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방울 나지 않는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주목받는 캘리포니아 와인메이커가 된 인물이 있다. 이력을 잠시만 살펴봐도 개척자 마인드를 지닌 강인한 여성일 것이라 쉽게 예상되는 그녀의 이름은 비비아나 곤잘레스 라베(Bibiana Gonzalez Rave). 얼마 전 그녀가 방한하여 자신의 와인을 소개했다. ‘와인즈 바이 비비아나(Wines by Bibiana)’ 아래에서 생산되는 알마 드 카틀레야(Alma de Cattleya), 카틀레야(Cattleya), 쉐어드 노트(Shared Note) 세 브랜드의 와인은 비비아나만큼 강렬한 아로마를 뿜어냈고 속이 꽉 찬 관능미를 보였다.
콜롬비아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캘리포니아로
포도가 와인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14세의 콜롬비아 소녀는 직감했다. 자신이 와인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신의 계시라도 받은 걸까. 몇 년이 흐른 뒤 비비아나는 프랑스행 티켓을 끊었다. 와인이 생산되지 않는 콜롬비아에서 우편으로 날아온 입학 원서에 대학들은 냉담했기에,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기로 한 것이다. 진심은 통한다 했던가. 다행히 한 학교에서 그녀를 받아줬고, 이후 보르도 대학에서 양조학을 공부하며 기초를 다졌다. 졸업 후 곧바로 실전으로 나아간 비비아나는 론 밸리의 도멘 미쉘 앤 스테판 오지에(Domaine Michelle & Stephane Ogier), 보르도의 샤토 오브리옹(Chateau Haut Brion)과 샤토 라 미숑 오브리옹(Chateau La Mission Haut Brion), 그리고 부르고뉴, 꼬냑 등지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비비아나의 캘리포니아 드림은 2004년 시작되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장소로 소노마 카운티를 낙점했지만, 이 젊은 여성 와인메이커의 탐험은 계속되었다. 계절이 반대인 남아공과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3년간 여섯 번의 수확기를 보냈던 것. 다양한 환경에 자신을 내던지며 더 단단해진 그녀는 이후 캘리포니아에 완전히 정착하여 페이 빈야드(Peay Vineyards), 오 봉 클리마(Au Bon Climat), 린마 에스테이트(Lynmar Estate), 퀴페(Qupé) 등에 발자국을 남겼다. 피노 누아, 샤르도네, 시라 와인으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인정받는 와이너리들이었다.
마침내 2012년, 그녀는 첫 브랜드인 카틀레야를 세상에 내놓았고 이어서 쉐어드 노트, 몇 년 뒤 알마 드 카틀레야를 론칭하며 현재 와인즈 바이 비비아나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는 그녀의 노력과 열정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와인을 만든 지 불과 3년 뒤인 2015년, 샌프란시스코 와인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에서 ‘올해의 와인메이커(Winemaker of the Year)’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처음부터 줄곧 프랑스에서 배운 순수한 과일 표현을 추구해 왔지만, 캘리포니아이기에 가능한 양조의 자유는 더 다양한 접근법으로 그녀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즈 바이 비비아나의 와인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아로마와 탄탄한 과실미, 곧고 우아하게 이어지는 긴 피니쉬를 보여준다. 비비아나의 이번 방한에서 만나본 세 브랜드, 알마 드 카틀레야, 카틀레야, 쉐어드 노트 와인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알마 드 카틀레야에 투영된 영혼은
알마 드 카틀레야는 비비아나가 ‘영끌’한 와인이다. 고가에 판매되는 카틀레야의 세컨 와인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보급형 와인에 그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 시작은 비비아나가 고국인 콜롬비아로 카틀레야 와인을 수출하려 시도했을 때였다. 와인은 너무 뛰어났지만 가격 때문에 수입을 망설이던 한 와인상은 “같은 품질의 저렴한 버전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품질과 가격이 어느 정도 비례할 수밖에 없는 와인의 세계에선 황당한 이야기로 웃어넘기고 말 이 요구를 비비아나는 접수했다. 그리고 밤에 진행하는 손수확과 냉침용, 무산소 양조와 최소한의 SO2 사용 등 카틀레야 와인을 만들 때와 동일한 기준으로 새로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영혼을 다 끌어모아 완성한 이 와인 브랜드에 비비아나는 ‘영혼’이라는 뜻의 ‘알마(Alma)’를 붙여 ‘알마 드 카틀레야’라 이름 붙였다.
비비아나의 리드로 시음해 본 알마 드 카틀레야 와인은 3종이었다. 소비뇽 블랑 2020과 샤르도네 2021, 피노 누아 2021. ‘영끌’했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하나하나의 와인에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음식과 잘 어울리고 식탁에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라며 지향점을 설명한 비비아나는 “한국에 와서 경험해 보니 한식과도 상당히 잘 어울린다”라고 음식에 곁들여볼 것을 추천했다. 소노마 카운티 다섯 개 포도밭의 포도를 블렌딩한 알마 드 카틀레야 소비뇽 블랑 2020은 날씨가 선선한 소노마 카운티의 특징이 온전히 전해지는 와인이었다. 오크통에서 발효하고 5개월간 숙성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시트러스와 열대과일의 아로마가 강렬하게 표현되었으며, 생동감 넘치는 팔렛에 부드럽게 넘어가는 텍스쳐까지, 새순이 돋아나는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생기와 화사함을 전해주었다.
동일하게 프렌치 오크통에서 발효하고 숙성한 알마 드 카틀레야 샤르도네 2021은 오크에 밀리지 않는 샤르도네 품종의 순수한 풍미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포도 본연의 힘이 돋보였다. 그 배경엔 비비아나가 남아공에서 샤르도네 와인의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경험과 고품질 샤르도네 와인을 만들기 위한 현재의 집념이 공존한다. “샤르도네 와인은 포도가 충분히 익는 것에서 다 결정된다”라는 그녀. 이어서 보틀샤크의 조성곤 브랜드 매니저는 “캘리포니아에는 보통 포도 재배자가 따로 있지만 비비아나는 이례적으로 포도의 페놀 성숙도를 직접 면밀히 체크한다“라고 부연했다. 마지막 피노 누아는 2021 빈티지로 준비되었다. 러시안 리버 밸리의 포도를 메인으로 하여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하고 프렌치 오크통에서 8개월간 숙성한 와인. 피노 누아의 생기와 프루티함, 입맛을 돋우는 산미가 잘 발현되어, 비비아나가 알마 드 카틀레야에서 추구하고자 한 ‘식탁에 잘 어울리는 와인’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강인한 그녀를 닮은 와인, 카틀레야
카틀레야는 비비아나가 만든 자신의 첫 번째 와인 브랜드다. 프랑스에서 와인을 공부하고 여러 와이너리를 거치며 체득한 ‘포도의 순수한 표현’,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경험을 쌓으며 얻은 유연함이 만나 순수하면서도 파워풀한 와인이 만들어졌다. 비비아나는 자신을 닮은 이 와인에 고국의 국화이자 서양란의 한 종류인 ‘카틀레야(Cattleya)’를 이름 붙였다. 종이가 아닌 면으로 제작된 레이블에서도 면이 주요 수출품인 콜롬비아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온다.
이날 비비아나와의 만남에서는 싱글 빈야드 와인 두 가지가 준비되었다.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신화적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각각 템트리스(Temptress), 가디스(Goddess)라 이름 붙어진 와인들이었다. 템트리스는 러시안 리버 밸리산 샤르도네 와인으로, 60% 새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쳤다. 포도 자체가 좋아 오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응축미를 가진 이 와인에 비비아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강인한 정신을 가졌지만 여신에게 매혹되는 신화 속 영웅의 이야기를 담아 '템트리스'라 이름 붙였다. 2021 빈티지로 만나본 템트리스 샤르도네는 서양 배, 사과, 레몬 커드, 버터의 강렬한 아로마와 망고, 복숭아, 바닐라, 허니서클의 풍미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첫입에 반할 수밖에 없는 와인, 괜히 ‘템트리스’가 아니다.
카틀레야 더 가디스 피노 누아 2021은 웨스트 소노마 코스트 지역의 포도로 만들어졌다. 포도밭은 폴 홉스(Paul Hobbs) 소유로, 태평양에서 불과 8km 떨어져 차가운 바다 안개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다. 피노 누아 클론 ‘777’과 ‘115’를 블렌딩하여 복합미를 끌어올린 이 와인에서 비비아나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보았고, ‘가디스[Goddess(여신)]’를 만나 결혼함으로써 영웅의 장대한 서사가 완성되는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가디스’라는 이름을 주었다. 5년 건조한 최고급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한 이 와인은 생동감 있는 다크 체리와 블랙베리, 동양 향신료, 흙, 가죽의 아로마에 진한 응축미가 느껴지는 팔렛, 강렬한 인상의 피니쉬를 남겼다. 첫 향부터 피니쉬까지 생명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가디스 2021은 와인메이커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콜롬비아를 떠나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비비아나를 닮아 있었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면
이쯤에서 남편 이야기를 해보자. 비비아나는 2011년 피소니 에스테이트(Pisoni Estate)의 헤드 와인메이커 제프 피소니(Jeff Pisoni)와 결혼했다. 1982년부터 캘리포니아 산타 루시아 하이랜드 지역에서 와인을 만들어온 피소니 가문의 장남으로, 말하자면 시댁이 인정받는 와인 가문인 셈. 쉐어드 노트는 비비아나와 제프,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와인 브랜드다. 둘은 피노 누아 와인을 전문으로 만드는 피소니 에스테이트와 카틀레야의 틀을 벗어나 둘만의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 한다. 비비아나는 “피노 누아 말고 다른 품종으로, 캘리포니아에서도 새롭다 할 만한 와인을 만들자”라고 뜻을 모았고, “프랑스 스타일의 소비뇽 블랑 와인”으로 합의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쉐어드 노트’라는 브랜드명도 두 와인메이커가 각자의 노하우가 담긴 노트를 공유하여 만들었다는 뜻을 담았다.
쉐어드 노트에는 루아르 밸리 스타일의 ‘레 피에흐 끼 데씨덩(Les Pierres Qui Decident)’과 보르도 스타일의 ‘르 르쏭 드 메트흐(Les Lecons de Maitres)’, 두 소비뇽 블랑 와인이 있다. 이날 비비아나와는 2021 빈티지의 레 피에흐 끼 데씨덩을 시음할 수 있었다. 스킨 컨택을 거쳐 순수한 포도즙만 얻고, 신선함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유산 발효를 하지 않은 와인. 연간 1,200병만 소량 생산하며 국내에는 단 100병이 들어왔다 한다. 와인은 시트러스와 그린 애플, 허니 서클의 짜릿한 아로마에 이어 시트러스, 사과, 살구, 허브의 풍미가 섬세하면서도 밀도 있게 펼쳐졌고, 선이 가는 산미가 오래 이어졌다. 특히 루아르 밸리 소비뇽 블랑을 연상시키는 미네랄리티가 인상적이었는데, 당연히 토양에 대해 설명할 것이라 예상하고 미네랄리티에 대해 묻자 비비아나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당과 산의 완벽한 밸런스를 추구하되 껍질의 페놀까지 잘 익힐 것, 그리고 충분히 숙성해 향 화합물이 잘 갖춰진 포도를 수확할 것.” 르 르쏭 드 메트흐의 포도가 자라는 포도밭 구획은 음지인 데다 포도나무의 수령이 꽤 있어 열매를 많이 못 맺는데, 그럼에도 위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을 때 미네랄리티도 잘 구현된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생산된 와인은 마스터 소믈리에마저 실렉스(Silex) 혹은 샤토 디켐(Chateau d’Yquem)의 이그렉(Y)이라 착각했던 에피소드가 있을 만큼 탁월한 품질을 보여준다. 국내에 단 100병 들어온 이 와인을 손에 넣을 행운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
와인즈 바이 비비아나의 와인을 만나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양조 시 산소 접촉을 극도로 제한한다”라는 점이다. “향 화합물이 산소와 만나면 좋은 아로마를 잃는다”라는 것이 그녀의 원칙. 때문에 산소가 오크통을 미세하게 투과하는 것 외에는 양조 시 산소 접촉을 0%로 유지한다고 한다. 일부 와인의 필터링을 하지 않는 이유도 필터링 시 어쩔 수 없이 산소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과일의 아로마가 생생하고 선명하게 살아 있고 농밀한 풍미와 섬세함을 겸비한 와인, 와인즈 바이 비비아나의 와인은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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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신윤정 자료 제공 보틀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