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 볼레로의 시간, 그 일상으로의 초대

Written by: 강 은영

대를 이어 샴페인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당백을 담당하는 와인메이커를 만났다. 프랑크 볼레로(Franck Vollereaux). 샴페인 볼레로의 오너이자 셀러마스터이며 명함 상 직책은 제너럴 매니저다. 와인생산자의 방한이 얼마만이지. 오로지 한국 시장 방문을 목적으로 먼 길을 달려왔단다. 그에 맞춰 지난 11월 18일 페어몬트 엠버서더 서울의 마리포사에서 프레스런치가 열렸다. ‘와인 양조 철학이 뭔가요’ 같은 겸연쩍은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와인 한정 말이 많아지는 이 와인메이커의 이야기 속에는 샴페인에 대한 태도, 습관, 철학이 묻어났다. 그 이야기 속에서 찾은 볼레로의 키워드는 ‘시간’이다.

볼레로의 오너이자 셀러마스터 프랑크 볼레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

볼레로 가는 샹파뉴의 포도 재배 농가였다. 1805년부터 피에리와 무지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를 판매했다. 와인 비즈니스에 직접 뛰어든 건 1923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물가가 폭락하며 큰 시련을 겪고 난 뒤였다. 1935년에는 피에리에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1.3km의 지하 와인 저장고가 딸린 에스테이트를 유명 샴페인 하우스에게서 매입한 것이다. 지금은 프랑크의 말대로 ‘6대째 가족 경영을 유지하고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샴페인 하우스’로 성장했다. 피에리를 비롯 인근 13개 마을에 걸쳐 42ha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고, 연 생산량은 약 50만 병 정도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는 이들이 추구하는 ‘일관성’과 연결이 된다. 정체성을 유지하기 좋은 규모. 와인은 자가 소유한 포도밭에서 난 포도로만 만들고 오너는 경영을 책임지는 동시에 양조장의 책임도 맡고 있다. 대신 포도를 재배하고 선별하는 일은 그의 삼촌이 맡고 있다.  

전통과 변화

10여 년 전만 해도 볼레로의 생산량 90%는 자국에서 소비되었다. 자국 내 충성도 높은 고객들은 탄탄한 버팀목이었지만(여전히 프랑스 내 25,000여 거래처에 공급하고 있다), 프랑크가 총책임을 맡으면서는 변화를 꽤했다. 생산시설도 교체하고 수출 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9년 샴페인 역사상 최초로 자국 소비보다 수출이 늘어났으니 시류의 변화를 잘 읽은 것이다. 현재 수출 비중이 40%로 껑충 뛰었지만, 목표는 80%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함께 자리한 볼레로의 수출 매니저 줄리앙 브헤종(Julien Breuzon)은 한국 시장에서의 목표를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아직 덜 알려진 샴페인 중 가장 잘 알려진 샴페인이 되고 싶다.” 

(좌측부터) 수출 매니저 줄리앙, 오너 프랑크, 투어 매니저 헬레네

변화는 포도밭에서도 일어났다. 볼레로의 포도밭은 샤르도네가 절반, 피노 누아가 30%, 피노 뫼니에가 20%를 차지하는데, 최근 피노 블랑, 피노 그리, 쁘띠 메슬리에까지 소량 재배하기 시작했다. 샴페인에 허용되는 품종이지만 실전에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이 세 품종을 식재한 이유는 뭘까? 하나는 기후 변화를 염두에 둔 새로운 시도. 한편으론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2025년이면 샹파뉴는 살충제 금지 지역이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볼레로는 제초제와 살충제 등의 사용을 줄이면서 건강한 포도나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 왔다. “포도의 품질이 좋지 않으면 숙성을 오래할 수가 없다”는 말이 많은 걸 설명했다. 볼레로는 샴페인의 숙성기간을 오래 잡기 때문이다. 관련해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마저 하도록 한다.  

가장 만들기 어려운 건 NV 브륏

“기본급인 넌빈티지(NV) 브륏을 잘 만드는 게 가장 어렵다.” 샴페인 생산자들이 곧잘 하는 말이다. 볼레로 브륏 리저브(Vollereaux Brut Reserve)를 마시며 프랑크 볼레로도 같은 얘길 했다. “차라리 빈티지 샴페인은 쉽다. 그보단 최근 3년의 포도를 섞어 매해 균일한 퀄리티의 NV 샴페인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그러니까 목표는 일관성이다. 브륏 리저브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를 동일한 비율로 블렌딩한다. NV인데도 무려 4년을 숙성했다. 법규상 NV 샴페인은 최소 15개월 병숙성, 빈티지 샴페인은 최소 3년 병숙성을 요하지만 볼레로는 빈티지 샴페인의 경우 7~8년을 숙성시킨다. 볼레로의 캐릭터를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이 긴 숙성시간에 있는데, 프랑크의 설명은 이렇다. “도자주 단계에서 당을 첨가하는 건 샴페인의 강한 산도나 거친 맛을 줄이는 데도 일조한다. 그러나 당을 많이 높이면 밸런스가 깨지기 때문에 그보단 숙성을 오래하여 거친 맛을 잠재우고 와인의 균형감을 유지하고자 한다.” 리저브 브륏은 청량함은 간직한 채 부드러운 기포가 포근하게 감싼다. 모닝 샴페인 추종자에게 강추하고 싶을 만큼 기분 좋은 가벼움이 느껴진다. 프랑크는 물 대신 마신다고 했다.

볼레로 뀌베 마가렛의 두 얼굴

흔히 샴페인의 역사에는 역경의 시간을 버텨낸 여성들의 노고가 있다.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로 떠난 남자들을 대신해 포도밭을 지킨 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크의 할머니 마가렛도 그 중 하나다. 1980년 마가렛이 세상을 떠난 후 프랑크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하며 와인을 만들었다. 볼레로 뀌베 마가렛(Vollereaux Cuvée Marguerite). 단발성으로 기획한 이 빈티지 샴페인은 1985년 첫 생산 후 반응이 좋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 빈티지까지는 화이트 샴페인으로 출시했다. 2012 빈티지에서 처음 로제 샴페인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품종 비율은 기존과 동일하게 샤르도네 75%, 피노 누아 25%. 2012년은 피노 누아가 좋아서 세니에 방식으로 로제 와인을 얻기로 했다고 한다. 숙성 기간은 2011이 8년, 2012가 7년이다. 뀌베 마가렛 시리즈는 볼레로가 추구하는 ‘우아한 편안함’의 최고치를 보여준다. 작고 잔잔한 버블은 사과와 레몬 향을 타고 길게 이어지고 산도는 경쾌하지만 날카롭지 않다. 로제는 화이트 버전과 비교했을 때 바디감이나 농밀함에서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지고 시트러스 과일에 붉은 과일의 캐릭터가 은은하게 더해진다. 눈을 가리고 마시면 화이트 샴페인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 프랑크는 “기존 화이트 샴페인이 가졌던 우아함을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찐 로제와 얼음을 타는 샴페인

반면 볼레로 브뤼 로제 드 세니에(Vollereaux Brut Rosé de Saignée)는 로제 샴페인의 캐릭터가 좀 더 드러나는 쪽이다. 100% 피노 누아를 사용했고 이 역시 세니에 방식으로 만들었다. 샹파뉴에선 종종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블렌딩하는 방식으로 로제 샴페인을 만들지만, 프랑크 볼레로는 세니에 방식을 선호한다. 순수하게 로제를 얻는 방식이고 훨씬 생기 있는 와인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제 브륏의 숙성 기간은 2년으로 상대적으로 짧다. “피노 누아는 오래 숙성하면 좀 무거워진다”는 설명에서 다시 한 번 볼레로의 캐릭터가 엿보였다. 볼레로 특유의 ‘사뿐한’ 느낌은 이런 섬세함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디저트와 함께 나온 볼레로 셀레브레이션 아이스(Celebration Ice)는 얼음을 타 마셔도 좋은 달콤한 샴페인이었다. 

볼레로 로제 드 세니에

K-입맛을 저격한 골든 블랑 출시

프랑크 볼레로의 이번 방한 이유에는 골든 블랑 샴페인 런칭도 있다. 병 전체가 골드컬러로 뒤덮여 있는 골든 블랑은 국내 와인수입사 인터리커가 볼레로에 요청해서 만든 한국인의 입맛을 겨냥한 샴페인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다는 과제는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산도나 당도의 미미한 차이도 한국 소비자들은 예리하게 감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골든 블랑 역시 볼레로의 포도밭에서 난 포도로 만들고 세 가지 품종을 동일한 비율로 블렌드했다. 숙성은 36개월. 볼레로 브륏 샴페인의 클래식한 스타일을 유지하되 스파이시한 음식에도 좀 더 잘 어우러지도록 미세하게 당도를 높였고 더 청량한 느낌을 주도록 했다.  

샴페인이 일상이라면

프랑크 볼레로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그가 샴페인 메이커치고는 드물게도, ‘캐주얼’이나 ‘편안함’이란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와인을 만들면서 말이다. 와인메이커들이 특히 샴페인 메이커라면 더욱이 자신의 와인을 표현할 때 ‘피네세(우아함)’를 강조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와인을 마시곤 이해가 됐다. 그에게 샴페인은 곧 일상이기 때문이란 걸. 긴 숙성기간을 고집하는 이유도. 편안함의 의미도(편안함은 결국 우아함으로 귀결된다). 종내에는 물대신 샴페인을 마신다는 그의 말도 몸으로 흡수됐다. 오랜 숙성시간을 통해 편한 스타일로 만드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조금 더 반짝이게 해 줄 샴페인, 그리고 그 샴페인의 일관성을 지키는 일. 볼레로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시간’이라 느낀 건 이런 점들 때문이다.  

수입사 / 인터리커
▶인스타그램

글·사진 강은영 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인터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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