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에 들어서는 와인가게들
시장 안이나 그 인근에 자리를 잡는 와인가게들이 늘고 있다. 자양시장 안 새마을구판장과 조양시장의 조양마트는 와인애호가들의 성지로 불린지 오래다. 금남시장에는 내추럴 와인바 ‘앂비스트로’부터 ‘앂뱅’, ‘앂아로마’가 핫플레이스로 떠올랐고, 인근에는 가맥집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와인바 ‘가뱅’이 문을 열었다. 또한 이촌종합시장에는 장진우 셰프가 오픈한 와인비스트로 ‘스스무’가, 황학동 중앙시장에는 시장 와인바의 이점을 잘 살린 ‘술술 317’이 있다, 럭셔리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와인이 전통시장을 파고드는 모습은 자못 흥미롭다. 이들은 왜 전통시장을 택했을까? 다소 의외의 상권에 자리 잡았다는 점 외에도 와인에 대한 접근 방식이 익숙한 문법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그러니까 ‘와인바에 와인리스트가 없다면’, ‘와인과 컵라면을 같이 파는 가게라면’, ‘와인바에서 안주를 팔지 않는다면’ 같은 생각들이 이곳에서는 실현되고 있다.
가령 앂아로마는 이렇다. 보통은 금남시장 골목을 지나다 문에 달린 커다란 거울을 보고 ‘아 여기’하고 들어서게 되는 곳이다. 오픈 시간이 되면 입간판을 꺼내 놓지만 여차하면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ㄱ자 형태의 바가 중심인 작은 공간이 드러나고 좌석은 7~8개 남짓. 와인리스트는 없다. 대신 있는 와인을 죄다 꺼내 보여준다. 종류가 한정적이란 얘기도 되겠지만, 와인 고르기는 한결 수월해진다. 아무렴 한 줄 글보다는 실물을 보는 게 더 와 닿을 수밖에. 소박해 보이는 키친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수준 높은 음식을 내어 놓고, 빵은 3분 거리에 있는 앂뱅에서 공수한다. 이들 ‘앂’ 시리즈의 시작엔 먼저 앂비스트로가 있는데, 축약하면 이렇다. 내추럴 와인에 빠진 부부가 있었다. 금호동에서 태어난 남편은 금남시장 안에 작은 내추럴 와인바를 하나 내자고 했고 그렇게 2019년 8월, 원 테이블 개념의 앂비스트로를 연다. 요즘은 3개월 치 예약이 꽉 차 있다는 곳이다. 이후 지난해 8월 인근에 오픈한 것이 앂아로마, 마지막으로 탄생한 것이 앂뱅이다. 앂뱅은 아내 김계민 씨가 직접 구운 사워도우와 남편이 만든 사퀴테리, 그리고 그녀가 선별한 내추럴 와인을 판매하는 샵이다. 그러니까 여기 ‘앂’시리즈는 남편과 아내, 그들의 가족이 하나씩 맡고 있는 패밀리 비즈니스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세 가게 모두 내추럴 와인을 취급하지만 와인리스트는 조금씩 다르다나는 것. 각자의 취향에 따라 와인을 고른다.
시장 안에 와인가게를 연 이들의 마음에는 와인을 업으로 삼는 이들 모두의 지상과제일 ‘소비자들에게 와인을 좀 더 친근하게’라는 구호가 자리 잡고 있겠지만, 전통시장에 와인가게를 오픈할 이유는 그 말고도 더 있었다. 지난 해 10월 금남시장 인근에 와인바 가뱅을 오픈한 박재한 대표는 이곳이 비교적 저렴한 상권이라는 사실과 최근 젊은 층의 유입이 늘어났다는 점을 주목했다. 광미이발이라는 옛 간판 아래, 커다란 물음표가 찍힌 창과 그 아래 줄지어 있는 빈 와인 병들이 가뱅의 풍경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곡차곡 쌓은 황도와 3분 카레가 있고, 옆에는 와인셀러가 있다. 박재한 대표는 “와인바에 셰프를 두는 건 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셰프를 고용한다면 단가도 올라갈 수밖에 없을 터. 그냥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와인바를 생각하다 가맥집을 떠올렸다. 가게 맥주집처럼 가게 와인집, 그 생각에 바탕을 두고 가뱅을 열게 됐다. 자연히 와인에 곁들일 메뉴는 친근하다. 황도, 떡볶이, 군만두, 트러플 짜파케티, 컵라면, 볶음밥, 동그랑땡, 이베리코 햄과 계란 후라이, 부라타 치즈 등. 개봉해서 간단히 조리할 수 있는 메뉴들로 가격은 만원 이하거나 조금 넘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맛집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하고, 시장에서 다양한 안주를 공수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셰프의 부재를 채우고 있다.
시장의 인프라를 가장 잘 활용하는 곳으론 와인바 ‘술술317’을 꼽을 수 있다. 황학동 중앙시장 안 주방용품점과 건어물점 사이 자리한 가게다. 상호명은 술술 317이지만, 간판에는 ‘난 절대 안주하지 않아’라고 적혀 있다. 패기 넘치는 젊은 사장의 다짐이기도 하지만, 실제 이곳은 안주를 팔지 않는다. 대신 문밖 어디에서나 안주를 공수해 올 수 있고, 주문을 하면 시장 안 가게들에서 배달을 해준다. 곱창전골, 순대국밥, 모듬전, 생선회, 육회, 새우튀김 등 장르도 다양하고, 중앙시장 유명 맛집인 옥경이네서 갑오징어를 주문하여 와인 한 잔 곁들이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이곳을 찾는 한 손님은 “올 때마다 다른 안주를 맛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정육점에서 소고기를 사와 구워 먹은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이웃 곱창집 사장님이 기증한 버너와 누군가 두고 간 불판이 요긴하게 쓰인 때였다. 반면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와 안주 하는 손님도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때론 이곳에서 소주 대신 와인을 찾는다. 와인은 2~3만 원대 위주 대게 5만 원 이하로 구성해 문턱을 낮췄다.
와인 구매량도 많이 늘어났고 그 어느 때보다 와인샵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요즘. 자양시장 안 새마을구판장은 진즉에 핫한 와인 판매처로 부상한 케이스다. 초기 두부 칸 옆에 진열되어 있던 와인은 이제 독립 공간을 차지하게 됐다. 700여 종의 와인이 빽빽이 들어선 진열대는 웬만한 와인전문샵 부럽지 않다. 건대 인근의 조양마트 역시 골목 안에 위치한 동네 마트라고 하기엔 놀라운 규모의 와인 셀렉션을 선보인다. 마트 입구의 계산대를 넘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와인을 진열해 놓은 냉장 칸이다. 지난해 9월 100여 종의 와인으로 시작한 것이 이젠 무려 800종으로 늘었다. 와인과 음식 페어링을 추천하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할 만큼 와인에 진심이다. 새마을구판장이나 조양마트의 인기 비결은 수준 높은 와인 셀렉션과 더불어 ‘와인 성지’라는 타이틀을 얻을 만큼 은혜로운 와인 가격에 있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전통시장 온누리 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10% 추가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이미 입소문이 자자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꽤 된다.
글/사진 강은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