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와인이 온다. 오는 6월 15일 포시즌스 호텔에서 B2B 행사로 뉴욕 와인 시음회가 예정되어 있다. 미국 와인이 요즘 대세로 불린다면 뉴욕 와인은 그런 미국 와인의 차세대 유망주로 불린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유망한 재목을 미리 알아보는 건 언제나 구미가 당기는 일.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뉴욕 와인 시음회에 앞서 지금이 바로 이 새로운 와인산지를 탐험해볼 때다.
미동부로 시선을 돌려라
미국은 거의 모든 주에서 와인을 생산하지만 산업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주는 다섯 정도로 꼽힌다. 서부의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동부의 뉴욕과 버지니아다. 일당백 캘리포니아 이하 마니아층 두터운 오리건과 워싱턴 주가 있으니 미국 와인에 대한 관심은 주로 서부 해안에 머물러 있었다. 동부의 뉴욕 주는 핑거레이크의 리슬링과 뉴욕시티 도심에서 생산한 와인(Urban wine) 뉴스를 간혹 접하는 정도? 누군가 “뉴욕에서도 와인이 나나요?”라고 묻는대도 놀랍지 않을 일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조금 더 놀라울 테지만. 뉴욕 주는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포도생산지다(미토착종인 비티스 라부르스카(Vitis labrusca)의 비중이 높고, 주스로 만드는 양도 상당하는 사실은 감안해야겠지만). 와인 생산 역사로 따지면 서부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도 있다. 17세기 뉴욕 주 허드슨 리버(Hudson River) 지역에 설립된 브라더후드 와이너리(Brotherhood Winery)는 미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첫 빈티지는 183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업이 시작된 시기는 1870년대이다).
이후 1860년대에서 1880년에 이르기까지 뉴욕 주 특히 핑거레이크 지역을 필두로 많은 와이너리들이 생겨났다. 주로 하이브리드 품종을 이용했지만, 스파클링에서 디저트 와인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1950년대 후반은 전환점이 된다. 비티스 비니페라 계 포도종들이 서서히 유입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이민자였던 콘스타인 프랭크(Konstantin Frank) 박사가 지역 최초로 비티스 비니페라 포도종을 식재했고, 헤르만 J 위너(Hermann J. Wiemer: <Wine & Spirits> 매거진 선정 2021년 Top 100 와이너리 중 하나다)가 뒤를 이었다. 뉴욕 와인생산자들의 협회인 <New York Wine & Grape Foundation>에 따르면, 오늘날 뉴욕 주에는 35,000acre의 포도밭과 471개의 와이너리가 있다. 연간 생산되는 와인생산용 포도는 약 57,000톤. 2017년 기준 와인생산량은 2천8백10만 갤런(약 1억 637만 리터)이었고, 뉴욕 주의 와인 수익은 연간 66억 5천 달러에 달한다.
날씨의 방해공작을 피해
미국 북동부, 캐나다 국경과 대서양 사이에 위치한 뉴욕 주는 덥고 습한 여름과 혹한의 겨울을 오간다. 포도밭들은 대체로 해안 가까이나 강 인근 또는 호숫가를 끼고 자리를 잡고 있는데 가혹한 기후 환경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대서양과 수많은 호수 덕택에 물은 풍족하다. 앞서 언급된 뉴욕 주의 가장 유명한 와인산지 핑거레이크는 항공에서 내려다보면 11개의 빙하호가 손가락으로 할퀸 자국처럼 나 있다. 핑거레이크와 함께 뉴욕 주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롱아일랜드도 대서양에서 나온 여러 갈래의 물줄기들이 에워싸고 있다(세부 와인산지는 뒤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하자). 한편으로 뉴욕 주는 기후 환경 때문에 비티스 비니페라 품종 식재에 오랜 시행착오를 겪어 왔다. 강우량이 높고 습한 날씨에 필록세라를 비롯한 병충해가 기승을 부렸고, 질 좋은 포도를 생산하기에 겨울은 너무 가혹했다. 초기 미국 전통품종이나 하이브리드 품종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혹독한 겨울동안 포도나무를 보호하는 방법과 포도 재배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미세기후 지역을 찾으면서 상황은 조금씩 변했다. 뉴욕 와인 산업의 새로운 도약 지점이었다.
뉴욕 와인의 도약점
유통의 변화는 또 다른 도약을 가져왔다. 초기 뉴욕 주의 와인들은 생산지 인근에서만 소비됐다. 와이너리들 대부분 자신들의 테이스팅 룸에서만 와인을 팔았던 것이다. 변화가 일어난 건 최근 20여 년. 뉴욕시티를 중심으로 뉴욕 주의 다른 지역으로 와인을 유통하며 무대를 넓혀갔다. 소믈리에나 바이어 등 업계 관계자들도 점차 뉴욕 와인에 호의적이었다. 뉴욕의 와인 바이어들은 로컬 와이너리에서 수준 높은 와인을 고르는 것이 바다 건너에서 와인을 공수하는 것보다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도 더 나은 결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편 세계 각지의 다양한 와인메이커들이 뉴욕을 새 터전으로 삼았는데, 와인생산자들의 실험정신도 뉴욕 와인의 성장을 이끄는 데 한 몫 했다. 덕분에 뉴욕의 시그니처 리슬링부터 요즘 뜨고 있는 까베르네 프랑,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위시한 보르도 품종뿐 아니라 프리울라노(Friulano)와 사페라비(Saperavi)까지 세계 각지의 다양한 품종들이 뉴욕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뉴욕 주에서 눈여겨 볼 와인산지
뉴욕 주에는 11개의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가 있다. 핑거레이크(Finger Lakes), 롱아일랜드(Long Island), 허드슨 리버 지역(Hudson River Region), 이리호(Lake Erie), 어퍼 허드슨(Upper Hudson), 나이아가라 급경사면(Niagara Escarpment), 챔플레인 밸리(Champlain Valley) 등 메이저 AVA 7개 지역에 핑거레이크의 세부산지 카유가호(Cayuga Lake)와 세니커호(Seneca Lake), 롱아일랜드의 세부산지인 더 햄튼스(The Hamptons)와 노스포크 오브 롱아일랜드(North Fork of Long Island)가 더해져 총 11곳이다.
핑거레이크는 뉴욕 주에서 가장 명성 높은 AVA이자 가장 큰 와인산지다. 콘스타인 프랭크 박사가 처음 비티스 비니페라 종을 식재한 곳도 이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포도밭이 성행한 이유는 주위의 빙하호 덕분에 혹한의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비교적 원만하게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핑거레이크의 유명세를 견인한 것은 리슬링 와인이었다. 아니, 핑거레이크의 리슬링이 뉴욕 주 와인의 명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은 까베르네 프랑도 입소문이 나고 있다. 그 외 관심 받는 건 피노 누아, 샤르도네, 스파클링 와인, 그리고 아이스 와인도 있다. 핑거레이크와 더불어 뉴욕 주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와인산지는 롱아일랜드 AVA다. 이 지역에 첫 와이너리가 설립된 것은 겨우 1973년의 일이지만(소비뇽 블랑의 메카로 우뚝 선 뉴질랜드 말보로가 처음으로 상업적인 와인을 생산한 것도 1973년이다), 성장은 빨랐다. 기후의 덕이 컸다. 롱아일랜드는 대서양 해안의 물줄기와 멕시코만류의 영향으로 뉴욕 주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온화한 기후를 띤다. 포도 생장시기 따스한 날씨도 오래 이어지는 편이다. 또한 대서양 영향의 해양성 기후가 보르도와 흡사한 면이 있어 이곳 생산자들은 보르도 품종에 열의를 품고 있다.
뉴욕 주 와인 산업의 역사가 시작된 허드슨 리버 지역은 여름은 따뜻하고 습하며 겨울은 혹독하게 춥다.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은 허드슨 강 서쪽 해안에 자리 잡아 조금이라도 추위를 완화시키려고 한다. 이곳에서는 미토착종부터 하이브리드, 그리고 리슬링이나 샤르도네 같은 품종들까지 다양하게 재배한다. 한편 AVA 지역은 아니지만 뉴욕시티에서도 와인을 생산한다. 사실 1600년대 중반 네덜란드에서 온 정착민들이 비티스 비니페라를 처음 식재했던 곳이 뉴욕 맨해튼이었다. 비록 그 포도나무는 살아남지 못했지만 이후 여기서 파생된 묘목들이 뉴욕 주의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뉴욕시티의 와인 산업은 한층 다이나믹해졌다. 일례로 부르클린에 위치한 루프탑 레드(Rooftop Reds)는 빌딩 옥상에 자리 잡은 세계 최초의 와이너리다. 대부분의 포도는 와이너리가 핑거레이크에 소유한 포도밭에서 공수하지만, 옥상에 샘플 포도나무들도 식재되어 있고 그 어디보다 화려한 시티뷰를 보며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글 강은영 사진 제공 New York Wine & Grape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