란스 부르고뉴

와인소셜에서는 지허의 가장 작은 사이즈 잔들을 사용한다. 보통 와인을 테이스팅용으로 70ml 소량 서브하기 때문에, “이때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잔을 골랐다”고 조성곤 소믈리에가 말했다. 단, 좋은 피노 누아와 향의 강도가 높은 와인은 리델 퍼포먼스 피노 누아 잔을 사용한다. 주력 글라스로 지허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조성곤 소믈리에는 “매장의 양 옆 가벽 공간을 와인잔으로 인테리어 했는데, 지허 글라스의 모양이 일반적이지 않아 좋았다. 와인을 서브했을 때도 다른 와인잔의 형태와는 차별화된 이미지가 있었고 스템이 높은 지허의 특징도 눈을 사로잡는 요소였다”고 밝혔다.

강은영 사진 와인글라스 수입사 및 각 업장

-리델 수입사: 대유라이프
-잘토 수입사: 크리스탈와인
-마크 토마스 수입사: 뱅베
-지허 수입사: 금양인터내셔날
-자페라노 수입사: 와이넬
-시도니오스 수입사: 밀레짐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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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개일 : 2024년 04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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