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와인과 위스키가 들어선 건 개항 후 조선 말기였다. 1882년 발행된 한성순보에는 수입품 관세를 다루며 ‘유사길’을 언급한 기록이 있다(스코필드를 석호필이라 부르는 우리네 정서에 맞게 선조들은 위스키 대신 ‘유사길(惟斯吉)’이라는 한자 이름을 구했다. 샴페인은 상백윤(上伯允)이다). 갓 쓴 양반과 개다리소반과 위스키가 어우러지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쯤 뒤에는 국산 위스키 생산에 돌입하지만, 정부의 부채질에도 고무적인 성과는 아니었다. 그보다 진짜 코리안 위스키의 서막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싶다(80년대 국산 위스키는 원액을 수입해 만들었다). 2020년, 경기도 남양주에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가 설립됐다. 국내 최초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를 내세우며. 같은 해 김포에는 김창수위스키증류소가 문을 열었다. 최근 롯데칠성은 제주 서귀포에 위스키 증류소를 짓기로 확정했고, 신세계L&B는 제주 올레소주 사업을 접고 그 공장에서 위스키를 생산할 계획이라 한다. 지금 코리안 위스키는 어디까지 왔을까?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와 김창수위스키증류소를 통해 들어본다.
남양주의 쓰리소사이어티스
위스키를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두 곳의 대표는 비슷한 이야길 했다. 계기는 위스키 애호가의 흔한 질문 “왜 국산 위스키는 없을까?”에서 시작됐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두 사람은 스스로 그 답이 되기로 했다는 것이다. 먼저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의 이야기다. 마이크로소프트 한국지사 최연소 임원이었던 도정한 대표는 직장을 떠나 위스키와 맥주 애호가로 덕업일치의 삶에 돌입했다. 청담에서 홉스카치라는 바&펍을 운영했고, 핸드앤몰트라는 수제맥주 회사를 세웠다. 수제맥주의 성공은 ‘언젠가 한국 싱글몰트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이제는 월드클래스 한국 싱글몰트 위스키를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키웠다. 위스키 시장도 커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며 증류소를 준비하던 그는 스카치 위스키 업계 사람에게서 마스터 디스틸러를 소개받았다. 42년 경력의 베테랑 위스키 생산자 앤드류 샌드(Andrew Shand)였다. 마스터 디스틸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글렌리벳 증류소에서 위스키 인생을 시작한 앤드류는 여러 나라의 위스키 증류소를 거쳐 한국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였다. 2020년 6월, 마침내 쓰리소사이어티스가 문을 열었다. 이름 그대로 3개의 ‘소사이어티(사회)’가 함께였다. 재미교포 출신 도정한 대표, 스코틀랜드에서 온 마스터 디스틸러 그리고 한국 직원들. 로고도 세 국가를 상징하는 호랑이(한국), 독수리(미국), 유니콘(스코틀랜드)이 증류소를 수호하는 모양이다.
한국의 4계절이 가장 극대화된 곳에서
남양주를 터전으로 잡은 이유는 물과 자연환경 때문이다. “위스키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성분비의 깨끗한 물”이 있었고, 위스키 생산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숙성을 고려했을 때 적합한 환경이었다. 숙성고의 자연환경이 숙성에 영향을 주는데, 한국의 사계절이 가장 극대화되는 곳을 찾으려 했다고 한다. 증류소가 위치한 지역은 내륙이자 분지기 때문에 여름에는 30도 후반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20도 후반까지 내려갈 정도로 연교차가 크게 난다. 위스키를 숙성하기에 최고의 환경이라는 것이 도 대표의 설명이다. 흔히 알고 있는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보다 한국의 기후는 더 극단적이다. 그 결과가 숙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도 대표에게 물었다. “더울 때는 오크통이 팽창하면서 술을 머금고 추울 때는 수축하면서 술을 내보내며 숙성이 이뤄진다. 기온차가 더 높을수록 더 많은 숙성이 이뤄지게 된다. 해양성기후인 스코틀랜드는 연교차가 크지 않다. 반면 한국은 대륙성 기후가 지배적으로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환경이다. 더 많은 술들이 오크통 속을 오고가게 되고, 같은 1년이라도 스코틀랜드보다 숙성이 더 빠르게 이뤄진다. 이러한 날씨는 많은 숙성도를 만들어내고, 증발량이 스코틀랜드보다는 많지만 숙성도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한국 싱글몰트 위스키의 맛
‘한국 싱글몰트 위스키라고 하면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할지’는 도 대표가 증류소를 세우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었다. 그는 한국의 맛과 향을 담은 위스키를 만들고자 했고 차별화된 특징 중 하나로 ‘스파이시함’을 꼽았다. 우리의 식문화가 주식과 반찬들로 구성되어있듯, 위스키 맛의 구성 중 주식을 ‘스파이시’함에 두고 곡물의 담백한 달콤함, 시트러스함, 꽃향기, 과실 향 등이 주변부를 이루는 ‘반찬’들처럼 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금씩 방법을 바꿔가면서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숙성을 시키는 오크통도 다양하게 사용한다. 버번, 셰리, 뉴오크 등 많은 증류소들에서 사용하는 캐스크도 사용하지만 한국의 술도가들과 협업해 재미있는 캐스크를 준비 중이라 한다.
지금까지 쓰리소사이어티스에서 출시한 제품으로는 싱글몰트 진 ‘정원’과 싱글몰트 위스키 ‘기원 호랑이 에디션’이 있다. 한정 수량 생산된 기원 호랑이 에디션은 국내는 물론 수출을 진행했던 미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일본에서 모두 완판됐다. 4월 말 출시 예정인 유니콘 에디션과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출시 예정하고 있는 독수리 에디션을 끝으로 내년 2,3분기에 정규 제품 출시를 검토하고 있다. 정확한 출시시기와 생산량은 위스키의 숙성 진행도와 맛과 향을 보면서 정규제품으로 소개해도 괜찮다고 판단했을 때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위스키 출시로 잠시 쉬고 있는 증류소 투어 프로그램도 곧 재개할 예정이다.
위스키를 향한 서사시, 김창수위스키증류소
김창수 대표의 위스키 인생은 한편의 서사시다. 술맛을 일찍 알았다는 사람. 집에서 막걸리, 청주, 맥주를 만들고, 와인에 빠져 소믈리에가 되려 한 적도 있다. 결국 위스키에 빠져들었지만. 라프로익 10년 캐스크 스트렝쓰에서 맛본 피트라는 충격적인 맛이 결정타였다. 많은 나라에서 위스키를 만든다. 일본, 대만, 인도에서도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위스키를 만드는데 왜 한국에서 만드는 위스키가 없을까? 그 생각을 하면 분했다. 28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뒀다. 사직의 이유는 위스키를 만들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데 안정적으로 회사 밥 먹다 가는 꿈을 접을 것만 같았다.
앞길은 막막했다. 국내 위스키 관계자들에게 메일을 보내 조언을 구해도 부정적인 의견이 돌아올 뿐. 일단 퇴사 다음 날부터 위스키바에서 일했다. 여러 바에서 일했지만 위스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지금만큼 위스키 문화가 성숙하지 않았던 2013년이었다.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그는 벤처 위스키로 떠오르고 있는 일본 치치부 위스키 증류소 사장에게 편지를 썼다. 무급도 좋으니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대답은 정중한 거절.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의 모든 증류소를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어보자. 그리고 일을 시켜달라고 해보자.’ 15만 원짜리 중고 자전거와 텐트를 들고 무작정 떠났다. ‘교통비와 숙박비, 식비만 아끼면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을 여몄지만, 생각보다 여정은 더 힘들었다.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아일라 섬에서는 동물 트랩에 자전거가 걸려 넘어져서 한 달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위스키 증류소를 다니는 일은 즐거웠단다. 약 4개월, 스코틀랜드 길바닥을 누비며 102곳의 위스키 증류소를 모두 방문했다. 처음에 목표했던 스코틀랜드 증류소에서 일 하기는 실패했다. 위스키 증류소들도 대부분 대기업 소유 생산 공장 혹은 관광명소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 좀 배우게 해 주세요”라는 말조차 전할 곳이 없었다. 마지막 102번째 위스키 증류소 방문을 마치던 날, 글라스고에 있는 유명 위스키 바에서 한 동양인을 만나면서 그는 희망의 끝자락을 잡는다. 그는 일본 치치부 증류소의 직원이었다. 둘은 위스키가 매개가 되어 금세 친해졌고 이를 계기로 치치부 증류소에서 위스키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설립 과정은 역경의 연속이지만
2020년 김창수 대표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증류소를 세울 수 있었다. 김포를 선택한 이유는 접근성을 고려해서였다. 국내에도 사람들이 찾아 와 구경할 수 있는 위스키 증류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고 한다. “일본 같은 후발 신세계 국가들을 봐도 위스키 증류소는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이 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나는 마른 오징어를 쥐어짜듯 겨우 만든 증류소였다. 그래서 증류소를 하더라도 일을 병행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나마 소규모 공장을 임대하기 쉽고 서울과 가까운 곳이 김포였다” 그가 솔직하게 터놓았다. 위스키 증류소를 설립하는 어려움은 돈 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자원을 수입에 의존해야하고 국산을 선택하면 비용이 훨씬 더 올라가는 환경, 사치품을 만든다는 대중의 인식, 상상할 수 없이 높은 세금, 내가 만들어도 직접 팔 수 없는 유통 제한, 무엇보다도 국산 위스키라는 분야가 거의 처음 시도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갖춰져 있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그는 토로했다.
“위스키는 과도한 자본과 시간이 투입 되어야 하는 굉장히 비효율 적인 술”이라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위스키라는 술인 되는 것”이라고 옹호하는 그는 “가격보다는 맛, 그리고 새로움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싱글 몰트 위스키의 세계라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근 200년간 스카치 위스키는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갖고, 위스키 세계의 기준이 되었다. 이런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위스키를 바라보고 싶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위스키의 맛과 세계는 그런 것이다. 다만 그는 위스키의 출시 계획에 대해선 답을 미루었다.
위스키 시장의 미래는
대기업들이 위스키 시장에 뛰어드는 것에 관해선 두 인터뷰이 모두 ‘시장은 더 커지고 그에 따라 법제도도 바뀌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비추었다. 김창수 대표는 “다양한 자본의 참여로 위스키의 저변이 확대되면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크래프트 맥주를 만들고 목소리를 내면서 법이 바뀌고 더 발전한 맥주 산업의 예를 봐도 그렇다. 위스키 생산자가 늘어나면 국내 위스키 환경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증류소 설립에 있어 어려웠던 점을 행정적인 부분으로 꼽았던 도정한 대표도 설비부터 승인, 그리고 생산을 하면서도 해결해나가야 할 여러 제약들이 많은 상황이라며 비슷한 대답을 했다. 덧붙여 “위스키 증류소를 짓고 생산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더 좋은 싱글몰트 위스키들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며 당찬 각오도 빼놓지 않았다.
글 강은영 사진 제공 쓰리소사이어티스 증류소, 김창수위스키증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