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도 말 무렵 내추럴 와인 특집 기사를 썼다. 새로 생긴 힙한 집들은 죄다 내추럴 와인바였고, 내추럴 와인 전문 수입사들이 두각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내추럴 와인 붐이 급물살을 타고 밀려와 발밑을 적시는 통에 초조함 마저 있었다. 내추럴 와인 시음행사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한눈에 봐도 2030. 몇몇을 붙잡고 물었는데 다들 비슷한 얘길 했다. “내추럴 와인은 어렵지 않고 자유분방해서 좋다” 대략 그런 얘기. 기존 문법을 쫓을 필요 없음을 선언하고 산들바람을 만끽하는 얼굴들이었다. 좀 놀랐다. 업계가 그토록 부르짖던 와인 대중화의 패러다임을, 내추럴 와인이 물욕도 없이 나타나 슬그머니 이루려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론 의심의 눈초리와 냉소적인 시선도 있었다. 한 때의 유행으로 반짝하는 건 아닐까? 확장성이 있을까? 3년이 훌쩍 지나 돌아보니, 내추럴 와인 시장은 좀 더 자기 영역을 다듬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늙지 않고, 트렌디함을 유지한 채. 뱅베, 다경, 네이처 와인 등 내추럴 와인 전문 수입사들에게 좀 더 물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 요인 중 하나는 내추럴 와인 수입사들의 소통방식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내추럴 와인식 마리아주
‘흥미로운데?’, ‘신선한 접근이야’ 싶은 와인 행사 뒤에는 내추럴 와인이 있곤 했다. 지난여름, 뱅베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 와인 페어링을 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그 여운을 와인으로 적시는 일, 아름다운 발상이다. N차 관람 간증이 많았던 영화(산, 바다, 안개, 떼루아도 뚜렷한 영화다), 자꾸 미련이 남는 이 문제작을 와인과 함께 되새김질 하자는 군침 도는 제안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로 메가폰을 잡았던 용이 감독이 해준(박해일)의 테마와인을 선정했고, 안중민 소믈리에와 뱅베의 김은성 대표가 서래(탕웨이)의 테마와인을 골랐다. 색다른 행사를 많이 기획하는 뱅베에서도 워낙 호응이 좋았던 행사라 부랴부랴 한 차례 더 진행했을 정도다. 많은 관객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 되었던 것 같다”고 김은성 대표는 이야기했다. 영화 속 인물을 와인으로 표현하고 인상 깊은 장면들에 와인을 대입하면서 영화도 와인도 한층 더 풍부해진, 성공적인 마리아주였다.
다경은 ‘OO와 내추럴 와인은 과연 어울릴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른바 ‘예상치 못한 음식 페어링 시리즈’. 그간 김장김치, 오뎅, 평양냉면 등이 출전했다. 무릇 평양냉면이란 처음 그릇을 비울 땐 알 듯 말 듯하다 며칠 뒤 불현듯 떠오르는 시큼하고 슴슴한 자태로 내추럴 와인과 자주 비교되는 메뉴다. 다경은 내추럴 와인바 오얼에서 이 빅매치를 추진했는데, 오얼 대표가 배운 분이었다. 이웃의 필동면옥에서 평양냉면과 제육을 사 와 내추럴 와인과 곧잘 즐긴다고. 생각해 보면, 어복쟁반에 와인 마시고 평양냉면으로 입가심하는 것은 한국에 사는 와인애호가들만의 특권 아닌가. 그러니까 이건 처음부터 ‘되는 주식’이었다. 오뎅탕에 잔술로 내추럴 와인 마시기, 김치(방어와 파김치, 굴과 보쌈김치, 수육과 백김치 살사 등)와 내추럴 와인 매칭 행사도 큰 호응을 얻었다. 참가자들은 예상치 못한 조합의 반전 매력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부담 없는 가격으로 내추럴 와인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점’에 만족했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내추럴 와인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행사를 기획한 이유라는데, 3년 전 내추럴 와인 시음회에서 만났던 소비자들이 말했던 내추럴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한 맥락이다.
맛과 가치 그리고 내추럴 와인바의 역할
내추럴 와인의 인기 요인은 뭘까? “맛있기 때문”이다. 다경의 밸류 커뮤니케이션 팀 우희현 매니저가 담백하게 정답을 들이밀었다. “내추럴 와인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어떤 와인은 동치미에서 느낄 수 있는 산미를, 어떤 와인은 쿰쿰한 향이 재미를 선사한다. 쿰쿰한 향이 날아간 뒤 진짜 매력이 드러나기도 하고.” 우희현 매니저는 특유의 맛과 함께 ‘가치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인기 비결 중 하나’라고 짚었다. 다경의 진정훈 대표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나올 때쯤이면 삶에 대한 태도에 존경이 생기는 그런 농부들의 와인을 수입하고자 한다”고. 소비자들도 이런 가치에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이야기다. “지속가능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이해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 내추럴 와인을 유행아이템이 아닌 지속 가능한 소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거다. 마시기 편하다는 점도 이점도 있고.” 네이처 와인 컴퍼니 한건섭 대표도 “자연스러움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처럼 와인 역시 자연 그대로의 향과 맛을 담은 와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김은성 대표는 내추럴 와인바가 내추럴 와인 시장의 원동력이 됐다고 본다. “한국에는 비스트로 개념이 거의 없었다. 레스토랑이거나 와인바. 대부분 그랬다. 지금은 내추럴 와인바들이 외국의 비스트로 역할을 한다. 전문 셰프들이 레스토랑보다는 비스트로에 가까운 와인바를 오픈하고 그 수가 늘면서 좋은 음식과 함께 내추럴 와인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더 많이 마련됐다.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다. 기존에는 레스토랑 혹은 바, 샵 위주로 와인 소비층이 형성되었다면, 내추럴 와인 씬은 내추럴 와인바로 불리며 비스트로 역할을 하는 수많은 업장들이 다양하고 질 좋은 음식들과 내추럴 와인을 팔면서 견고한 소비층을 만들었다.”
국내 내추럴 와인 시장의 변화
국내 최초 내추럴 와인 전문수입사라는 다경이 오픈한 것은 2015년 2월. 그 해 9월 네이처 와인 컴퍼니가 탄생했고, 이듬해 뱅베가 문을 열었다. 지금은 훨씬 많은 내추럴 와인 수입사가 생겼다. 그만큼 다양한 생산자와 내추럴 와인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고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우희현 매니저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미국과 일본의 내추럴 와인 시장은 많이 위축된 반면 한국은 크게 성장했다. 매년 방한하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도 점점 늘고 있다. 네이처 와인 컴퍼니의 한건섭 대표도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초기와는 사뭇 달라진 양상도 읽고 있다. “세계적으로 내추럴 와인 붐이 일면서 내추럴 와인을 안 마셔봤다 하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시기도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전 같은 폭발적인 관심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제는 순수하게 내추럴 와인을 궁금해하는 소비자가 늘어나 안정적인 상승선을 보이고 있다.” 뱅베의 김은성 대표도 비슷한 의견이다. “초기 시장에서는 알리는 것이 이슈다. 어느 정도 알려지고 붐이 생기면 양적 성장을 하고, 그 붐이 사그라들면서 점차 질적 성장의 형태로 발전한다. 컨벤셔널 와인시장은 그 과정을 겪고 지금은 꽤 질적 성장을 이뤘고 다시 양적 성장을 달성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내추럴 와인시장은 아직 역사가 짧아서 초기 대유행의 시기를 지나며 어느 정도 거품이 꺼지는 시기를 겪어야 한다고 본다. 양적으론 짧은 기간 꽤 성장했다. 초기에 힙한 사람들이 내추럴 와인을 즐겼다면 지금은 MZ세대 여성들과 40대 초반 여성들이 고루 내추럴 와인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내추럴 와인이 국내 시장에 끼친 영향이라면 “콜키지 문화를 조금 줄인 데 있지 않을까” 반문했다. 내추럴 와인 씬에서는 업장에 와인을 들고 가는 것보다는 업장의 와인리스트에서 골라 마시는 문화가 훨씬 보편적이라는 것. 이어 “심각하게 와인을 공부하고 마시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와인들을 접하면서 와인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데에도 일조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려움도 많다. 하지만
내추럴 와인을 소개하는 어려움에 대해, 세 명의 인터뷰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추럴 와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 까다로운 유통과정, 파생되는 가격 이슈까지. 한건섭 대표는 “현지 와인하우스에서 와인이 떠나는 시점부터 우리나라에 도착해 소비자의 손에 들려지기까지 모든 운송 과정이 가장 민감하고 걱정거리”라고 했다. “품질의 안정성에 기여하는 이산화황 성분이 최소화된 내추럴 와인은 온도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모든 과정을 냉장으로 진행하는데, 어쩔 수 없이 가격이 올라가는 부분은 안타깝다”고 덧붙이면서. 세 사람은 내추럴 와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는데, 우희현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내추럴 와인은 장기 보관이 어렵다는 오해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맛보면 세월이 무색하게 생동감을 보여주면서 세월만큼 깊어진 표현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생산자 중 필립 장봉의 상위 뀌베(블랑 샤흐, 레 발타이유 등)를 발견하면 꼭 마셔보라!”
한건섭 대표는 “내추럴 와인도 펑키한 타입(브렛 성분에 의한 동물성 및 퇴비 등의 독특한 풍미)과 클래식한 타입(익숙한 와인의 풍미)이 있다”며 “그런데 ‘펑키한 타입이 내추럴 와인’이라고 소개받고 그렇게만 인식하는 소비자들이 있다. 내추럴 와인에 대한 단편적인 인식으로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린다. 찌르는 산도 혹은 간장과도 같은 짠맛 등의 개성을 지닌 내추럴 와인은 이해를 위한 충분한 설명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거부감부터 생기게 마련”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한 대표는 내추럴 와인 세미나를 자주 연다. “내추럴 와인의 다양성과 개성을 이해하게 된 소비자들은 더 많은 내추럴 와인에 대해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는 한 와인생산자를 선정해 그의 다양한 와인을 시음하는 행사를 ‘뱀파이어 위켄드 청담’에서 진행하고 있다. 한편 뱅베는 앞으로도 음식페어링을 기본으로 다양한 예술분야와 콜라보를 가질 생각이란다. 다경 역시 ‘예상치 못한 음식 페어링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 분기별로 내추럴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시음회와 자연 속에서 내추럴 와인을 즐기는 팝업 행사도 시도할 계획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내추럴 와인 시장을 조금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 테다.
다경
차 다(茶)에 경사로울 경(慶)을 써서, 차(tea)처럼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내추럴 와인을 표방한다. 대표 브랜드로는 세바스티앙 히포(Sebastien Riffault), 알렉산드르 방(Alexandre Bain), 필립 장봉(Philippe Jambon), 르 헤장 에 랑쥬(Le Raisin et l'Ange), 노 꽁트롤 (No Control)이 있다. @dagyeong_wine
뱅베
세계 최고 수준의 내추럴 와인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내추럴 와인 전문 수입사. 뱅베의 와인은 시그니처인 오렌지 색 ‘V’ 마크로 구분된다. 대표 브랜드로는 얀 뒤리유(Yann Durieux), 제롬 소리니(Jerome Saurigny), 구트 오가우(Gut Oggau), 라디콘(Radikon)이 있다. @vinv.kr
네이처 와인 컴퍼니
바이오다이나믹, 올가닉, 비건, 암포라, 앰버 와인 등 정확한 인증서를 지닌 와인만 수입하고 소개한다. 대표 브랜드에는 프렐리(Frelih), 다리오 프린칙(Dario Princic), 프론토니오(Frontonio)가 있다. @naturewine_co
글 강은영 사진 각 수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