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러니까 와인을 잘 모르는 지인이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한 병 추천해달라”라고 한다면? 레드 와인을 원하는 게 아닌 이상 십중팔구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추천할 것이다. 누구나 ‘호감형’으로 받아들일 폭발적인 과일 아로마와 직관적인 맛,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평균 이상인 믿고 마실 수 있는 품질 등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만큼 마음 놓고 추천할 만한 아이템은 흔치 않다. 소비뇽 블랑이 하드캐리하는 가운데, 국내에서 뉴질랜드 와인은 지난 5년 새 5배 성장이라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급성장했던 와인 시장이 숨을 고르는 요즘도 뉴질랜드 와인은 쾌속 질주하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 이토록 사랑하는 뉴질랜드 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누구보다 입체적으로 뉴질랜드 와인을 바라보는 전문가 세 명에게 물었다. 알고 마시면 좋을 뉴질랜드 와인 이야기들.
INTERVIEWEE
정아영 원장, 서울스쿨오브와인
배정환 소믈리에, 안다즈 서울 강남
이유진 상무관, 뉴질랜드 무역산업진흥청
왜 뉴질랜드 와인인가?
뉴질랜드 와인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80년대였다. 말보로 지역에 소비뇽 블랑 포도나무가 최초로 식재된 게 1975년, 이어서 1980년대부터 뉴질랜드 와인의 해외 홍보가 시작된 것이다. ‘천혜의 자연에서 생산된 신선한 와인’으로 뉴질랜드 와인을 각인시키기에 청량감 가득한 소비뇽 블랑 와인은 더없이 좋은 모델이었다. 당시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이 남태평양에 홀로 고립된 섬, 그러니까 인간이 정착한 마지막 땅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자연환경에서 생산된다는 점은 전 세계 와인 러버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뉴질랜드 무역산업진흥청의 이유진 상무관 역시 뉴질랜드 와인의 강점에 대해 “말 그대로 때 묻지 않은 자연에서 나온 신선한 와인”이라는 점을 꼽는다. 작년에 직접 뉴질랜드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온 이유진 상무관은 “남알프스 산맥과 푸르른 호수를 곁에 두고 광활하게 끊임없이 펼쳐진 말보로의 포도밭들이 정말 인상적이었다”라며, “뉴질랜드에서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대부분 프랑스가 원산지인데, 뉴질랜드의 떼루아가 더해지면 과실미와 신선함이 가미되는 것 같다. 아마도 뉴질랜드만의 토양과 기후가 와인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뉴질랜드 와인의 매력점을 설명했다.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와인 생산자들이다. 1995년 와인 산업 최초로 지속 가능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도입되었는가 하면 현재 뉴질랜드 와이너리의 96%가 지속 가능 와이너리라 한다. 뉴질랜드 와인의 지속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문화적 요소도 함께 봐야 하는데, 이유진 상무관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마오리족은 자연을 매우 신성시하고 보호하고 공존하는 민족이다. 1000년의 계획을 세우고 운영되는 마오리 와이너리를 포함하여 지속 가능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후손들에게도 좋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물려주는 풍습을 지켜가고 있으며, 유럽 이민자들 역시 이러한 풍습을 존중하고 존속하며 마오리 비즈니스를 장려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생산된 뉴질랜드 와인의 특장점으로 서울스쿨오브와인의 정아영 원장은 “과실의 순수함”을 꼽았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낙농업 국가여서 그런지 몰라도, 더욱 깨끗하고 위생에 신경 쓰는 양조 방식과 남반구의 강한 햇살에서 발전된 강렬한 과실향이 뉴질랜드 와인만의 특별함을 더해준다”라는 게 정아영 원장의 설명. 이에 더해 안다즈 서울 강남의 배정환 소믈리에도 “포도 품종, 떼루아, 과실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대체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하여, 상큼하고 화사한 과일과 꽃의 캐릭터, 퓨어하고 깔끔한 스타일이 장점”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순항 중
세계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래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뉴질랜드 와인의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비뇽 블랑. 특히 젊은 층으로부터 고른 사랑을 받고 있는데, 정아영 원장은 그 비결을 “이해하기 쉬움”에 있다고 봤다. “직관적인 산도, 패션프루트, 자몽 같은 단순한 과실향은 와인을 어렵게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반전 매력을 선사했다”라고. 이에 더해 “편의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편의성과 더불어 피크닉 문화가 더해져 접근성을 더욱 높였다”라는 게 정아영 원장이 분석하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의 성공 요인이다. 이유진 상무관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는데, 그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뉴질랜드에는 ‘No-Fault’ 정책이 있어 품질이 검증된 와인만 수출할 수 있다. 따라서 시중에서 어떤 와인을 고르더라도 품질이 보장된다.”
배정환 소믈리에에게 있어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더욱 특별하다. 그는 “와인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 ‘와인은 그 맛이 그 맛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순간에 무너지게 한 와인이 ‘’킴 크로포드 소비뇽 블랑(Kim Crawford Sauvignon Blanc)이었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업장의 와인을 리스팅하고 관리하는 소믈리에로서도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중요한 아이템이다. “현재 근무하는 업장에서 ‘바이 더 글라스’ 와인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아마 다른 업장들에서도 글라스 와인으로 많이 판매하고 있을 건데, ‘톡톡 튀는 개성’을 잘 표현하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을 좋아하는 고객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가성비’는 배정환 소믈리에가 꼽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의 또 다른 성공 포인트다. “요즘은 모든 분야에서 가성비가 좋은 품목을 찾는 게 트렌드인데,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의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이 젊은 세대에게 잘 통했다고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설명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은 대부분 과실미에 중점을 두고 일찍 소비할 수 있는 스타일로 만들어진 말보로(Marlborough)산 와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의 세계에도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아영 원장은 우선 말보로의 세부 산지별로 와인 맛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햇살이 더 강하고 따뜻한 와이라우(Wairau)강 유역에서는 더 잘 익은 과실 풍미, 자몽, 패션프루트, 복숭아 같은 향이 주를 이룬다. 반면 조금 더 서늘한 아와테레 계곡(Awatere Valley) 주변에서는 조금 더 청량함이 더해지고, 피망이나 아스파라거스, 잔디 같은 풀 향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와 페어링하기 좋은 와인이 만들어진다.” 배정환 소믈리에는 말보로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된 소비뇽 블랑에 주목했다. 특히 뉴질랜드 북섬의 와이라라파(Wairarapa) 마틴보로(Martinborough) 지역에서 생산된 ‘아타랑기 소비뇽 블랑(Ata Rangi Sauvignon Blanc)’을 예로 들며, “말보로 소비뇽 블랑이 상큼한 레몬, 라임의 캐릭터라면 마틴보로 소비뇽 블랑은 잘 익은 패션프루트, 구아바, 황도의 캐릭터다. 뉴질랜드의 로마네 꽁티라 불리는 아타랑기 와이너리가 양질의 포도밭에서 생산량을 제한하여 만든 고품질 소비뇽 블랑을 꼭 만나보길 바란다“라고 추천의 말을 전했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에 익숙해졌다면 프리미엄 와인으로 시선을 옮겨 보자. 정아영 원장은 “현재 뉴질랜드의 프리미엄 소비뇽 블랑은 프렌치 뉴 오크통 숙성, 수확량을 제한한 싱글 빈야드, 손수확 도입 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클라우디 베이 테 코코(Cloudy Bay Te Koko)’, ‘도그 포인트 섹션 94(Dog Point Section 94)’ 등이 좋은 예시이다. 강렬한 과실 풍미와 오크의 바닐라 향이 함께 나는 것이 종종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럴 때는 오크 향의 통합성을 높일 수 있게 2~3년 숙성하면 더 멋진 와인을 즐길 수 있다”라며 팁을 전했다. 배정환 소믈리에도 오크 숙성한 프리미엄 소비뇽 블랑에 대해 "더 농익은 과실 캐릭터와 오크 숙성으로 더해진 복합미가 느껴져 음식과 페어링하기에 정말 좋다”라며, ‘클라우디 베이 테 코코’와 ‘리틀 뷰티 블랙 에디션 소비뇽 블랑(Little Beauty Black Edition Sauvignon Blanc)’을 추천했다.
소비뇽 블랑 그 너머에
뉴질랜드만의 신선함과 생생한 과일 아로마는 소비뇽 블랑에서만 발현되는 건 아닐 테다. 배정환 소믈리에가 눈여겨보는 품종은 샤르도네. 그는 “굉장한 미네랄리티와 스모키함을 두루 갖춘 훌륭한 샤르도네도 많이 생산된다”라며, 특히 남섬 넬슨(Nelson) 지역에서 생산되는 ‘노이도르프 티리티리 샤르도네(Neudorf Tiritiri Chardonnay)’를 추천했다. “샤블리의 스모키함과 부르고뉴 블랑의 고소한 뉘앙스, 열대과일 캐릭터보단 잘 익은 모과 캐릭터를 두루 갖춘 복합미가 뚜렷한 와인”이라고. 또 그는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가 많이 재배되기 때문에, 전통 방식으로 만든 고품질 스파클링 와인도 꼭 마셔볼 것”을 권했다. 정아영 원장 역시 스파클링 와인에 주목했다. 그녀는 “뉴질랜드는 서늘한 기후를 바탕으로 뛰어난 스파클링을 와인을 만들 잠재력이 있다. 국내에도 더 많은 뉴질랜드 스파클링 와인이 수입되기를 바란다”라는 바램을 전했다. 한편 정아영 원장은 뉴질랜드 와인을 이끌 차세대 품종으로 알자스 화이트 품종을 지목했는데, “향긋하면서 과실의 아로마틱과 은은한 잔당감이 밸런스 있는 리슬링,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 그리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레드 와인으로 넘어온다면 피노 누아를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한다. 뉴질랜드에서 소비뇽 블랑 다음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기 때문. 배정환 소믈리에는 “껍질이 매우 얇고 병충해에 취약한 피노 누아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특징이 있다. 까다로운 피노 누아도 잘 자라는 뉴질랜드의 천혜의 환경에서 고품질 피노 누아가 생산된다”라며 특히 북섬 와이라라파 밸리와 남섬의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 지역을 피노 누아 산지로 주목했다. 이유진 상무관 역시 “센트럴 오타고는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 가장 흡사하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잠재력이 크다”라며 힘을 실었다. 피노 누아에 비한다면 아직 미미한 수준이지만 시라 품종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평소 시라 와인을 좋아한다는 배정환 소믈리에는 북섬 혹스 베이(Hawke’s Bay)에서 생산된 ‘테 마타 불노즈 시라(Te Mata Bullnose Syrah)’를 시라의 신세계를 알려준 와인으로 꼽았다. “프랑스 북론 시라의 섬세함과 산미, 호주 바로사 밸리 쉬라즈의 파워풀함과 농익은 과실 캐릭터를 아주 적절히 작 섞어 놓은 느낌”이었다고. 그는 또 음식과의 조화에 대한 경험담도 공유했다. “어느 자리에서 양갈비 구이와 테 마타 불노즈 시라를 페어링했는데, 와인의 좋은 산미가 기름진 양갈비를 깔끔한 피니쉬로 이끌었고, 적당히 묵직한 바디감과 알코올 레벨은 양갈비의 무거운 텍스처와 균형을 잘 맞추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뉴질랜드 와인의 대중화를 위해 4년째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이유진 상무관은 다년간의 소비재 마케팅 경력을 살려 누구보다 창의적으로 뉴질랜드 와인을 소개해 왔다. 작년에 열린 소비뇽 블랑 데이 행사가 대표적이다. 이유진 상무관은 “소비뇽 블랑 품종에 있어서 뉴질랜드를 ‘Top of Mind’ 국가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첫 노력이었다. 기존에 호텔 볼룸에서 진행하던 와인 시음회의 형식을 깨고 양양 바닷가로 장소를 정했고, 넓고 아름다운 야외 풍광을 즐기며 시원하게 칠링된 소비뇽 블랑을 마시는 설정에 참가자들이 크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또 실제 뉴질랜드 바닷가를 연상시키는 광경이어서 와이너리들도 매우 좋아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녀는 올해도 소비뇽 블랑 데이인 5월 3일에 특별한 행사를 열어 그 맥락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국내 시장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뉴질랜드 와인의 다음 스텝은 무엇일까? 이유진 상무관은 “소비뇽 블랑이 와인 초심자들에게 어필한 면이 있는데, 이분들이 와인을 더 깊이 알게 되면서 뉴질랜드의 피노 누아와 피노 그리, 샤르도네 등 훌륭한 품질의 다른 품종들도 선호하도록 만들고 싶다”라며, “소믈리에 및 와인 교육자들과 협업하여 다양한 품종을 소개하고 알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라는 밑그림을 공개했다. 정아영 원장도 “뉴질랜드 와인을 잘 아는 교육자들을 육성한다면 뉴질랜드 와인에 대한 메시지와 이야기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이에 호응했다. 레스토랑 현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배정환 소믈리에는 “소믈리에들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뉴질랜드가 다양성이 있는 와인 생산국으로 잘 알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라며 뉴질랜드 무역산업진흥청의 홍보 활동을 독려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양한 뉴질랜드 와인이 많이 수입되는 요즘, 소믈리에들 사이에서도 뉴질랜드 와인이 ‘이지-드링킹’의 이미지에서 ‘가스트로노미 와인’으로 급변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다양한 품종과 프리미엄급 와인을 대중화시키는 것, 뉴질랜드 와인의 다음 목적지는 정해진 듯하다.
글 신윤정 사진·자료 제공 뉴질랜드 무역산업진흥청, New Zealand Winegro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